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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지학의 본질을 충실하게 지키고자 했던 '무성서원'

'병오창의기적비'로 전하는 근대사의 비극

2020년 07월 30일(목) 13:23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정읍무성서원(武城書院) -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500

위기지학의 본질을 충실하게 지키고자 했던 '무성서원'
'병오창의기적비'로 전하는 근대사의 비극

투명한 유리구슬 부딪히듯 경쾌한 소리로 흐르는 작은 내를 건너 민가와 살갑게 어깨를 부비며 서 있는 무성서원과 눈인사를 한다. 민가를 바로 곁에 두고 있어서인지 친근하고 소박하게 느껴지는 것이, 학교 가다말고 앞개울에 바짓단 걷고 놀고 있는 학생도 용서하고 달래어 공부시킬 것 같은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곳은 엄격한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이니 그런 상상은 금물이다. 현실과의 타협을 멀리하고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던 무성서원의 학풍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입교 조건이다.
성리학자들은 공부하는 목적을 위기지학에 두었다. 하늘의 이치를 본성 속에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지만 각박하고 경쟁적인 삶 속에서 선한 본성을 잃기 쉽기 때문에 공부를 통하여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철저한 자기 수양과 내면의 도를 닦는 것에 학문의 목적을 두었다. 이는 ≪논어≫의 헌문편에 나오는 “古之學者爲己(고지학자위기), 今之學者爲人(금지학자위인)”에서 비롯되었다. “옛날 학자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적 성취를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 학자들은 남의 눈을 의식한 학문을 한다.”는 뜻으로 ‘위기지학’과 ‘위인지학’을 비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문함의 본질을 충실하게 지키고자 했던 무성서원의 원규(院規)에 ‘과거시험을 보고자 하는 자는 입교를 허가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나이와 신분에 관계없이 입교할 수 있었으나 명예와 출세를 앞세우는 사람은 들어올 수 없었다 하니 신분에 있어서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었지만 학문의 본질에 있어서는 이상적이며 엄격한 학풍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문대에 몇 명이나 진학시켰는가에 사활을 거는 오늘날의 중·고등학교 모습과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에 비해 배향 인물 면에서 독특한 특징이 있다. 대부분 스승이나 선조를 모시는 경우가 많은데 무성서원은 고을을 다스렸던 지방 관료를 배향했다는 점, 배향인물이 고운(孤雲) 최치원으로 보기 드물게 신라시대의 인물이라는 점, 돌아가신 분에 대한 사당을 짓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살아있는 인물에 대한 사당, 즉 생사당을 짓고 배향했다는 점 등이다.
무성서원의 중심 배향 인물인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 대문장가로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인 천재이다. 12살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7년 만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시험에서 수석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으로 뜻을 펼치기가 쉽지 않아 귀국하고 싶어 하자 28살 때 당 희종이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한다. 신라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문장가로서 이름을 알렸지만 골품제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신라에서 6두품 출신의 그가 국정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중앙정치무대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890년 지금의 정읍시인 태산군 태수를 시작으로 지금의 함양군, 서산군 등지에서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말년에는 가야산에 머물렀다고 하나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나라가 멸망해가던 말기의 혼란 속에서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에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지만 골품제의 한계에 갇혀 포부를 펼치지 못한 비운의 천재였다.
이와 같이 이곳 고을 이름이 태산이었던 신라시대에 고운이 태산태수로 부임하여 8년 동안 다스리다가 떠났는데 그의 선정(善政)을 그리워한 고을 사람들이 고운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태산사(泰山祠)라고 하였던 것이 무성서원의 시초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고려 말에 사당이 없어졌다가 조선 초 성종 14년(1483) 정극인이 처가동네인 지금의 자리에 향학당을 짓고 교육하였는데 이곳으로 사당을 옮겼다. 이후 영천자(靈川子) 신잠이 태인현감으로 부임하여 6년간 선정을 베풀다가 떠났을 때 역시 생사당을 세워 배향하다가 태산사와 합하였다. 광해군 7년(1615)에 고을 유림들이 서원을 세워 인조 8년(1630)에 불우헌(不憂軒) 정극인, 눌암(訥庵) 송세림, 묵재(默齋) 정언충, 성재(成齋) 김약묵을 추가 배향하고 숙종 1년( 1675)에 명천(鳴川) 김관을 추가로 모셨다. 숙종 22년(1696)에 무성(武城)으로 사액을 받았는데 무성(武城)이라는 이름이 굳셀 무(武)자 때문에 살짝 거친 느낌이라 왜 그런 이름을 내렸을까 호기심이 일었다.
무성이라는 이름과 서원의 누각인 현가루(絃歌樓)는 논어 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우도할계(牛刀割鷄)라는 사자성어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공자는 ‘흥어시(興於時), 입어예(立於禮), 성어악(成於樂)’ 이라고 하여 ‘시에서 일어나고 예에서 입신하고 음악에서 완성된다.’는 예악(禮樂)사상을 주창하였다. 이와 같은 유교의 예악사상은 예술을 인격완성과 동일시했음을 알 수 있다. 무성서원의 누각인 현가루는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으로 거문고와 노래를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수양을 위한 공부를 계속하라는 것이다. 또한, 무성은 중국 노나라의 마을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거칠고 주먹이 먼저 앞서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국경지대였다. 그런 마을에 공자의 제자인 자유가 부임하여 현가로 예악을 가르치며 선정을 베풀었는데 공자가 자유에게 질문하기를 “무성 같은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 그리 허풍스럽게 현가를 가르칠 필요가 뭐 있는가?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큰 칼을 쓰는 격 아닌가?”라고 하자 자유가 답하기를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예악(禮樂)의 길을 배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게 되고 백성은 예악의 길을 배움으로써 온용(溫容)하게 되어 잘 다스려지며 예악의 길은 상하 간에 중요하다고 배워, 오직 이 가르침을 따랐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선조들은 이름하나에도 고사를 인용하여 깊은 뜻을 짧은 이름에 함축하였으니 그 생각의 품격과 깊이를 따를 길이 없다.
강당과 동재인 강수재 기둥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주련들 역시 깊은 뜻의 가르침을 전하는 교육적 의미도 있지만 허전한 기둥을 장식하는 심미적 기능도 있다.
무성서원의 홍살문을 지나 너른 마당에 들어서면 오른 편으로 고직사가 보이고 안쪽으로는 동재인 강수재가 보인다. 서원의 강당과 사우는 현가루를 중심으로 둘러진 담장 안에 있다. 담장 앞에는 무성서원의 보존에 공이 있는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 늘어서 있고 중앙에 ‘현가루’가 외삼문 역할을 한다. 유학과 관련된 기관은 항상 ‘동입서출’, 동쪽으로 들어가고 서쪽으로 나오는 것이 예(禮)이기 때문에 현가루의 동쪽 문으로 들어간다. 현가루는 이층 누각의 형태로 1891년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립되었으며 강학 공간에 비하면 무게감이 가벼운 문학과 토론의 공간이기도 하다.
현가루에서 마주 보이는 건물이 강학공간인 강당으로 다른 이름의 현판은 따로 없고 무성서원이라는 현판만 걸려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강당은 좌우 한 칸씩 협실이 있고 중앙 3칸은 앞뒤가 시원하게 트여있어서 내삼문의 태극문양이 액자처럼 보인다. 강당에 올라앉으면 멀리 보이는 여덟 봉우리의 좋은 기운이 통하여 근심걱정을 몰아가는 듯 마음이 편안하고 화통해지는 듯하다. 편안해지니 눕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유생들의 공부 공간에 누워서 노닥거릴 일은 아니다. 강당에서 바로 보이는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태산사이다. 고창 출신의 현대 서예가 석정 황욱이 쓴 태산사 현판이 걸려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성종 15년(1484)에 창건하여 헌종 10년(1844)에 중수하였다. 최치원을 중심으로 신잠, 정극인 등 7위를 모시고 있다.
무성서원은 특이하게도 동재를 담장 밖에 세웠다. 보통 동재와 서재는 서로 마주보면서 강당 앞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동재인 강수재는 고종 24년(1887)에 현재의 건물을 세워 그 후 몇 번의 수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강수재라는 명칭은 사액을 받은 후에 변경된 명칭이며 서재인 흥학재가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강수재 앞 쪽으로 서 있는 비석이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라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1992년에 세워진 것으로 병오년(1906)에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면암 최익현은 1905년 치욕적인 을사늑약에 저항하기 위해 전국적인 반일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태인의 둔헌 임병찬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운다.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의병들을 집결시켜 태인읍을 무혈점령하고 이튿날에는 정읍으로 진출했다. 순창, 곡성으로 행군하여 의병의 수도 늘고 전력을 증강하였지만 관군에 당할 수 없는지라 결국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대마도로 끌려가 단식으로 병을 얻어 순국했다. 일설에 따르면 의병과 싸우기 위해 대치한 관군들이 일본인들이 아니라 남원이나 전주 등지에서 온 동포였기 때문에 최익현이 싸움을 포기했다는 말도 있다. 무성서원은 이처럼 비극적인 근대사를 안고 있는, 의롭지만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성서원이 그려진 ‘칠광도’도 빼놓을 수 없는 서원의 이야기 거리 중 하나이다. 일곱 칠(七), 미칠 광(狂)의 칠광도는 광해군 9년(1617)에 인목대비 유폐사건에 반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 태인의 일곱 선비가 스스로를 미치광이로 표현하며 초야에 묻히고자 한 것을 표현한 그림이다. 일곱 선비 중 한 명인 난곡 송민고의 작품을 1910년 석지 채용신이 모사한 작품으로 왼쪽 윗부분에 무성서원이 세밀한 지도처럼 묘사되어 있어 그 당시의 무성서원과 그 주변 전경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무성서원은 사회와 동떨어져 고독하게 학문만 추구한 서원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 속에서 주민들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존재해 왔다.
2020년 7월 6일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 일주년이 지났다. 일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7월부터 9월 중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에서는 ‘2020 세계유산축전 「한국의 서원」’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무성서원은 지난 7월 8일 ‘무성서원 세계유산등재 1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이어 10일에는 ‘국악은 풍류를 타고’라는 표제로 국악 한마당 행사가 진행되었고 7월 25일 KBS1 TV에서 방영되었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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