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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창고인돌의 중요성 재조명<14>

동남아시아 고인돌과 한반도 고인돌 비교분석 - 인도네시아 <3>

세계문화유산를 둘러보며 인도의 정신문화를 엿보다

2007년 12월 10일(월) 11:05 [(주)고창신문]

 

 

 


  고인돌 취재차 인도네시아에 왔다지만, 세계문화유산이 있는 족자카르타를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인도네시아 여행의 기본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예의없는 행동같아서 다음 날  우리는 인도네시아의 불교와 힌두교를 대표하는 사원, 보로부두르(BOROBUDUR)와 쁘람바난(PRAMBANAN)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족자카르타(YOGJAKARTA, 혹은 요그야카르타, 혹은 족자라고도 불림)로 향하였다.

공항에서 보로부두르(BOROBUDUR)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도로는 이차선으로 이어졌고 자주 보이는 조랑말달구지에는 한 짐 가득 나무가 실려 있기도 하였고, 서너 명의 사람이 타고 가기도 하였다. 차가 쉴 때마다 나무젓가락 반절 길이의 대나무에 오백원 짜리 동전보다 좀 큰 철판조각 몇 개를 달아 간단한 탬버린 소리를 내는 악기를 가지고 흔들며 차창으로 다가와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한참을 달리고 나니 멀리서 갑자기 솟아오른 듯 산이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사원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보로부두르는 775년 경 힌두 왕조의 지원으로 축조를 시작하여 불교계의 샤일랜드라 왕조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832년 다시 힌두계의 산자야 왕조의 손에 넘겨졌다가 950년경 왕조의 중심이 자바 동부로 옮겨가면서 밀림 속에 방치되었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1814년경 자바를 통치하고 있었던 영국인 토마스 래플스 경에 의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그 후 자바를 점령하였던 네덜란드에 의해 복원되기 시작하였다. 1973년부터 10년 동안 유네스코(UNESCO)의 지원으로 복원 공사가 재개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1985년 1월에는 이슬람 급진 세력의 주도로 보로부두르 폭파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다행히 199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기에 이르렀다. 

  보도부두르의 불가사의는 건축물의 외면이나 크기가 아니라 심오하고 복합적인 불교의 우주도가 건축의 구조 속에 고스란히 재현된 것에 있다. 사방 대칭의 조화를 이룬 구조물이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3단계로 나누어져 총 6계의 방형 단과 3개의 원형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흔히 9층 사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차츰 상승하는 나선형 구조 화랑의 총 길이는 4km에 달하는데, 그에 따라 지혜도 차츰 높아져 마침내 깨달음의 세계인 열반에 이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열반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시야가 열리면서 사원을 감싸 안고 있는 고봉들이 ‘잠자는 부처(SLEEPING BUDA)’의 형상으로 다가와 속인의 마음을 숙연함으로 사로잡는다. 보로부두르의 상징 스투파(STUPA)는 손잡이 달린 커다란 종을 엎어서 그 안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형상인데, 사람들이 스투파의 구멍 속으로 팔을 들이밀어 부처의 손과 발에 닿고자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남자는 부처의 손을, 여자는 부처의 발을 만지면 복을 받아 잘 살게 된다고 한다. 부처는 사람들의 어리석고 이기적인 기원을 다만 자비로움으로 품어 아늑하고 편안한 미소로 화답하고 있었다.


  보로부드르를 떠나 쁘람바난을 향해 택시는 공항 쪽으로 45분정도를 달렸다. 쁘람바난에 도착한 것은 뜨거운 한 낮의 태양빛이 모든 곳에서 반사되어 통통 튀는 오후 한 시였다. 보로부드르에서처럼 현지인들과는 차별화된 비싼 입장료를  투덜거리며 지불하고 사원에 들어섰더니 가운데 우뚝 선 있는 탑 주변으로는 돌더미만 있는 것 같아 의아하게 생각하였었는데 바로 지진 때문이었다. 작년 오월 족자카르타에 발생한 리히터 규모 6.2의 강진으로 주변의 탑들은 다 돌더미가 되어있었고 가운데 있는 탑들은 심한 부상으로 치료중이었다. 돌이 떨어질 위험이 있어서인지 울타리를 쳐 놓아서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서 아쉽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쁘람바난 사원은 9세기 힌두계의 산자야 왕조 지배 하에 건축한 힌두교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같은 시바 신전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에 브라흐마 신전과 비슈누 신전이 자리하고 있고, 신들의 탈 것이 모셔진 바하나당이 마주보는 형태로 늘어서 있는데, 시바 신은 암소 난디를, 브라흐마 신은 백마 한사를, 비슈누 신은 독수리 가루다를 애용하였다고 한다

  높이 47미터의 시바 신전은 힌두교 사원으로서는 동남아 최대 규모라고 하는데 신전의 외벽에는 고대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의 이야기가 치밀한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하지만 지진으로 인하여 신전에 많은 금이 가 있었고, 어느 부분은 거의 무너져 있는 상태여서 계속 복원 중이었다. 수천 년 인류의 유산이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에 의해 한 순간 붕괴하여 흔적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체험하니 문명에 대한 허무함과 함께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하였다.


  아름다운 신전의 온전한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없었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안고 쁘람바난을 떠나 배낭족의 거리로 유명한 족자카르타의 마리오보로(MARIOBORO)로 향하였다. 인도를 가득 메운 채 주차되어 있는 오토바이, 손님을 기다리는 베짜이와 조랑말 수레가 거리의 독특함과 번잡함을 더해주는 가운데, 2차선의 도로 양쪽으로 가게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1킬로미터 이상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골목골목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모습은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우리는 가게를 드나들며 물건을 구경하느라 조랑말 유람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거리에서의 시간을 친절해 보이는 베짜이 기사나 조랑말 아저씨에게 맡겼어도 좋았을 걸 하고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들의 생각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곧이어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박물관에 들어설 때만 해도 줄줄이 늘어서 있었던 베짜이들이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나오자 마치 다들 쫒겨난 것처럼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는데,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베짜이들이 현지인들 태우기도 바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꽤 큰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그렇다고 한 오 분 걸으면 될 것만 같은 거리를 택시로 가기도 뭐해서 운하까지 걸어가기로 하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 웃옷을 벗어 제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외국인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흘깃거리는 현지인들의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간다는 것은 나름대로 용기가 필요한 것이어서 빨리 운하가 나타나주기만을 바라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마침내 걸음을 가로막은 높은 벽 안에는 큰 배들이 나란히 서서 졸음에 겨운 눈을 들어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도로 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물이 갇혀 있는 네덜란드식 운하를 경험하는 것은 또 다른 신선함이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더러운 물이 두렵기도 하였지만, 다시 올 수 없는 어려운 발걸음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뱃사공의 간곡한 권유에 못이기는 척 쪽배 투어를 해보기로 하였다. 운하를 안내한 글에 의하면 이곳에서 목욕하는 여자들도 볼 수 있다고 써있었으나 지금의 물은 더러웠고 여기 저기 쓰레기마저 떠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탄 쪽배는 사람이 직접 노를 저어야 하는 배였는데, 도중에 보니 모터로 움직이는 배들도 많이 다니고 있었다. 정박해 있는 큰 배에서는 시멘트 비슷한 포대를 싣는 부두의 노동자들이 바쁘게 움직이다가 우리를 보며 큰 소리로 아는 체를 하기도 하고 손을 흔들기도 하였는데, 운하의 반대편에는 낚시대를 드리운 한가한 사람들이 절망적이고 어두운 표정으로 눈길을 피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심란함이 캄보디아의 톤레삽 호수를 생각나게 하였으나 여기는 이미 인공적인 힘이 가미된 운하이기 때문에 발전 정도나 역동성을 비교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의 인사동과 같은 장소를 꼭 들러보고 싶었으나 여러 정황을 보고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택시를 호텔로 돌렸다. 호텔의 수영장에는 뜨거운 태양 빛을 피부에 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넘치는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나라보다 두 시간이 늦은 이곳의 태양은 우리나라와 같은 시각에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싶게 해가 참 빨리 졌다. 오후 네시 정도나 되었나 싶으면 벌써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면서 무슬림들의 기도소리가 도시에 울려퍼지고 저녁이 다 된듯 시원한 바람은 멀리 있는 도로에서 붕붕거리는 오토바이 소리를 호수건너 호텔까지 실어나르곤 하였다.

  내년에 꼭 다시 오시라는 호텔 매니저의 각별한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비행기는 서울을 향해 출발하였다. 비행기 아래로 까마득하게 보이는 인도네시아. 우리는 떠나지만, 그들의 삶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끊임없이 그리고 서서히 변화하면서 지속될 것이고 내 마음속의 인도네시아는 어쩌면 얇지 않은 내 삶의 책 속에 무까난의 눈빛으로 북마크가 되어 꽂혀있을 것이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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