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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품, 선운사

2026년 09월 17일(목) 09:53 [(주)고창신문]

 

고향의 품, 선운사


이동준 작가

ⓒ (주)고창신문



고창의 아침은 언제나 특별하다. 부드러운 안개가 산과 들을 감싸며 마치 시간조차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그 속에서 선운사는 깊은 숨을 내쉰다. 이 절은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서 있는 나무처럼, 고창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선운사는 내 고향의 자부심이자 나의 영혼을 위로하는 장소이다.
어릴 적, 나는 부모님의 손을 잡고 선운사에 자주 들렀다. 그때는 절의 크기와 웅장함이 나를 압도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강렬했던 것은 그곳의 공기였다. 선운사의 공기는 맑고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나무와 돌, 그리고 바람이 함께 만들어낸 이 공기는 어딘가 신비로운 위로를 전해주었다.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없는 평화가 찾아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선운사에 가면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커다란 느티나무였다. 마치 수백 년을 살아온 현자가 모든 것을 관조하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그 나무 밑에서 나는 나만의 작은 세계를 꿈꾸곤 했다. 나무의 뿌리 사이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상상하며, 그 길을 따라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느티나무의 거대한 줄기와 가지는 마치 선운사가 지닌 역사와도 같았다. 한 세대를 넘어 또 다른 세대로 이어진 나무의 생명력은 절의 영혼 그 자체였다.
봄이 되면 선운사는 천국이 된다. 벚꽃과 동백꽃이 만개하며 절을 둘러싼 산 전체가 분홍빛과 붉은빛으로 물든다. 그중에서도 선운사의 동백꽃은 특히 유명하다. 사람들이 “선운사 동백꽃을 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꽃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질 때마다 마치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닿는 것 같았다. 나는 꽃잎 하나를 손에 쥐고 기도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꽃잎은 어쩌면 나의 첫사랑과도 같았던, 순수하고 따뜻했던 감정을 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동백꽃이 만들어내는 붉은 융단 위를 걸으며 나는 사랑의 시작과 끝,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상상하곤 했다.
여름이 오면 선운사의 계곡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득 찬다. 찬란한 녹음 속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심장을 맑게 한다. 나는 더운 여름날, 계곡 옆 바위에 앉아 발을 물에 담그며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시간의 음악 같았다. 어린 시절,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물고기를 쫓던 기억은 지금도 내 마음을 맑게 한다. 물속에서 반짝이는 돌멩이와 잔잔히 흘러가는 물결은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가을은 선운사가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계절이다. 선운사 계곡을 수놓는 꽃무릇과 단풍이 절 주변을 붉고 노랗게 물들일 때, 나는 이곳이 신들이 머무는 장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단풍잎을 밟으며 걸을 때 나는 무언가 신성한 것을 깨닫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넘어,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특히 선운사의 단풍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렬한 색채로 나를 매혹시켰다. 단풍 아래를 거닐며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낙엽을 밟는 소리는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듯했다.
겨울의 선운사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다. 하얗게 눈 덮인 절은 마치 순백의 캔버스 위에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불어오는 바람은 이상하게 따뜻했고,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마음의 평화를 찾곤 했다. 한겨울, 동백나무에 남아 있는 붉은 꽃은 마치 겨울 속 작은 봄처럼 절을 밝게 비추었다.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 하나하나가 마치 절의 역사에 남겨진 흔적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나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멈춰 있는 듯한 고요함을 만끽했다.
선운사의 경내를 거닐다 보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시간이 하나로 융합된다는 것을 느낀다. 수백 년을 이어온 나무와 돌, 절의 기둥과 지붕 하나하나가 각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 고향의 역사와 나의 어린 시절을 어우르며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들리는 종소리는 마치 내 내면의 소리를 깨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울림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영혼과 선운사의 영혼이 만나는 순간이었다.
선운사는 단순히 고창의 한 절이 아니다. 그것은 내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다. 그곳은 내가 혼란스러울 때 언제나 나를 받아주었고, 고요함 속에서 나를 치유해 주었다. 나의 꿈과 슬픔, 그리고 사랑의 조각들이 선운사의 돌길 위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선운사를 그리워한다.
어느 날, 나는 다시 선운사를 찾았다. 예전처럼 느티나무는 그대로 서 있었고, 동백꽃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선운사의 공기였다. 그것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
선운사는 내 고향의 심장이며, 나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자연과 시간, 그리고 나 자신과 깊이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삶의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다. 선운사가 내게 준 것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나답게 만드는 뿌리이며,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집이다. 그곳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하나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조화를 느낀다. 선운사는 내 삶의 시작이자 끝이며, 나의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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