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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실록을 지킨 도암(韜庵) 오희길(吳希吉) 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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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고창(義鄕高敞) 논단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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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6월 29일(월) 17:45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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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의향고창(義鄕高敞) 논단⑤
왕조실록을 지킨 도암(韜庵) 오희길(吳希吉) 참봉
1. 선비 오희길의 출생과 수학(修學)
2. 고창향교터 기증과 순창이거
3. 정여립(鄭汝立)난과 도암의 출사(出仕)
4. 왕조실록의 피난과 보존
5. 도암공 후반기의 사환(仕宦)과 여생
6. 남은이야기 – 공적(功積)의 현양(顯揚)과 공유(共有)
1. 선비 오희길의 출생과 수학(修學)
오공 희길의 호는 도암(韜庵)이다. 선대는 나주인으로서 세조 때의 공신 나성군(羅城君) 자치(自治)의 증손이며 증승지공 언기(彦麒)의 독자로 병신년
(1556 명종11)에 고창현의 북쪽 필봉(筆峰)아래의 사제에서 태어났다. 부친 승지공이 현감 순천 박억령(朴億齡)의 사위가 되어 처가인 고창에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도암은 16세 되던 신미년에 장성의 덕양(행주)기씨(奇氏) 효관(孝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이로써 처 종숙부가 되는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에게 나아가 소학(小學)을 배우게 되었다. 금강공은 곧 하서 김인후 선생의 문인이었는데 도암 역시 평소 하서의 학문을 존숭하였기에 곧바로 주저없이 기공에게 집지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일정한 스승을 두지는 아니하였으나, 인근 호암에 거주하던 선비 변성온(卞成溫)과 장성의 정운용(鄭雲龍)등과 도의지교를 맺고, 사찰이나 서원을 찾아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연마하였는데 모두 과거공부보다는 경학에 집중하였다. 변공은 하서의 문인이며 정공은 기고봉의 문인이었는데, 도암은 율곡과 우계(牛溪, 成渾) 양선생의 학풍을 흠양하며 추종하였다.
2. 고창향교터 기증과 순창이거
애초에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때에 학당동(현 고창읍 월곡리, 제일아파트 부근)에 건립되었는데, 지반이 습하고 규모가 협소하여 다른곳을 택하여 이건하고자 하였다. 이때 고창의 선비들은 도암의 집터가 좋다고 여기어. 높은 값을 주고 구입하고자 제의하였다. 이에 도암은 “지금 부자의 묘를 세우고자 하는데 제가 어찌 한 집터를 아껴서 높은 값을 요구하겠습니까(今立夫子廟 吾何可惜 一家基而望重價乎)”하고 즉시 모친에게 아뢰어, 그 집터를 비워주고 기묘년(1579, 공24세)에 순창의 고례촌으로 이거하였다.
당시의 도암은 5년전 19세에 부친을 잃고, 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으며, 큰 누이가 순창의 양시척(楊時惕)에게 시집갔었던바, 향교를 이거할 수 있도록 집터를 비워주고 누이댁을 의지하여 이주하였던 것이다.
한편, 향교의 이축시기는 교지의 기록에 의하면 대체로 이홍업(李弘業) 현감이 고창의 선비들인 오희길. 안지(安址)등과 협의하여 선조 22년(기축,1589)
에 이축하였다고 한다. 이홍업 현감의 재직기간이 1585~1590(선조23)에 걸치므로 선조22년에 이축하였다는 사실은 수긍이 간다. 다만 집을 비워둔 시기와 견주어 본다면, 집터를 비운지 약10년 뒤에 이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정여립(鄭汝立)난과 도암의 출사(出仕)
도암이 학문을 수련하던 시기에 전주 출신 정여립(1546~1589)은 선조 초년에 급제한 뒤, 이율곡과 성우계의 성원을 받았고 촉망받는 젊은 문신으로서 조야에 이름이 났다. 그러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1584) 돌연 태도를 바꾸어 동인측 권신들과 가까이 하고 율곡과 우계를 배척하였다. 이에 국왕 선조는 “이이가 일찍이 조정에서 여립을 등용토록 천거하였는데, 여립은 지금 매번 이이를 소인이라고 배척하기를 이같이 심하게 하니, 아마도 이사람(여립)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인 듯 하다(李珥 嘗在朝 薦用汝立 汝立今每斥 李珥爲小人如是之甚 疑此反覆之人也 : 도암집 연보)”고 비판하였다. 당시에 여립은 홍문관 수찬직에 있었기에 경연관으로서 자주 왕을 대면하였는데, 이 같은 비판을 받자 즉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이때 낙향한 정여립은 조정과 국왕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었으며,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달 활쏘기 대회를 하며 불만세력을 모았다. 주로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그 조직이 확대되면서 주위의 이목을 끌고 또한 의심을 사게 되었다.
먼저 황해도에서 여립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이 있어 체포령이 내려지자, 여립은 진안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자수권유를 뿌리치고 자결하였다. 역옥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게 되었는데 이를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선조22)라고 한다. 이때 도암 역시 여립과 교유하였던 인물로 지목되어 전주옥에 갇히게 되었던 바, 그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본래 정여립이 박학하고 담력이 있는 인물로 명성을 얻고 있을 때 가끔 강학(講學)을 구실로 방등산 지역에 출몰하였는데. 이때에 도암 역시 주위의 선비들과 함께 여립을 찾아가 만난 뒤로 때로 전주의 여립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뒤에 갑신년(1584, 선조17)에 율곡이 졸하자, 여립은 그동안 스승처럼 받들던 율곡을 배반하고, 동인측 조신들과 결탁하여 율곡에 이어 우계까지 배척하였다.
이 같은 상황을 정해년(1587) 봄에 알게된 도암은 교유하고 있는 선비 정운룡등과 상의하여 글을 보내어 이로부터 뒤로 희길의 발걸음은 다시는 문하에 찾아가지 않을 것이오(自此以後, 希吉之跡, 不復到於門下 吳韜庵 傳)하며 절교를 선언하고 이어 여립의 어긋난 처신을 신랄이 비판하였는데 거의 천여자에 이르는 장문(長文)이었다.
뒤에 결국은 이 편지가 여립의 가택을 수색하여 입수한 문서 뭉치에서 발견됨으로써, 도암은 혐의를 벗어나게 되었으며 옥사에서 생명을 건질 수 있었고, 나아가 출사(出仕)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곧 여립의 문서를 검열하다가 도암의 글을 발견한 선조는 그 내용에 감동하여 즉시 도암을 석방하게 하고 또 역마를 이용 속히 상경토록 하였다. 도암이 대궐에 나아가자, 선조는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리어 말하기를 그대가 여립에게 준 글을 보면서 나도모르게 가상히 여겨 감탄하였다. 이같이 학술을 바르게 닦고 견해가 높은데 무슨 까닭으로 역적 정여립의 문에 출입하였더냐 그대가 평일에 스승삼은 사람과 읽은 책은 무었이더냐(觀爾贈汝立書, 不覺嘉歎, 汝以如許學術之正 所見之高 緣何出入於鄭賊之門耶 汝平日師其人 讀何書:실록권23)고 자상하게 물었고 또 이조에 명하기를 고창에 사는 충의위 오희길은 정해년간에 간사한 무리들이 가득차고 사특한 말들을 함부로 떠들면서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였을 때, 비록 조정에서도 어느 한 사람 이이와 성혼을 구하고자 여립을 공격하는 자가 없었다. 희길만은 능히 이때에 역도의 괴수에게 글을 보내어 이이와 성혼을 추앙하여 높이고 역적의 심술을 배척하였으니 진실로 가상하도다. 포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합당한 관직을 주도록 하라 (高敞居, 忠義衛吳希吉 當丁亥年間 奸黨充斥 邪說肆行 李珥成渾 爲其所擠, 雖朝廷之上 無有一人救珥渾, 而斥汝立者 希吉乃能於此時, 貽書逆魁, 推尊珥渾, 斥其逆賊心術, 良用可嘉, 不可不褒, 相當職際授 上同)고 하여, 이에 후릉참봉(개풍에 있는 정종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신묘년(1591, 선조19) 5월에 경기전 참봉으로 이임되었다.
백원철 공주대 명예교수, 사)고창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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