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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손길로 피어난 ‘국화향기’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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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사랑 열정으로 일군 향기 그윽한 고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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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2일(목) 21:57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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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고창천 고인돌 다리에서부터 도산교까지 왕복 2km에 달하는 둑방 길이 현란한 색채로 물들었다. 노랗고 붉고 진홍색 옷을 입은 수억 송이 국화가 제방을 따라 모여 가을바람을 타고 군무를 시작하였다. 가을을 만끽하고 싶은 연인들, 꽃중년 동호인들이 햇살 아래 통통 튀는 웃음으로 국화의 군무에 화답한다.
그 누구보다도 이 가을을 즐길 자격이 있는 사람은 정원환(63) 씨 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고창세계국화엑스포 준비위원장’이라고 소개한다. 운곡습지, 고창고인돌 공원과 연결하여 트레킹 코스로 국화산책길을 생각했다는 정 씨는 오로지 이 가을을 위하여 2km의 길 제방 양쪽에 봄부터 땅을 고르고 국화를 식재하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았다. 뜨거운 여름날, 햇볕이 그의 피부를 대여섯 번 벗겨놓았지만 신앙적 사명감으로 포기하지 않고 일하는 정 씨를 어쩌지 못하였다. 끊임없이 들어가는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혼자 몸으로 때우며, 유난했던 장마에 자식처럼 돌보았던 국화의 뿌리가 썩어 들어 갈 때도 ‘골이 깊으면 산이 높겠거니’하며 희망을 가졌다.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국화를 돌보는 일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찾고 고창의 미래를 생각하였다. 국화가 피어나는 요즘에는 이 곳을 찾을 손님들을 위해 물청소를 하며 길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있다고 한다.
누구하나 돕는 이 없는 외로운 여정 속에서 몸과 마음이 무너졌을 법도 하련만 그런 내색도 없이 다만, 고창의 미래를 이야기 한다.
2002년 군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한 정 씨는 군의원 시절에도 많은 제안을 하고 아이디어를 내면서 열심히 일하는 군의원으로 주위의 인정을 받았다. 군의원 시절, 그의 운명과도 같은 국화축제를 시작하면서 국화에 대한 몰입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다.
고창의 국화축제에 단초를 제공한 것은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미당의 고향인 부안면 선운리에 미당 시문학관을 개관한 것은 2001년의 일로, 시문학관 개관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시인의 대표작 국화가 지역사회의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여기에 영감을 얻은 정 씨는 순수한 자기 자본으로 국화묘목을 육묘하여 서정주 시인의 묘역과 질마재 마을 주변의 수만 여 평에 이르는 땅에 국화꽃 단지를 조성하였다. 2005년 미당 시문학관 인근 언덕이 온통 노란 국화로 덮여 장관을 이루며 국화축제의 서막이 열렸다. 첫 해에 관광객 18만 명이 몰려 성황을 이루자 국화축제의 가능성을 확인한 정 씨는 국화축제의 규모를 더 키우고 싶었다. 하지만 질마재는 마을 주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주민들의 경작지를 빌려야 하고 주차문제 등으로 주민들의 삶에 불편을 초래하는 등 대규모의 축제 장소로는 한계가 있었다.
여러 장소를 물색하던 중 업체 부도로 방치된 40여 만 평의 고창석정온천지구가 눈에 뜨였다. 온천개발조합측의 사용 승낙을 얻어 국화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한 그를 두고 사람들은 ‘국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자본을 10억 넘게 투자하여 수익을 내기도 어려운 국화축제를 위해 그 너른 땅을 고르고 잡초를 제거하고 퇴비를 뿌리며 국화를 식재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 사람의 노력과 집념으로 그 해 고창에는 인산인해의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일대 주유소의 기름이 떨어지고 식재료가 다 떨어져 식당은 손님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모양성 축제보다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며 전라북도 전체 축제 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축제로 성장한 것이다. 그 근동에 살았던 고창 사람이라면 ‘300억 송이 국화축제’로 전국에서 관광객들이 찾았던 그 화려한 가을의 추억을 기억 한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석정온천지구는 그의 땅이 아니었다. 임시로 빌린 땅에 불과하다보니 언제라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고창의 국화축제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국화축제를 하며 식용 국화의 효능에 대해 공부한 그는 국화차를 만드는 등 수익을 위한 사업을 벌였으나 신통치 않았다. 수익 창출에 실패한 국화에 매달리다 보니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문제가 생겼다. 아내가 아파 몸져눕고 설상가상으로 잘 해왔던 양돈 사업은 구제역으로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은 가족들을 모두 서울로 보내고 혼자 고창에 머물고 있다. 그는 ‘전쟁터에서 가족을 후방으로 보낸 마음’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여전히 굳건하다. 고창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봄에는 갓꽃과 유채꽃 축제, 가을에는 국화꽃 축제로 고창군에 축제의 양 날개를 달자고 제안한다. 또한 고창의 황토땅에서 생산된 무, 배추, 파, 마늘, 생강 등 우수한 품질의 농산물을 그대로 판매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가공하여 고창의 김치 브랜드를 만들어 세계화시키자고 역설한다.
그의 꿈이 실현되기를 기원하듯 노란 국화꽃 무리가 기원의 춤을 춘다.
유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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