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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고창의 정신 - 의병 조여일

임란의 위기에서 창의(倡義) 일으켜 참전

2009년 10월 22일(목) 09:48 [(주)고창신문]

 

↑↑ 전남 장성군 북이면 조여일 의병 산소

ⓒ (주)고창신문


↑↑ 조여일 의병 장성 재실

ⓒ (주)고창신문


↑↑ 조여일 의병 석정 재실

ⓒ (주)고창신문


조여일(曺汝一, 1568~1660). 그의 자는 선집(善執) 호는 호은(湖隱)으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예조참의 서(禮曹參議 庶)의 7세손이며 1568년에 현 고창읍 석정리(石汀里) 정산(鼎山)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인숙(仁淑)은 참봉이요, 아버지는 원(愿)인데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공은 나면서부터 의분에 복받쳐 슬퍼하고 한탄하였으며 충효정신을 더욱 강조하고 마음속에 잊지 않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임금께서 서북(西北)으로 피난을 떠나셨다는 소문을 듣고 비분을 이기지 못한 채 고창 고을에 함께 사는 선비 김홍우(金弘宇), 서홍도(徐弘渡) 등과 뜻을 같이 하여 장성 남문창의소(南門倡義所)로 의장(義將) 김경수(金景壽)를 찾아가서 창의(倡義)를 모의하고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동지들과 함께 용인(龍人), 소사(素沙) 등지에 출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는 한편 군량미(軍糧米)를 모아 의주행재소(義州行在所)와 각도 의병들에게 조달하는 등 각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에 집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자연 속에서 거문고로 우국의 정을 달래며 살다가 1621년(光海 13년) 향년 54세로 일생을 마쳤다. 방손 덕승이 행장을 짓고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이 묘명을 지어 썼으며 장성 오산창의(長城 鰲山倡義詞)에 배향(配享) 되어 있다. 그의 아들 흡(洽)은 1624년 이괄의 난(李适亂)에 도내 동지들과 의병을 규합하였으며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창의(倡義)란 국란을 당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남문창의(南門倡義)는 장성군의 남문으로 말할 수 있으며, 1592년(선조 25) 7월 20일에 김경수, 기호간 등이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모아 11월 초단(草壇)을 설치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호은(湖隱) 선생께서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창의(倡義)를 일으켜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의 사실을 엮어 남문창의(南門倡義)라 하였으며,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에 남문창의비(南門倡義碑)가 있고 북이면 모현리에는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순국한 선열을 모신 오산사(鰲山祠)가 있다. (현재 조여일 의병장의 후손들은 고창읍 석정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창녕조씨 종사랑공파 13대손 조기삼회장과 조춘호 부회장, 조재선 총무 외 회원 일동이 조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보해주었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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