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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현의 사적고찰과 성혼의 정통 1

김 종 수(대한노인회 고창군지회 무장면분회장)

2009년 03월 13일(금) 10:26 [(주)고창신문]

 

무장고을의 역사적 배경과 무장현의 옛 성과 관아(官衙)
1) 삼한시대(三韓時代)인 마한, 진한, 변한 때부터 이지방의 고을 터로써 근방에서 찾기 힘든 유서 깊은 고장이다. 전라도는 마한 땅으로 백제국이라는 것이 공통된 학설이다.
2) 백제시대 때에 무송현(茂松縣)은 송미지현(松彌知縣)이라 하였고 장사현은 상로현(上老縣)이라 하였다.
3) 신라시대 때 신라가 당나라와 합세하여 백제를 침략 후 백제가 망하자(660년) 당나라를 몰아내고 (696) 경덕왕(景德王) 16년 757년에 무송현과 장사현이라 고쳤다. 이때에 무령군(武靈郡)의 영현(領縣)이다. 후백제시대에도 무송현, 장사현이었다.
4) 고려시대 때는 그대로 내려왔으며 감무(監務)를 두어 겸임시켰다. 성종(成宗) 14년 995년에 전국을 10개도(道)로 나누고 전라주도(全羅州道)라 하여 전주목(牧)과 나주목이 형성되어 이곳은 나주목(羅州牧)의 관할 하에 있었다.
5) 조선시대 때 태종(太宗) 17년(1417년)에도 고을(무송현과 장사현을 합병하여 윗글자만을 따서 무장현(茂長縣)이라 하고 진(陣)을 설치 병마사(兵馬使)를 두어 행정까지 겸임했고 세종 5년(1423년)에는 병마사를 첨절제사(僉節制使) : 조선시대 각 진영에 속했던 무관직(武官職)을 고치고 그 뒤 현감을 두었다. 고종(高宗) 33년(1896년) 8월 6일 칙령(勅令) 제 36호로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13개도로 분류되니 전라북도에 소속된 무장군(郡)으로 군수(郡守)가 부임하여 행정을 맡아 16개면(面)을 관할하였다. 행정구역은 ①일동면(一東面 : 현 무장면) ②이동면(二東面 : 현 무장면) ③백석면(白石面 : 현 아산면)④탁곡면(托谷面 : 현 아산면) ⑤성동면(星洞面 : 현 성송면) ⑥원송면(元松面 : 현 성송면) ⑦대제면(大梯面 : 현 대산면) ⑧대사동면(大寺洞面 : 현 대산면) ⑨장산면(莊山面 : 현 대산면) ⑩상리면(上里面 : 현 상하면) ⑪하리면(下里面 : 현 상하면) ⑫와공면(瓦孔面 : 현 공음면) ⑬동음치면(冬音峙面 : 현 공음면) ⑭청해면(靑海面 : 현 해리면) ⑮오리동면(五里洞面 : 현 해리면) 16심원면(心元面 : 현 심원면)이다.
6) 왜정시대(倭政時代) 때 1897년(고종 34년 광무 1년) 황제즉위식을 갖고 국호(國號)를 대한제국이라고 했다. 무장고을은 무장군이라 하였고 1910년 8월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주권을 빼앗기고 일본 통치를 받게 되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령에 따라 부(府)와 군(郡)을 통폐합하여 고창군으로 되어 일동면과 이동면을 묶어 무장면으로 되었다. 옛날이름이 그대로 남은 곳은 무장면뿐이다. 그리하여 광복된후에도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으로서 유구한 역사를 계승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의(義)로운 무장인(人)으로 동학은 1860년 철종(哲宗) 11년에 수운 최재우(水雲 崔在愚)가 부패한 정치와 민생고를 보고 국가와 생민을 구제할 뜻으로 동학(東學)이란 도(道)를 창시(創始)하여 (동방나라에서 창도(唱導)한 뜻으로 동방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민족과 국가의식(意識)에 先행하였으며 갑오동학혁명의 기폭지(起暴地)로서 민족자주의식과 인권과 자유, 자주독립정신적인 근간(根幹)을 이루고 동학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아래 궐기한 불의와 싸우는 투사정신(鬪士精神)의 발祥地이며 이것이 바로 무장기포일의 불씨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1919년 기미년 3.1운동을 폭발하게 한 기폭지 역할을 하였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인 정재용(鄭在鎔)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고 독립운동이 전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어 우리 무장에서는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온 김영완(金永琓)이 중심이 되어 3월 15일 무장장터에서 군중이 남문(현 鎭茂樓)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러대며 진출하다가 왜경에 의해 체포(逮捕)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獄死)하였다. 김영완은 건국애족장이 서훈되어 현재 무장에 충열비가 세워져있다. 이곳에 사적 346호로 2007년 7월 30일자로 지정된 무장현(縣) 관아(官衙)와 읍성(邑城)은 1417년 태종(太宗, 17년)에 병마사(兵馬使)인 김저래가 주민과 승려 2만여명을 동원하여 4개월만에 축조를 완료했으며 둘레 1400미터에 4만여평의 성안에는 진무루(鎭茂樓)와 동헌(東軒)과 취백당(翠白堂)과 객사(客舍) 등 6백여년이 된 건물이 보존된 국내 유일한 석성(石城)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5백여년이나 오래된 느티나무와 사두봉(蛇頭峯)에 얽힌 전설과 성지는 풍수지리학상으로도 유명한 진성지(陣城址)이다. 무장현(현 무장면)에는 사적 346호인 무장현관아와 읍성 외에도 장사성지(長沙城址)와 고산성지(高山城址), 동헌과 진무루, 찰미루(察眉樓)와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과 남극관, 향교, 선운사(禪雲寺) 등의 유명한 사적이 있으며 官衙로는 객사와 아사(衙舍) 향사당(鄕射堂)과 훈련청, 현사(縣司)와 작청(作청), 관청과 형방청(刑房청), 장방청(長房청), 통인청(通引청)과 관노청(官奴청), 사령청(使令청), 공방청(工房청), 대동청(大同청), 책실과 도봉소(都捧所)와 장대(將臺), 형옥(刑獄) 등 많은 관아가 있어 무장읍성의 장대(壯大)한 규모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읍성의 복원을 위하여 초등학교 이전과 주거이전 지장물철거 등 3차에 걸친 발굴조사 등 총사업비 67억여원이 투입되었으며 문화재보호법 제7조에 의거 무장읍성의 명칭을 무장현(縣) 관아(官衙)와 읍성(邑城)으로 2007년 7월 30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346호로 명칭변경되었다. 태종(太宗) 17년 (서기 1417녀누터 성종(成宗) 14년(서기 1482년까지) 진성(陣城)으로 65년간 유지되었고 옛 고을 주위에 왜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진성이며 진성 주위에 해자(垓字) (성밖으로 돌려 파낸 연지(淵地) 또는 호(壕)가 발굴되어 해안방비체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관방유적(官房遺跡)으로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같이 삼한시대부터 현재까지 장구한 역사적 배경과 고증(考證)으로 ‘무장현관아와 읍성’은 시급히 완전복원되어 후세들의 사적연구(史的硏究)와 지역균형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를 무장군 16개면민들은 큰 목소리로 외치며 갈망하는 바이다. 여기에 무장 남극관 노인당이 있으니 충효애향의 혼이 살아숨쉬는 무장고을의 교육의 산실로 성혼(城魂)의 정통(正統)을 후손의 가슴속에 전수(傳授)하기 위하여 그 맥을 이어오는 기로처(耆老處)가 남극관 경로당이다.
다음호에 계속…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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