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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문학관 / 미당서정주 시문학관을 통해 본 우리나라 문학관의 현황⑩

2013년 09월 10일(화) 09:41 [(주)고창신문]

 

이효석 문학관

서정적인 묘사로 자연과 향토성을 탐구한 모더니스트 이효석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효석문학길 73-25

ⓒ (주)고창신문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이 산허리를 온통 뒤덮은 길에 서면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는 달이 ‘흔붓이 달빛’을 흘릴 9월의 봉평. 달빛에 젖어 죽어도 좋을 그리움의 소설은 여전히 그의 펜에서 흘러나올 것만 같다. 이효석 문학관 앞 잔디마당에서 그는 달빛 아래 책상을 내어놓고 앉아 오늘도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주)고창신문

이효석 문학관은 그의 대표작들을 책으로 형상화하여 만든 출입구를 지나 오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문학관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발 아래 아스라이 10만평 규모의 메밀밭이 펼쳐지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물레방아와 개울 뒤로 봉평읍내의 전경도 한눈에 들어온다. 이 넓은 들판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으로 덮이고 천지가 고요해진 9월의 달밤에 ‘손에 잡힐 듯 들리는 짐승 같은 달 숨소리’를 느낀다면 뉘라서 숨이 막히지 않을 것인가?

전망대에서 뒤돌아서면 가산 이효석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잔디 마당을 팔로 감싸듯 둥글게 둘러 선 단층건물이 보이는데 오른편이 문학관, 왼편이 카페 ‘동’의 건물이다. 카페 ‘동’은 가산 이효석이 즐겨 찾았던 함경북도 나남에 있던 찻집 ‘동’을 모티브 삼은 카페이다. 가산은 1932년 함경북도 경성의 경성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하여 안정된 생활을 시작하면서 백계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던 주을온천을 다니며 이국의 분위기를 많이 접했다. 러시아와 가까운 국경도시였던 나남에는 그가 즐겨 다니던 찻집 '동'이 있었다. 그는 ‘동’에서 서양음악과 커피를 즐기며 서구의 분위기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광지에 발표된 가산 이효석의 수필은 찻집 ‘동’에 매료된 가산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드러내 준다.

ⓒ (주)고창신문

“차점 ‘동’ 이것이 또한 나에게는 중하고 귀한 곳이었다. 그곳을 바라고 나는 거의 일요일마다 10리의 길을 걸었다. 공원 옆 모퉁이에 서 있는 조촐한 한 채의 집 – 그것이 고요한 ‘동’- 마차와 함께 거리의 그윽한 것의 하나였다. 붉은 칠이 벗겨진 “DON”의 글자가 밤에는 푸른 등불 밑에 길게 묻혀버린다. 나는 이 이름의 유래를 모르나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 ‘동’은 그 때의 나에게 이 향기를 준 곳이었다. 고요한 곳에서 그 향기를 찾으려고 나는 10리의 발길을 앞두고 눈 오는 밤을 그 속에서 지새우는 것이다. 간간이 레코드 회사 출장원이 내려와 레코드 연주회를 열 때가 있었으니 그것은 늘 귀한 진미가 되었다. 꿈은 한결 풍성하였다.“ - 「고요한 ’동‘의 밤」중에서 -

별로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진 가산 이효석은 가난한 생활의 와중에도 항상 서구적인 깔끔한 옷차림을 하였던 서구 지향적 모더니스트로서 시대와 무관한 탐미주의자였다. 그의 서구 지향적 취향은 옷차림 뿐 아니라 그가 좋아했던 음식과 음악을 비롯하여 집안 곳곳에 배어있었다. 그는 '제대로 된 버터'를 얻어 지하실에 저장하기도 하고, 야외에 나갈 때는 '밀감으로 만든 잼'과 '야채 수우프'를 준비하였고 커피에 '거의 인이 박힌 듯하다'고 말할 정도로 커피를 즐겼다. 특히 '진한 다갈색의 향기 높은 모카'와 같은 질 높은 커피를 구해 직접 커피를 끓여 마시며 크게 기뻐하기도 했다. 음악적 취향에 있어서도 그는 서양의 고전음악 애호가였다. 집안에 축음기를 준비하여 항상 음악을 즐겼는데 ‘음악을 들을 때 삶의 기쁨을 통절히 느낀다’고 표현할 정도로 클래식에 심취하여 '야마하' 피아노를 집 거실에 두고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을 연주하기도 했고,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독일어로 유창하게 부르기도 했다.

유품으로 남아있는 사진 중 평양 푸른집 거실의 전경은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낭만적인 삶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음악을 듣던 중이었던 듯 뚜껑이 열린 축음기 앞에서 등나무 의자에 앉아 LP판을 손에 든 가산의 뒤로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서 있고, ‘MERRY (X)-MAS!’라고 영문으로 쓴 장식판과 미소짓는 프랑스 여배우 ‘다니엘 다류’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80년 전 우리나라에서 찍은 사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구적이고 귀족적인 모습이 물씬 배어나온다. 가산은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학부 강사로 임명되어 함경북도 경성에서 평양으로 이사를 오는데 그가 평양에 살 동안 3번 이사한 집 중 두 번째 집이 창전리 ‘푸른집’이다. 2년 동안의 강사생활 끝에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이 집으로 이사하여 1940년 까지 이 집에 살았는데, 이 집은 넓은 뜰에 나무와 화초가 가득하고 붉은 벽돌로 쌓은 벽면 가득 담쟁이가 올라가 집 전체 덮어 ‘푸른집’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집에서 그는 두 아들을 낳고 축음기로 음악을 듣거나 피아노 연주를 하며 단란한 가정을 이룬 가장으로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푸른집’은 그가 아내를 잃기 전인 1940년까지 ‘메밀 꽃 필 무렵’을 비롯하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완성한 곳이다. 이 시절 그는 유명한 작가로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으며 활발한 사회생활을 하였고 백계 러시아인들이 즐겨 찾던 주을 온천과 동해안 등 관북지방의 명승지를 자주 여행했다. 문학관 한 켠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푸른집의 거실 전경 사진을 토대로 재현한 것이다.

ⓒ (주)고창신문

문학관은 현재 사)이효석 문학선양회에서 관리하고 있어서 성인 2000원 소인 1000원의 관람료를 내야하지만, 그만큼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층으로 되어 있는 전시장에는 “이효석 연보”를 시작으로 이효석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자연인 이효석의 삶”, “봉평장터”와 “창작실”이 재현된 공간을 비롯하여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보여주는 “가산의 문학세계”, “이효석 문학지도”, “이효석과 평창”,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동반자 작가와 구인회” 등의 코너로 꾸며져 구하기 힘든 원본 자료를 비롯한 관련 자료들과 같이 전시되어 있고, 가산의 사후 그를 기리는“‘추모사업 및 효석 문화제”에 대한 정보도 살펴볼 수 있다.

가산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아버지 이시후와 어머니 강경홍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가산, 필명으로 아세아(亞細亞), 효석(曉晳) 등을 쓰기도 하였다. 1914년 8세가 되던 해 봉평에서 100리 떨어진 군 소재지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봉평과 평창의 100리길을 6년동안 걸어서 왕래하였다. 봉평과 평창의 100리길은 봄이면 지천으로 핀 봄꽃으로, 여름에는 뜨거운 햇빛과 소나기 아래 펼쳐지는 숨막힐 듯한 녹음으로, 가을에는 화려한 단풍과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메밀꽃으로, 겨울에는 동화나라같은 설경으로 가산의 문학적 감성을 풍부한 보고(寶庫)가 되었을 것이다. 100리길을 걸어다니면서도 평창공립보통학교 6년간의 과정을 1등으로 마치고 1920년 14세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가산은 이 학교에서 현민 유진오와 깊은 우정을 맺게 된다. 경성제일고보시절 가산과 현민은 수재로 알려졌고 문학적 소양도 비슷하여 가산은 산문은 현민은 시를 창작하면서 같이 서구문학을 섭렵하고 자작소품들을 투고하기도 하였다. 가산은 경성제일고보에서도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수상하였고 경성제국대학 재학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가산의 다재다능한 잠재력은 문학뿐 아니라 음악, 스포츠 등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는 1930년 24세에 경성제국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일정한 수입이 없는 가난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25세의 나이로 함경북도 경성출신의 이경원과 결혼하던 1931년에는 일본인 은사인 쿠사부까 조오지의 소개로 조선총독부에 취직하나 이는 당시 그의 처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취직하고 얼마 되지 않아 카프계열의 이갑기로부터 “너도 개가 다 됐구나”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는 결국 열흘만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후 경성농업학교, 숭실전문학교, 대동공업전문학교에서 교육자로서 생활하면서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여 사회적 명성을 얻는다. 1936년 30세에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면서 평양 창전리의 푸른집으로 이사하여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지만 그의 행복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해 1940년 아내를 잃고 이어 차남 영주를 잃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에게 병마로 찾아와 1942년 5월 고열로 신음하던 그는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5월 25일 아침 7시 30분 36세의 짧은 삶을 마감하였다. 사인은 결핵성 뇌막염. 그의 아버지는 시신을 화장하여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논골에 매장하였다. 그 후 묘는 1973년 영동고속도로 개설로 묘지가 훼손될 위험이 있어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 영동고속도로 변으로 옮겨졌다가 영동고속도로 4차선 확장공사로 인해 1998년 9월 다시 경기도 파주시 경모동화공원으로 옮겨졌다.

가산 이효석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한 것은 나날의 생활과 예술’이었다. 인간 중 가장 가치 있는 인간은 시인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문학과 예술이 삶의 전부인 작가였다. 작품에 몰두하면 침식을 잊고 빠져들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그의 건강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14년 동안 140여 작품을 창작하였던 그의 열정은 이러한 사실을 잘 대변해준다. 그의 작품들은 서정성이 뛰어나 1948년 이후 중·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모밀꽃 필 무렵’, ‘산’, ‘들’, ‘돈(豚)’ 등의 소설과 ‘낙엽을 태우면서’, ‘화초’, ‘청포도 사상’ 등의 수필이 여러 차례 수록되었다.

그 중 1936년 발표된 단편소설 ‘모밀꽃 필 무렵’은 그가 1933년 구인회에 가입하면서 사회비판적 주제를 접고 자연과 향토성에 대한 탐구로 전환한 이후 그와 같은 탐구가 절정에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한국소설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왼손잡이에다가 곰보인 장돌뱅이 허생원은 한 때 돈을 제법 모으기도 하였으나 그 재산마저 사흘동안의 투전으로 다 잃고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러 장에서 장으로 떠돌아다닌다. 봉평장이 서던 날 같은 장돌뱅이 조선달과 충주집으로 간 그는 애송이 장돌뱅이 동이가 충주댁과 시시덕거리는 것을 보고 질투심에 그를 나무라고 손찌검까지 한다.

그러나 한마디 대거리도 하지 않고 나갔던 동이가 자신의 당다귀가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달려와 알려주기까지 하자 동이의 마음씀에 화는 누그러들고 그날 밤 그들은 달빛을 받으며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을 걸어 대화 장까지 칠십 리 밤길을 동행한다. 걸으며 허생원은 젊었을 적 봉평 성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 인연을 이야기한다. 그 인연만이 그에게는 평생을 간직한 그리움이요 살아갈 힘이었다. 이어 동이도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만 하다가 집을 뛰쳐나온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늙은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물에 빠져 동이의 등에 업힌다. 등에 업힌 채, 그는 동이 어머니의 진청이 바로 봉평이라는 것, 동이가 자신처럼 왼손잡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이가 어쩌면 허생원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와 함께 그들은 동이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제천으로 가기로 한다. 이 같은 열린 결말로 맺어지는 이 소설은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인간의 순박한 본성을 그려내는 주제 의식과 달밤의 메밀밭을 묘사한 시적인 문체가 뛰어나 우리 문학의 수준을 한 층 더 높이는 데 기여한 작품이다.

그의 문학적 향기는 그 가치를 알고 귀하게 여기는 평창의 문화자원으로 다시 태어나 2002년 그의 문학관이 개관된 이후 꾸준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소설의 배경지인 봉평면 일대에 메밀꽃이 자지러지는 9월에는 효석문화제가 열려 가을의 정서로 우리를 초대한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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