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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쌍수(忠孝雙修) 정신 청도김씨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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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 고창군 종친회 탐방 ③청도김씨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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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04일(목) 17:45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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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회는 단순한 친족집단을 넘어 자신의 뿌리를 보존하고 미래를 위해 터를 닦는 이들이다. 핵가족화가 가속화되며 ‘씨족사회’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정체성을 계승한다. <고창신문>은 지난 기획물을 통해 고흥류씨·진주정씨 고창군종친회를 차례로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주인공은 ‘청도김씨 고창군종중’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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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향조인 여의공(麗儀公)의 묘소. | ⓒ 하우람 기자 | | 시조 영헌공(英憲公)과 입향조 여의공(麗儀公)
『고려사절요』와 『통국통감』, 『고려사』에 따르면 청도김씨의 시조는 영헌공 지대(英憲公 之岱, 1190~1266)로서, 신라 김알지(金閼智)의 36세손이며 고려 명종 20년 경상도 청도읍 대현리에서 출생했다. 청도김씨의 시조묘는 청도군 청도읍 대현상동271번지 염수당 금릉곡이며, 달은산 추향제일은 매년 음10월 6일이다.
영헌공 김지대는 고려 고종 4년에 강동전투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군에 자원했다.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은 모두 방폐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김지대는 홀로 방폐에 글을 지었다.
國患臣之患(국환신지환)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이요
親憂子所憂(친우자소우) 어버이 걱정은 자식의 걱정이라
代親如報國(대친여보국) 어버이 대신해 나라에 보답하니
忠孝可雙修(충효가쌍수) 충성효도를 다 같이 닦았다오
원사 조충이 군인을 점호하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서 묻고 막사로 불러 들이여 중요하게 부리더니 후에 전주사고로 삼았고, 다음에 보문각교심이 되었다가 뒤에 전라도안찰사가 되었다.
고종 6년에 장원급제한 문무(文武)대신으로 고종45년 몽고의 침공을 저지하여 서북40여성을 편안하게 하여 정난비(靖難碑)가 세워졌고, 원종초(元宗初)의 정당문학사부상서(政堂文學史部尙書)를 거쳐 수태전중서시랑평장사(守太傳中書侍郞平章事)로 취임하여 적을 평정한 공으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여기서 오산은 청도의 옛이름이다. 시호(諡號)는 영헌이다.
영헌공의 문소루시(聞韶樓詩)는 당시에 회자되어 동인시화에 실려 있다.
영헌공은 전주사록(全州司錄)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 검서추밀원사(檢書樞密院事)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使) 수태전중서시랑평장사(守太傳中書侍郞平章事)등 역임했다. 또한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관직에 있을 때 약자를 돌봐주고 호족들을 억누르며 신상필벌의 공명정대함이 귀신같아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도김씨의 입향조 승훈랑남부주부(諱) 여의공(麗儀公)은 영헌공 지대의 십세손이다. 점필제 김종직의 문인으로 선생께서 나주목사로 부임할 때 동행하여 무장현 원당동을 지나다 산수가 수려하고 풍치가 아름다워 후에 생활하고자 서로 점지해 뒀다. 후에 연산군(4년)의 무오사화(1498년)에 연루되어 목숨이 위태로워 주부 관직을 그만두고 한양에서 무장현 원당동에 은둔생활을 하신 것이 지금의 고창군 청도김씨의 뿌리가 됐다. 묘지는 영광군 홍농읍 단덕리676번지 관음당 경수재 위치하며 시제일은 매년 음력 10월 15일이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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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도김씨 도의공이 초대접장을 맡아 계산서원을 운영했다. | ⓒ 하우람 기자 | | 상하면 계산서원(溪山書院)
계산서원기에 의하면 시조 영헌공의 19세손 휘 도의공이 말년 서기1771년에 임진왜란 행주대첩 선무공신 휘응룡공 묘소옆에 스무재 재각을 중건하고 감모재로 명명하여 조상의 충효절의 정신을 추모하는 예를 펼쳤다.
재각에 서당을 개설하였으니 이것이 스무재 재각 즉 계산서원이다. 도의공이 초대접장이 되어 교육에 전력 원근 유생들이 운집하여 수가 사오십명이 되고 몽학서당과 달리 사서오경. 시부저술을 교육연구하며 과거에 응시할 선비들이 공부하는 거접이 되어 향교훈도교육을 능가하는 대성황을 이루니 무장·영광·고창·흥덕·장성현 등에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또한 사서오경, 각종사기, 교양서적, 현유문집 등을 다수 비치하여 희귀한 서적을 보려고 찾아오는 유생들도 많았다고 하니 현재의 도서관 역할까지 도맡아 왔다. 공이 서거한 후에도 방호·방운·귀우 등이 계속 노력하여 1910년 한일합방까지 140여 년간 대성황을 이루었으며,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서당탄압과 장서압수와 독찰로 결국 폐쇄하게 되었다. 수천의 학도와 수백의 거유를 배출하였으며. 그중 대표적인 대소과 합격자는 아산면 오(吳)진사 상하면 남궁(南宮)진사. 본 성씨로는 진사 상범, 기한, 대일, 광업, 탁, 용우, 초시합격 이관, 대과급제 수형 등 타 지방까지 수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계산서원과 얽힌 또 다른 일화 중 하나는 천재시인 김삿갓 김병연이 두 차례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그가 와서 지은 “스무나무 아래 서른손”(二十樹下三十客)이라는 한시는 『김삿갓시집』 제1장 방랑편에서 두 번째로 게재된 것이다.
다시 와서는 서당 학생들과 락운성시경쟁(落韻成詩競爭)인 시 짓는 다툼을 하고나서 “가히 무서운 선비“(可畏之士)라는 찬사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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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계산서원 내 건물 현판은 고창출신 서예가로 유명한 석전 황욱(1898∼1992) 선생의 글씨로 되어있다. | ⓒ 하우람 기자 | | 계산서원 뒤에 시조공을 모시기 위해 상충사를 1977년 기공, 1981년 준공하여 시조공을 주벽으로 모시고 임진왜란시 행주산성 권율장군 휘하에서 왜군과 싸운 선무공신 휘 응룡, 응봉, 응구, 몽룡, 희방, 호강공과 수형 공을 종향으로 매년 음력 2월 19일 무장향교 유림 주관으로 모시고 있다. 행주산성에서 순절하신 휘 응룡, 응구공을 동생, 매재, 사위(金璡)등이 시신을 거두어 가매장(假埋葬)하였다가 지게로 고향에 반장(返葬)하니 온 산천에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호조참판 휘(諱) 응룡공은 상하면 검산출생으로 퇴계 이황을 사사하여 성리학의 깊은 뜻을 터득하고 시조공의 충효쌍수정신을 이어 받은 선비로 임란을 당하여 나라가 위급하자 46세 가장으로 동생 응봉, 응구, 재종제(묭룡), 당질(희방), 매제, 사위(김진) 등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의 권율 장군 휘하에 전공을 세웠다.
양식운반을 맡아 무장현 동백호에 들어와서 계획한 일을 마치고 근처 집에 들럿다가 부친상을 당하자 겨우 몸을 씻긴 후에 옷을 입히는 의식인 염습(殮襲)만 하고 장례를 치루지 못한 채로 행주에 양식을 운반한 후에 전투에 참가하여 전력하다가 순절하니 동생(응구)이 복수하려고 뛰어 들었지만 또한 순절하였다. 선무이등공신에 책록 되었다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 휘(諱) 몽룡공은 공음면 두암 출생으로 집과 하인, 군량을 내어 지역을 지켰다. 본인은 또한 권율 장군 휘하에서 전력하였다.
주부(主簿) 휘(諱) 희방공은 해리면 임해출신으로 의병을 모집하여 제봉(霽峰) 고경명. 유팽노. 김덕홍. 김세근과 더불어 진산(珍山)·금산(錦山)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공훈을 세워 훈련원 주부를 제수 받았고 원종일등공신에 참록 되었다.
※ 선진진사 - 기한(두암), 재일(방축), 온(구적), 광업(구적), 상범(구적), 징(검산·월영·화산·라대·궁월·용복·임해), 돈(검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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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선조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 ⓒ 하우람 기자 | | 청도김씨 씨족분포도
청도김씨 고창군종친회는 약 3,000여 세대가 활동하고 있으며, 이중 △고창관내에는 약 1,000여 세대가 활동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상하면 검산·라대·고산·용복 ▲공음면 두암·장곡·증여·구적 ▲해리면 광승·방축·궁월·임해·칠곡·수동·왕촌 ▲무장면·화산·갑동·강남·장두 ▲아산면 월성·동촌 ▲대산면 광대·중산 ▲심원면 만돌·연화·담암 ▲성송면·관동·남창·계양 ▲흥덕면 사천·석교 ▲성내면 옥동·대촌 ▲신림면 자포리·반룡 ▲고수면 평지 ▲부안면 운양 ▲고창읍 신상·교촌 등이다.
또한 외지에는 약 2,000여 세대가 활동하고 있으며, 지역별로는 ▲정읍시 월영·고부반룡·장재 ▲영광군 홍농읍·월영 ▲장성군 삼서면 금산·성산 ▲함평군 문장·자풍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광주시, 전주, 군산, 익산, 서울, 인천, 경기도, 대전, 부산 등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무장읍지(茂長邑誌)에 관한 건 우리고을에 읍지(邑誌)가 처음 간행되기는 지금부터 472년 전이다. 이후 병자지(丙子誌, 1636년)부터 무술지(戊戌誌, 1958년)까지 도합 8차례를 속간했다.
고창현은 5회, 흥덕현은 2회 발간됐다. 3고을을 합하여 논한 끝에 1991년 『고창삼향지(高敞三鄕誌)』라는 제목으로 발간됐다.
무장읍지에 우리고을이 형성될 때 양김 윤유씨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남쪽으로는 광산김씨가, 서쪽으로는 청도김씨가, 무송윤씨와 무송유씨다.
무장읍지 중 어느 권인지 확인은 못했으나 옛 어르신들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또, 재미있는 사실은 『대동여지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지도학자 김정호가 청도김씨라는 사실이다. 한반도를 세 번 돌고 백두산을 열일곱 차례나 오른 후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현재 지도는 국립중앙박물관소장에 소장되어 있다.
역대회장-임원진 및 활동상
청도김씨 고창군종친회 △역대 회장으로는 ▲1대 김수현(1970~1973) ▲2대 김신용 (1974~1976) ▲3대 김재철(1977~1980) ▲4대 김재규(1981~1984) ▲5대 김재천(1985~1988) ▲6대 김재조(1989~1992) ▲7대 김경진(1993~1996) ▲8대 김병연(1997~1999) ▲9대 김재영(2000~2002) ▲10대 김재식(2003~2005) ▲11대 김재길(2006~2008) ▲12대 김재응 (2009~2011) ▲13대~14대 현 김재련(2012~) 등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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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김재련 회장
(청도김씨 고창군종중) | ⓒ 하우람 기자 | | 또한 청도김씨 고창군종친회의 △현재 종중 임원진은 ▲상임고문 김기진·김창선·김재식·김재길·김승선 ▲회장 김재련 ▲부회장 김재평·김요협 ▲수석이사 김재찬 ▲감사 김경용·김필진 ▲총무 김영대 ▲재무 김재도 등이 맡아 운영하고 있다.
청도김씨 고창군종친회가 지금의 체계를 갖춘 데에는 김재련 회장의 노력이 숨어있다. 과거 청도김씨 대종친회에서는 고창파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김재련 회장의 내실 있는 운영에 따라 대종친회와 다시 교류를 시작했다.
김재련 회장은 “자손끼리의 화합과 단합이 미래의 고창발전을 위한 초석이 된다”며 “앞으로도 종친회 발전을 위해 힘닿는 데까지 헌신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편, 청도김씨 고창군종친회 일원으로는 김윤덕(전주시 완산갑 제19대 국회의원), 김경진(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 김홍(세종시 법무팀장), 김윤욱(SK법무팀장), 김재진(고려대 생명과학), 제주대학교 김성준(치과)·김철민(공학박사), 김을진(금융감독위원회), 김원준(지적공사 지점장) 김승선(성균관사정위원장 및 서울종친회장), 김호진(전 성송면장), 김재찬(전 해리농협장), 김재순(전 무장농협장), 김갑선(현 해리농협장), 김재근(종중청년회장) 등이 각계각층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조 영헌공(英憲公) 유가사
기(起) 사원은 안개서린 노을 속에 한가롭고 어지러운 산기슭 젖어들은 녹색에 가을빛 짙구나
승(承) 구름사이 아득한 산둥성이 돌길은 육·칠 리나 되고 하늘 끝 멀고먼 산들은 천만 겹겹 봉우리일세
전(轉) 다담 끝나니 솔 서까래 처마에 초승달 걸렸고 설법마친 법당에 쇠잔한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네
결(結) 시냇물은 옹당히 나비를 비웃고 있나니 씻을래야 씻지 못할 흥진의 발자취로다.
<다음에는 창녕조씨 종친회가 연재됩니다.>
[시리즈 기획물]
①고흥류씨 13세 선조를 모시는 시정공 학산제
②화합과 단결로 생동감 넘치는 진주정씨 종친회
③충효쌍수(忠孝雙修) 정신의 청도김씨 종중
④숭조·화합·애족으로 하나되는 창녕조씨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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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람 기자 holloh2@hanmail.net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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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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