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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내 3대 대표성곽 고창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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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원년(1453) 왜침 방어 위해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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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3월 31일(토) 20:30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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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 단종원년(1453)에 축성한 성곽 길이 1,684m의 고창읍성(사적 제145호) | ⓒ (주)고창신문 | | 고창읍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에 걸쳐 3년에 걸쳐 전라좌우도의 각 고을에서 참여한 가운데 왜침으로부터 내륙방어를 위해 총화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고창읍성은 해발 108m의 장대봉을 중심으로 산 기슰을 따라 길이 1,684m, 높이 4-6m, 넓이 50,172평 규모로 당초 22동의 관아건물과 장대(雉) 6개소, 연못 2개소, 우물 4개소가 있었다.
관아건물은 병화로 소실된 것을 1972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동문, 서문, 북문, 객사, 동헌, 내아, 관청, 작청, 장청, 서청, 향청, 옥, 풍화루, 성황사 등 14동이 원형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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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봄철 성곽주변의 벚나무가 만개한 고창읍성 전경 | ⓒ (주)고창신문 | | 우리나라 조선시대 대표적인 3대 성곽은 서산 해미읍성, 순천 낙안읍성과 고창읍성이다. 고창읍성은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전라도의 농산물을 실어 나르던 영광 법성포(창)와 정읍 입암산성을 연결해 주고 나주진관에 이르는 군사적 전초기지 역할을 한 전략요충지이다.
고창읍성의 축성 전설은 고창읍성과 5km 떨어진 고인돌 유적지 뒷산에 소재한 ‘서산고성’과 연관성이 있다. 고창에 사는 여자와 남자가 성 쌓기 시합을 하였는데 고창읍성은 여자가, 서산고성은 남자가 쌓기로 하였다. 여자들은 꾀를 부려 남자들을 속이기 위해 뒤쪽부터 성곽을 쌓고 앞쪽에서는 쌓는 척만 하였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쌓으면 얼마나 쌓겠느냐며 술이나 마시고 노는데 정신 팔려 있다가, 어느 날 여자들이 성곽을 먼저 쌓았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였다 한다. 고인돌유적지 넘어 오베이골에 가기전 ‘통한의 마당’이 남아 있다.
고창읍성의 특징은 성곽의 해자(해자)와 여장에 있다. 현재 거의 매몰되었으나 성곽의 밖에 인공적인 호를 만들어 적의 침입 시 완충지대와 성곽 공격시 시간지연 및 배수로 역할을 하도록 하였으며, 여장은 동·서·북문의 옹성위에 담장처럼 설치한 시설로 적의 공격 시 창과 활로부터 보호 받고, 가까운 곳과 먼 곳을 효율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또한 동문, 서문, 북문이 있는데 성곽의 문밖에서 보면 항아리처럼 둥근 형태로 성을 쌓아 문을 보호하고 있는데 이것을 옹성(甕城)이라 한다. 다른 성에서는 일자형 성문을 설치해 전쟁 시 성문을 쉽게 부수자 이를 방지하고 적이 접근을 하지 못하도록 옹성을 쌓았다.
답성(踏城) 놀이는 전국적으로 개성, 강화산성, 고창읍성, 영광 법성에서 유사하게 이루어져 왔으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고창읍성만 전승 보전되고 있다. 머리에 돌을 이고 한 바퀴 돌면 병이 없어지고, 두 바퀴 돌면 오래 살고, 세 바퀴 돌면 죽은 후 극락승천 한다는 구전에 따라 답성민속이 전해지고 있으며, 4년마다 있는 윤달의 6자가 들어간 엿새, 열엿새, 스무엿새는 저승 문이 열리는 날로 다른 날보다 더 좋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답성놀이는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을 돌면서 성곽이 다져지도록 했고, 다 돌고난 후 돌을 한곳에 모아 투석전에 대비한 조상의 지혜가 담겨 있다.
고창읍성 내에 민가는 하나도 없고 관아 건물만 있었다. 평상시 성 밖에서 생활하다 유사시에 성으로 들어가 방어와 피신처로 활용한 것이다.
성곽을 보면 축성에 참여한 고을명이 새겨진 표석을 볼 수 있으며, 오랜 세월이 흘러 판독이 어렵다. 현재까지 제주를 포함하여 19개 고을에서 축성에 참여한 것이 확인 되었다. 또한 서청 바로 앞에는 남한에 몇 개 남지 않은 ‘대원군척화비’가 서 있다. 그 내용은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 싸우지 않은 것은 화해를 하는 것이며 화해를 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와 같다는 “양이침비전즉화주화매국(洋倭侵非戰則和主和賣國)”라 새겨 있다.
또한 조선시대는 억불숭유 정책을 펼쳤으며, 증거로 사찰의 연화대, 당간지주 등이 축성에 사용되었음을 성곽에서 볼 수 있으며, 읍성입구의 우측에는 고창현의 현감과 관찰사 등의 선정비가 서있다.
주요 관아건물은 동문(登陽樓)·서문(鎭西樓)·북문(拱北樓)이 주 출입문 역할을, 현감이 일반 행정사무와 재판을 행하던 동헌(東軒), 중앙관리나 사신이 출장 때 숙식하던 객사(客舍), 현감의 살림집인 내아(內衙), 주방에 관한 사무와 물품조달·회계 사무를 관장한 관청(官廳), 이방·호방·예방·병방·형방·공방 등 6방이 사무를 보던 작청(作廳), 죄인들을 가둔 옥(獄), 군현을 지키는 속오군 우두머리인 현감과 병방, 군교들이 군무를 보던 장청(將廳), 문서나 도서를 보관하는 서청(書廳), 수령을 보좌하던 지방자치기관으로 향장이나 좌수가 집무를 보던 향청(鄕廳), 객사와 동헌의 외삼문 역할을 한 풍화루(豊和樓), 고을의 평화와 수호신을 모신 성황사(城隍祠)가 현존하고 있다.
옥을 출입구에 배치한 것을 주민들에게 죄를 짓지 말라는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감옥에 3명의 동학도들이 갇혀 있었으나 무혈일성 후 석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창읍성은 봄에는 벚꽃과 성곽을 따라 식재한 철쭉꽃이 만발하고, 읍성 내 소나무와 맹종죽이 있어 사극이나 영화 촬영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야간경관 조명이 설치되어 야간 관광과 휴식처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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