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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침 막고 마을의 화평기원 위해 당산 건립- 성송면 사내리

아버지·어머니·아들·며느리 당산 4기 소재

2018년 04월 10일(화) 18:04 [(주)고창신문]

 

↑↑ 포동마을에 있는 금녕김씨 삼강려

ⓒ (주)고창신문

고창군 성송면 사내리는 고창에서 영광방향으로 4차선을 따라서 고수면을 지나 남고창IC를 거쳐 고수면과 성송면의 경계선이 있는 미래레미콘 앞에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사내마을이 나오고 여기에서부터 사내리가 시작된다. 포동마을은 성송면 학천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2Km쯤 가면 우측에 포동마을 표석이 있는 방향으로 들어가면 나온다.
성송면은 마한시대에 모이부곡현, 백제시대에는 송미지현에,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송현에 속해 있었다. 그 후 무장현으로 개칭하고, 행정구역개편 전의 이름인 성동면(星洞面)과 원송면(元松面)에서 ‘성(星)’자와 ‘송(松)’자를 따 성송면(星松面)이 되었다.
성송면은 원래 무장군(茂長郡) 지역으로, 성동면이라 하여 관동리(冠洞里)·호동리(虎洞里)·낙양리(洛陽里) 등 26개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원송면의 상고리(上古里)·하고리(下古里)·삼태리(三台里) 등 11개 리와 대사면(大寺面)의 세장리(細庄里) 일부, 전라남도 영광군 대안면 금동 일부가 병합되어 성송면이라 하여 고창군에 편입되었다. 1983년에 산수리 일부를 대산면에 넘겨주고 대신 대산면의 중산리 일부가 편입, 1987년에는 상금리가 대산면에 이관되었다. 법정리로는 계당리·괴치리·낙양리·무송리·사내리·산수리·암치리·판정리·하고리·학천리·향산리가 있다
사내리는 성동면에 속해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포동, 복동, 사내 및 향산, 계양을 병합하여 사내리로 재편하여 성송면에 편입되었다. 사내리는 행정분리인 사내마을과 포동마을이 있고, 자연부락으로 사내, 포동, 복동이 있는 곳이다.
사내리는 옛날부터 평범한 비산비야 지형으로 산의 흐름은 호남의 영산인 방장산 줄기가 문수산을 지나 구황산, 추산봉으로 이어지고 초내리와 잿등, 낙양리로 맥이 이어진다. 사내리 수계는 사내, 포동, 복동의 전면에 평지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작은 물들은 남과 북으로 흘러 평지천에서 합쳐진다.
사내마을은 새가 숲으로 날아드는 형국이라 하여 ‘새나리’,‘조비리’,‘새내’,‘초내’,‘사내(沙乃)’라고 하였으며 마을에 대나무가 많고 먼데서 보면 새 날개 형국이라 해서 ‘새나지’라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의 성립 시기는 뚜렷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에 여러 성씨들이 모여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포동마을은 옛날 바닷물이 들어 올 적에 수초인 줄이 많아 ‘줄울’이라 부르다가 ‘포동’으로 불렀다. 포동마을은 조선 중기까지 여러 성씨들이 들어왔으나 250여년전 장성에서 금녕김씨 등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진주정씨는 그 후에 들어왔다고 한다.
사내리에는 고분과 지석묘 군, 유물 산포지 3곳이 소재하고 있다. 고분은 포동마을 진입로 좌측에 있으며 분구묘 형태로 광산김씨 세장산으로 이용되었으며 원형으로 직경 10M, 높이 3M정도로 삼국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석묘는 사내마을 서측 구릉지대에 있으며 이곳은 당초 많은 지석묘가 있었으나 현재는 3기만남아 있다. 또한 3곳의 유물산포지는 원삼국∼삼국시대로 추정되고 이 곳에서는 옹관편, 경질토기편, 타날문토기편, 연질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사내리당산은 마을 입구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다. 어버지, 어머니, 아들, 며느리 당산 등 4기가 있고, 1999년 7월 9일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2호로 문화재 지정이 되었다. 당산은 민간신앙에서 신이 있다고 믿고 섬기는 대상물이다.

ⓒ (주)고창신문


유래는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외침을 막고 마을의 화합과 평안함을 축원하기 위하여 당산제가 유래되었다 설이 전해져 내려오나 확인이 안된다. 일설에는 조선 성종(1469∼1494년) 때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했던 정책이 강화되면서 사찰의 승려들이 포교활동은 물론 생존조차 막연하게 됨에 따라 도승이 입산수도를 위해 마을 앞을 지나다 이 곳 터를 둘러보고 위치를 정해주면서 이곳에 당산을 세우고 정월 열 나흣날 밤에 당산제를 모시면 마을이 천세만세 복을 누리리라는 말을 듣고 세우게 된 것이다 한다.
처음에는 12곳에 당산을 세웠으나 어느 날 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르신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4곳의 당산만 제를 올려라 해서 현재와 같이 4곳의 당산에 제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당산을 마을 앞에 50M간격으로 서 있고, 마을 앞에서 볼 때 위치는 사내마을 모정 옆에 아들당산을 시작으로 우측으로 아버지당산, 어머니당산, 며느리당산 순으로 서있다. 아버지당산은 높이 160cm, 둘레 128cm, 갓 둘레 173cm이고, 어머니당산은 높이 124cm, 둘레 115cm, 갓 둘레 257cm이며, 아들당산과 며느리 당산은 갓을 쓰지 않고 부모보다 훨씬 작게 만들어져 있다. 또한 어머니당산의 갓이 아버지당산 갓보다 더 큰 것은 모계중심사상과 효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내리 당산은 당산돌이 언제 건립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타 지역의 당산과는 달리 부모를 포함한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당산제는 정월 보름날 올리고 있으나, 당산제를 지내기 전에 마을에 상을 당하거나 안 좋은 일과 아이를 낳으면 2월 초하룻날 제를 모신다. 제관은 화주를 겸하고 정월 초닷새날 마을총회에서 생기복덕하고 상고와 태기가 없어야 하며 부부관계를 금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선정하였다. 6·25 전까지는 당산제를 지내기 1주일 전부터 궂은 사람이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금줄을 치고 외부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으나, 지금은 하루 전에 금줄을 치고 제를 올릴 준비를 한다. 제관들은 제를 모시기 전에 마을에 있는 초당샘에서 목욕재계하는 등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한 후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제사를 모시기 전 당산마다 왼쪽으로 꼬은 새끼줄에 흰 천과 백지를 꽂아 당산에 두르는데, 흰천은 겉옷을, 백지는 속옷, 왼쪽으로 꼬은 새끼줄은 허리띠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때 모인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농악을 치면서 잡귀를 물리쳤으나 농촌지역의 인구 감소로 지금은 마을 농악대가 없이 제를 지낸다.
당산제는 아버지당산, 어머니당산, 아들당산, 며느리당산 순으로 지내고 제사순서는 강신-헌잔-축원-헌찬-소지-음목-봉송-철상 순으로 지낸다.
포동마을 입구에는 250년전 장성에서 살다 고창으로 세거한 ‘금녕김씨 세적비’가 서있으며, 마을 오른쪽에는 금녕김씨 조상들이 충(忠),의(義),열(烈)을 인정 받아 건립한 ‘금녕김씨 삼강려(三綱閭)’가 소재하고 있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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