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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순례-청송 송소고택 (靑松 松韶古宅)-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⑥

영남 부자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던 ‘심부잣집’, 송소고택
경상북도 청송군 파천면 송소고택길 15-2

2017년 09월 16일(토) 15:13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99칸 집은 99개의 방이 있는 집이라고 잘못 알았던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많은 방이 왜 필요한지 궁금했었다. 한 칸이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선생님께서 분명 덧붙이셨을 터이지만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을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최근 고택탐방을 하면서 우연히 듣게 되는 주변 사람들의 대화는 우리 한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상식이 훨씬 정확해지고 풍부해졌음을 느끼게 한다.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짐에 따라 변화된 삶의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송소고택에 오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삭막한 도시의 쉴 틈 없는 공간을 떠나 잠시 숨을 고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느끼겠다. 송소고택의 사랑채에는 한 여름 더위가 무색하게도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시조를 읊으며 옛 귀족의 풍류를 느끼고자 하는 사람들로 도심의 카페처럼 활기가 있었다.
송소고택은 경주 최부잣집과 함께 조선시대 영남 부자의 양대산맥으로 손꼽히던 99칸 만석꾼 ‘덕천동 심부잣집’으로 알려진 고택이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아스팔트 위에서 살아가는 도시의 현대인들은 은근 흙에서 농사짓는 일을 얕보는 경향이 있어서 만석꾼이라 해도 ‘그저 부자이겠거니’ 하고 그 부를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해 소출을 자본주의적 통계로 따져보자면 한 석은 쌀 두 가마니이니 만석이면 이만 가마니의 쌀을 수확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농지의 가치를 제외하더라도 이만 가마니를 돈으로 환산하면 한해에 32억. 비로소 입을 다물 수 없는 경탄이 마음속으로부터 조용히 올라오는 것이다.
송소고택은 청송 심씨 심호택이 1880년(고종 17년)에 건축한 집이다.
청송 심씨는 고려 충렬왕 때 벼슬을 하였던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하여 4세손인 심덕부(沈德符)에 이르러 가세가 크게 융성하였다. 심덕부는 조선 건국 때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그 가문은 조선왕조 내내 정승 13명, 왕비 3명, 부마 4명을 배출한 세도가문이다.
반면 심덕부의 아우 심원부는 고려 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판사에 이르렀으나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새 왕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킨 고려유신 72인 중 한 사람이다. 두문동 고려 유신 72인은 두문불출이라는 용어의 유래가 되기도 하였다. 심원부의 후손들도 그의 유훈을 받들어 선훈불사(先訓不仕)라 하여 대대로 벼슬을 멀리 하였다. 송소고택을 건립한 심호택은 심원부의 18대 손으로 그 당시 민가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 칸 수인 99칸의 집을 완성하였으니 만석의 부는 심호택의 7대 조부로 조선 영조 때 사람인 심처대에서부터 9대에 걸쳐 250년간 이어졌다고 한다.
잘 되는 집안에 명당이야기는 필연적이라 하겠다. 명당에 터를 잡아 집안이 잘 된 것인지 집안이 잘 되니 명당이야기가 더해진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훨씬 더 흥미로운 법이이서 고택여행의 큰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심호택의 7대 조부 심처대는 청송 심씨의 본향인 덕천마을을 떠나 파천면 지경리 호박골에 터전을 잡았는데 어느 날 덕천마을 본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귀가하는 중에 눈 위에 쓰러져 의식을 잃은 노승을 발견하였다. 종이 짊어진 지게의 짐을 버리도록 하여 스님을 지게로 업어와 삼일밤낮을 간호하였다.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스님은 “나는 불자라 가진 것이 없어 물질로 보답할 길이 없으나 머지않아 이 집에 초상이 날 기운이니 산소 터를 하나 봐 주겠다”고 말하고 떠나갔다. 집을 떠난 노승은 그 뒤 소식이 없어서 잊고 지내던 중 한참 후 스님이 다시 찾아와 말하길, 청송 일대를 샅샅이 살펴보니 2개의 좋은 터가 있는데 한 곳은 역사적으로 이름을 날릴 만한 큰 인물이 날 자리지만 자손이 궁하여 대가 끊어질 수 있는 터이고 나머지 한 곳은 큰 인물은 나지 않지만 자손과 재물 모두 풍족하게 될 터라고 하였다. 모든 복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으니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스님의 말에 3일 밤낮을 고민하던 그는 두 번째 자리를 선택하였다. 그 뒤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재산이 불어나 만석꾼 소리를 듣는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 (주)고창신문
















그런가하면 송소고택을 지은 심호택은 땅 위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꿈을 꾸고 그 자리에 집을 지어 만석의 부를 누리고 살았다고 한다.
송소고택이 위치한 덕천마을은 신흥천 물길이 둥글게 감싸고 돌아가는 곳이다. 소슬교를 건너 신흥천 너머 마을로 들어섰을 때 지대가 조금 낮은 감이 있었는데 여기에도 풍수적인 이유가 있었다. 덕천마을은 물단지와 같이 재물이 고이는 자리라 지대가 높으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명당도 명당이겠지만 걸맞는 사람의 역할이 없었다면 그만한 재산이 가능했을 것인가? 심호택이 덕천마을에 자리를 잡기 이전, 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위협을 받고 다칠 수 있다고 판단한 이 댁 마님은 사람들은 해치지 말라며 곳간 문을 열어 도적들이 마음껏 재물을 가져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털리고 남은 재산으로 송소고택을 지었다고 하니 재산의 규모도 놀랍지만, 만석의 재산을 일구어 낼만한 정신적 품격과 힘을 보여 준 사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택에 들어서는 마을길은 포장이 잘되어 깨끗하였다.
주차장도 넓게 정비되어 한옥의 불편함을 현대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을 알겠다. 마치 맛있게 만들어진 퓨전 음식을 먹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현재는 3000평 규모의 대지에 방 14개, 곳간 1개, 마굿간 2개, 부엌 2개, 방앗간 1개, 우물 3곳으로 92칸이 남아있다. 주차장 자리에 원래는 머슴들이 머물던 7칸 규모의 초가가 있었다고 한다.
대문채는 정면 7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을 얹고 있다. 중앙에 ‘송소세장(松韶世莊)’이라는 현판을 달고 홍살을 설치하여 위엄을 높인 솟을 대문은 소달구지며 사인교, 말을 타고 사람들이 드나들도록 충분히 넓고 문턱이 없다.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헛담이 버티고 있어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른 마당을 용도에 맞게 구분해 주어 짜임새 있게 느껴진다. 헛담은 바깥 시선으로부터 안사람들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역할 뿐 아니라 사랑채 길과 안채 길을 나누어주는 이정표 기능도 한다. 풍수적으로도 솟을 대문과 중문이 바로 보이면 복이 나간다는 속설이 있어서 대문과 대문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헛담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헛담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오른쪽 길은 작은 사랑채와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으로 이어진다.
대문채와 바로 이웃한 오른쪽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마당채가 있는데 지금은 고택체험을 위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왼쪽으로 보이는 큰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ㅡ’자형 건물로 팔작지붕을 화려하게 얹어 집안에서 가장 권위있는 장소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돌로 쌓은 3단의 기단위에 돌대신 통나무를 다듬어 계단처럼 디딤판을 놓은 큰 사랑채는 중앙 두 칸의 우물마루 대청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사랑방과 누마루, 책방을 배치하였다. 대청은 사분합 들문을 달아 여름이면 시원하게 열 수 있다. 대청마루에 앉아보면 나비의 몸통과 양 날개인듯 세 봉우리가 아담한 안산이 한눈에 보여 평화롭고 안정감이 있다. 방으로 통하는 문은 사분합 불발기문으로 멋을 내었다. 큰 사랑채 서편에는 담으로 구분된 별당채가 있다. 순수한 한글이었다면 이름이 예뻤을 별당은 건물도 여성스럽고 아기자기하다. 별묘라고도 하여 사당대신 사용한 감실인데 손님이 오시면 머물기도 하였다. 큰 사랑채 동편으로 이어진 작은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큰 사랑채 쪽으로 한 칸이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고 차례로 곳간, 사랑방,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중문은 두 개인데 그 중 하나는 큰 사랑채 동편 뒤쪽에 있다. 중문에 연결된 담은 신기한 구멍이 있어서 구멍담이라 부른다. 사랑채 쪽에서 보면 구멍이 6개인데 안채 쪽에서 보면 구멍이 3개다. 갈수록 넓어지는 쌍안경처럼 하나의 구멍에서 벽 반대 편 두 개의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내외가 엄격하던 시절, 안채에서 사랑채를 살필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미관까지 고려한 재치 있는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안채는 ‘ㄷ’자 형태인데 정면 6칸은 어머니가 사시던 건넌방, 시집안간 딸이 쓰던 중간방, 대청, 할머니가 쓰시던 안방과 부엌이 배치되어 있고 양쪽에 반 칸을 붙여 통로로 삼았다. 안채는 문 윗부분으로 다락이 놓인 듯 이층의 구조로 되어있다. 안채 중앙 대청에는 4분합 띠살문으로 들문을 달았는데 그 위로 빗살격자무늬 광창을 넣어 공들여 꾸민 여인을 보듯 화려하다. 빗살로 무늬를 넣으려면 정자살문처럼 직선으로 넣는 것에 비해 그 공력이 5배 6배 소모된다고 하니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면 만들기 힘든 창이라는 것을 알겠다.

ⓒ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고택은 경상북부지역개방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25년간 비워둔 상태였는데 2002년부터 보수를 시작하여 2003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관리인에게 맡겨두었는데 유물들을 대부분 도둑맞는 등 관리가 되지 않아 2010년부터는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온 11대 종손 주인 내외가 거주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송소고택을 지은 심호택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13년에 걸쳐 맏아들에게 99칸을 지어주고 둘째부터 넷쩨 아들에게 30칸씩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집들이 모두 쪽문으로 이어져 쪽문을 열면서 나아가면 아들 네 명의 집을 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두 집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전쟁 중 소실되었다. 연간 십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방문을 하는데 사람들이 많이 와서 마당을 밟아주면 땅이 다져지기 때문에 풀이 나지 않아 좋은 일이나 간혹 방문을 함부로 열어놓고 마루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는가 하면 사진을 찍는다고 화단에 들어가 꽃들을 망쳐놓는 경우가 있어서 관리에 애로(隘路)가 있다고 한다.
깨끗하게 관리된 고택을 편안하게 체험하는 이면에는 늘 마루에 기름칠을 하면서 닦고 꽃을 가꾸고 잡초를 뽑아주느라 한가할 틈이 없는 후손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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