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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으로 안향을 모신 '소수서원'

이서위상(以西爲上)과 선례후학(先禮後學)의 도리에 따라 동학서묘로 배치

2020년 09월 16일(수) 20:46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기획 -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내죽리)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으로 안향을 모신 '소수서원'
이서위상(以西爲上)과 선례후학(先禮後學)의 도리에 따라 동학서묘로 배치

밤새 내린 비에 소수서원 옆을 흐르는 죽계천의 물소리가 장엄한 서곡의 베이스로 울린다. 소수서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니 이미 무대의 막이 올라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들이 거인처럼 늘어서서 솔바람의 합주로 군무를 춘다.
소수서원 경내, 길게는 고려시대부터 뿌리를 내린 적송 수백그루가 서원을 지키는 수호자들처럼 늠름하게 서 있다. 중국 역사가 사마천이 ‘송백(松柏)은 세한지목(歲寒之木)이요, 천세지송(千歲之松)’이라 한 것처럼, 예로부터 소나무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충절을 지키는 나무로 상징되어 학자수(學者樹)라 하였다. 소나무가 오랜 시간을 견디며 호박(琥珀)이라는 보석을 만들어내듯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참선비가 되고자 했던 기원이 학자수림에 담겨있다.

서원을 향한 길, 소수서원의 진입영역에서 뜻밖에 당간지주를 만난다. 부처나 보살의 공덕을 나타내는 깃발을 당(幢)이라 하고 당을 거는 장대는 당간(幢竿)이다. 당간을 걸어두기 위하여 세운 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하므로 당간지주는 사찰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래 이 자리에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가 있었는데 1457년(세조3)에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어 이 곳의 행정구역인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절도 함께 소실되어 돌로 만든 당간지주만 남았다고 한다.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수서원의 배향 인물인 회헌 안향(安珦, 1243~1306)이 어린 시절 숙수사에서 공부를 한 연고가 있어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이 1542년(중종 37)에 이 곳에 사당을 세우고 회헌의 위패를 봉안한 것이 소수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신재는 주자가 중국 여산에 세운 백록동 서원에서 영감을 얻어 다음해인 1543년 학사(學舍)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다. 1550년(명종 5)에는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되었다.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은 명종의 명으로 대제학 신광한이 지었는데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의미의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에서 나온 이름이다. 명종이 손수 쓴 소수서원의 사액 현판은 강학당 내부에 걸려있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당시 입학 자격은 초시에 합격했거나 학문에 정진하는 선비들이었는데 위기지학의 인격수양에 정진하지 않고 과거 시험에만 한눈을 팔거나 미풍양속을 어기는 경우에는 바로 퇴원을 당했다고 하니 그 내규가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소수서원에서 공부한 유생은 4천 명에 달했으며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에 경상우병사로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성일, 선조 때의 좌의정이었던 정탁도 있었다.

회헌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 성리학을 들여온 고려 후기의 학자이다. 주자를 흠모하여 회헌이라는 그의 호도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왔으며 주자의 초상을 항상 벽에 걸어 두고 그를 본받고자 하였다. 주자의 저서인 주자대전을 직접 필사하여 고려에 전함으로써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하고 성리학자를 양성하여 성리학의 기틀을 다진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이다.

소수서원이 자리한 곳은 소백산 땅 기운이 솟아난 지점으로 풍수지리적으로는 ‘신령스런 거북이 알을 품은 듯하다’는 영귀포란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두 개의 산과 네 개의 정자를 일컫는 이산사대(二山四臺)는 이 곳의 수려한 경관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 풍수지리를 몰라도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소수서원은 고시(古詩)의 네 절(節)처럼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배치되어 있다. 도입부인 기(起)의 영역에는 적송 군락지와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 취한대, 경(敬)자 바위 등이 있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다른 나무이기 때문에 두 그루를 심었다.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에서 유래된 행단(杏壇)은 문화적 차이로 우리나라에 와서는 은행나무로 변용되어 향교나 서원처럼 학문을 하는 곳을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은행나무는 가장 오래 사는 나무로 알려져 있고 열매를 많이 맺기 때문에 많은 인재를 길러내고자 하는 기원이 담겨있다.
죽계천 건너편의 한적한 정자는 ‘취한대(翠寒臺)’이다. 원래 퇴계 이황이 세웠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져 다시 터를 닦아 정자를 지었다.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취’자와 ‘한’자를 취했는데 소나무의 푸른빛과 맑고 시원한 죽계의 정취가 담겨있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바위에는 ‘백운동 경(白雲洞 敬)’이라고 새겨진 한자가 선명하다. 소수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글자를 새긴 바위로 ‘경(敬)자 바위’라 한다. 주세붕이 편찬한 고서 『죽계지』에 “묘원은 비록 오래 보존되지 못하더라도 이 각석이 마멸되지 않아 천년 후에 이것을 일컬어 경석(敬石)이라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기록이 있어서 그가 바위에 글자를 새긴 뜻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승(承)의 영역에는 영귀봉, 소혼대, 성생단, 경렴정 등이 있다. 소수서원 쪽 죽계천 옆으로는 ‘경렴정(景濂亭)’이 있어 풍광이 수려한 물가에 정자를 세워 호연지기를 키운 선비들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 경렴정은 주세붕이 세운 정자로 우리나라 서원 정자로는 가장 오래 되었다. 처마 아래 걸린 해서체의 현판은 퇴계의 글씨이고 정자 안쪽에 걸린 초서체 현판은 퇴계의 문인이면서 초서의 대가인 황기로가 쓴 현판이다. 초서체 특징이 잘 드러난 글씨로 용이 비상하는 듯한 기개가 느껴진다. 그러나 원본에는 치켜 올린 꼬리 부분이 잘려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기를 꺾기 위해 글씨 꼬리를 잘랐다고 한다.
서원 문 앞에 있는 성생단(省牲壇)은 사당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의 흠결여부를 심사하는 제단터로 아홉 명의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문제를 제기하면 제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영귀봉(靈龜峰)과 소혼대(消魂臺)는 적송 군락지 가운데 도톰하게 올라온 둔덕으로 유생들이 머리를 식히며 쉬었던 곳이다. 그 규모에 비하면 이름이 너무 과하여 어색한 느낌이 있다.

홍살문 안쪽으로 서원의 주요 건물들이 있는 공간을 전(轉)의 영역으로 볼 수 있겠다. 강학당을 비롯하여 묘당과 기숙사, 영정각, 장서각, 전사청이 자리 잡은 공간이다. 이 공간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도문(志道門)’을 지나야 한다. 보통 바깥대문의 역할을 하는 문은 외삼문인데 소수서원의 지도문은 외단문으로 홍살문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지도(志道)란 표적을 향해 활을 쏘듯 도를 향해 뜻을 세우고 나아감을 이르는 말로서 선비가 도를 이루고자 하는 입지(立志)와 지향(指向)의 중요성을 표현하고 있다.

지도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주하게 되는, 웅장하고 기품 있는 건물이 강학당이다. 보통은 전학후묘의 구조로 외삼문, 강학당, 내삼문, 사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는데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로 공부를 하는 강학당을 동쪽에 두고 서쪽에 묘당을 배치하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위차법(位次法)인 이서위상(以西爲上)과 선례후학(先禮後學)의 도리에 따라 서쪽을 으뜸으로 삼고 제향공간을 더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된 강학당은 1543년(중종 38)에 주세붕이 세운 건물이다. 전면 3칸, 측면 4칸에 사방으로 툇마루를 두르고 합각지붕을 얹었다. 전통적인 기와집은 전면이 더 긴데 소수서원의 강학당은 측면이 한 칸 더 많은 독특한 구조이다. ‘전청후실(前廳後室)’의 구조로 건물 앞부분 3칸은 대청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공부하였고 뒤쪽 1칸에는 방을 두어 스승이 사용하였다. 앞쪽 처마 아래에는 사액받기 이전의 이름인 ‘백운동’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강학당 내부에는 명종이 직접 쓴 ‘소수서원’ 현판이 부끄러운 듯 걸려있다. 글씨가 유순하고 귀엽게 느껴진다.

강학당의 서쪽으로는 문성공묘라고 현판을 건 사당이 보인다.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된 건물로 회헌 안향의 위패를 모셨다. 1544년(중종 39)에는 안축과 안보를 추가 배향하였고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여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다. 사당의 문을 내삼문이라 하여 문이 세 개인데 비해 문성공묘의 대문은 단문인 대신 측면에 협문을 두었다. 정면의 문은, 내삼문의 중앙문에 해당하는 신도문으로 사람들은 주로 측면으로 드나든다. 사당에는 ‘묘(廟)’와 ‘사(祠)’가 있는데 우리나라 대부분 사당은 ‘사’이다. 조정의 논의를 통하여 모든 대신들의 동의가 있고 이를 임금이 인정한 특정한 사당만을 ‘묘’라 칭할 수 있었으니 ‘문성공묘’는 조선시대 건립된 수많은 사당 중에도 그 격이 특별함을 알 수 있다. 현판 글씨는 성균관 명륜당 현판을 쓴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이다.

강학당의 뒤편에 직각을 이루는 건물이 기숙공간이다.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 일반적인 형태와는 달리 한 건물로 이어져 있고 유생 중에서도 상급자나 스승이 사용한 기숙사이다. 직방재와 일신재가 있는 건물과는 별도로 뒤쪽에 자리한 학구재와 일신재는 격이 낮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수서원의 네 개의 기숙공간은 단의 높이와 건물의 규모로 그 위계를 표현하고 있다. 머무는 사람의 위상에 따라 건물에서도 예(禮)에 따른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낮고 쉬운 것을 배워 깊고 어려운 것을 깨닫는다는 하학상달(下學上達)의 개념을 반영하여 제일 동쪽의 지락재를 출발점으로 학구재, 일신재, 직방재 순으로 위계가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락재와 학구재는 직방재 건물보다 한자 낮게 뒷물림하여 동쪽에 ‘ㄱ’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락재(至樂齋)는 송나라 구양수의 글 중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에서 따온 이름으로 ‘지극한 즐거움은 독서만 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일명 앙고재(仰高齋)라고도 하였는데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지락재의 위상이 가장 낮았음을 보여준다. 남쪽을 향하고 있는 학구재(學求齋)는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한다는 의미로 일명 동몽재(童蒙齋)라고도 하였는데 그 이름에서 학구재 역시 어린 유생들의 생활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락재와 학구재는 모두 진리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3칸의 맞배지붕 집이다. 지락재는 북쪽에 온돌방 한 칸을 두었고 학구재는 중앙에 앞뒷면이 개방된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을 들였다.
그에 비하면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가 있는 건물은 2단의 기단석 위에 전면 6칸, 측면 1칸 반 크기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그 위상의 차이가 확연하다. 중앙에 2칸 마루가 있고 양쪽에 2칸 크기의 방이 있는데 서쪽에 있는 방이 직방재, 동쪽에 있는 방이 일신재이다. 일신재는 원래 직방재 옆에 딸린 작은 서재였는데 1805년(순조 5)에 건물을 다시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직방재는 ‘경이직내의이방외(敬以直內義以方外)’라는 『주역』의 문장에서 ‘직’과 ‘방’을 취한 이름으로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일신재는 『대학』의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 그 출처로 인격도야로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수서원에는 다른 서원에 없는 영정각(影幀閣)이 있는 점도 독특하다. 1975년에 신축한 건물로 건물 자체의 가치는 의미가 없으나 국보 제111호인 안향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의 초상과 회암 주희,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가 보물 제485호임을 알리는 비석이 영정각 앞에 세워져 있기는 하지만 영정각에는 전시되어 있지 않고 소수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현재 소수박물관은 문을 닫은 상태이다.

소수서원의 결(結)의 영역에는 고직사와 유물관이 있고 죽계천을 건너 뒤쪽으로 자리한 소수박물관과 선비촌도 소수서원의 배후를 이루는 장소로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소수서원은 이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서 독특한 구조와 특징으로 품격이 다른 아름다운 서원이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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