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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서원, 서애 류성룡 배향한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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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폭 동양화 같은 풍경 속 호방하고 고졸한 선비의 멋 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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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07일(수) 10:03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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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안동 병산서원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가장 아름다운 서원, 서애 류성룡 배향한 병산서원
열두 폭 동양화 같은 풍경 속 호방하고 고졸한 선비의 멋 지녀
병산 서원 가는 길은 마치 열두 폭 동양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병풍처럼 둘러 선 병산은 수려한 무인(武人)같고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은 춤사위 부드러운 예인(藝人)같다.
병산서원을 지나쳐 강을 따라 계속 가면 하회마을로 이어지는 산길이 나온다. 하회마을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정도 걸린다하니 4km 정도 떨어져 있는 듯하다. 들어오는 길도 나가는 길도 모두 포장이 되지 않은 흙길인 셈이다. 자동차로 들어올 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명한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차 두 대가 겨우 교행 할 수 있는 좁은 산길이라 처음에는 좀 의아했다. 문화재청의 권고로 옛길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 하니 미처 생각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는다. ‘유교문화의 길’이라 하여 옛 선비들이 걸었던 길을 따르자는 취지이다. 소중한 유산을 지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하지만 속도와 편리함을 주장하는 여론에 밀려 곧 포장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흙길이라 하지만 편평하게 잘 다져져 크게 불편하지 않고 이러한 기회를 통하여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의식도 점검해 볼 수 있으니 흙길이 그대로 유지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오른 편으로 고개를 돌리니 호방하고 고졸한 선비의 모습으로 병산서원이 우리를 마중한다.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과 그의 셋째 아들 수암 류진(柳袗: 1582~1635)을 배향한 병산서원은 원래 풍악서당에서 출발하였다. 고려 때부터 안동부 풍산현에 있었는데 2차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 온 공민왕이 공부하는 유생들을 기특하게 여겨 논밭과 서책을 내려 격려한 일도 있었다. 그 후 서당 주변이 시장처럼 번잡하여 면학분위기를 해치자 1575년(선조 8) 류성룡이 중심이 되어 지금의 장소로 이건하고 병산서당이라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605년(선조 38)에 안동사림의 주관으로 지금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613년(광해 5) 류성룡의 제자 우복 정경세를 중심으로 지방 유림들이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1662년(현종 3)에 류진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 14) ‘병산’으로 사액을 받아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서원이고 도산서원이 제일 유명한 서원이라면 병산서원은 가장 아름다운 서원으로 일컬어진다. 막바지 꽃을 피워 올리는 배롱나무가 색채의 화려함을 더하면서 거슬림 없이 자연과 어울려 한 폭 그림이 된 서원은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전저후고(前低後高)의 구조로 이루어져 강학공간은 앞에 낮게, 제향공간은 뒤에 높게 배치하였다.
배롱나무 꽃들이 붉게 손을 흔들어 주는 진입로 끝에 서원의 정문인 솟을삼문, 복례문(復禮門)이 있다.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극기복례(克己復禮)에 출처를 둔 이름으로, 사욕을 이겨 예를 행하는 것이 인(仁)이라 했던 공자의 말씀을 전한다. 문 안으로 들어가 뒤를 돌아보면 삼문 좌우 내부 시렁 위에 요즘 보기 드문 가마가 있다. 서쪽 칸에는 네 명이 메는 가마, 사인교(四人轎)와 두 명이 메는 가마가 있고, 동쪽 칸에는 음식을 나르던 들것인 가자(架子)가 보관되어 있다.
서쪽 담 아래에는 광영지(光影池)라는 작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주자의 시(詩) ‘관서유감(觀書有感)’ 중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니다.’라는 의미의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나온 이름인데 이름에 비하면 단출한 감이 있다.
강학공간으로 나아가는 돌계단은 만대루(晩對樓)라는 누각 아래 기둥 사이를 지난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춘 이들에게만 허락된 공간임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만대루 2층 누각에 앉아 바라보는 병산과 낙동강의 이미지는 많은 사진을 통하여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병산서원의 상징적인 모습이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만대루 2층에 오를 수가 없다. 만대루를 받치고 있는 동쪽 기둥이 기울고 있어서 보수가 되기 전까지는 출입을 금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만대루는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호방한 기운이 있다. 전면 7칸, 측면 2칸의 넓은 누마루는 텅 비어있는 공간으로 시시각각 변화하는 하늘과 산과 강물을 맘껏 들여 하루를 앉아 있어도 떠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만대’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와 송나라 유학자 주희의 시, ‘만대정’에서 인용하였다는 설 중 전자가 우세하다. 푸른 절벽은 늦을 녘 대할 만하다는 뜻의 ‘취병의만대(翠屏宜晚對)’라는 구절에서 따왔는데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 이 곳에서 보는 경치가 으뜸이라 한다.
만대루를 등지면 마주보이는 건물이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의 입교당(立敎堂)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던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불을 밝히기 위한 정료대를 가운데 세우고 양쪽으로 6단의 돌계단을 두어 오른쪽으로 오르고 왼쪽으로 내려오도록 하였다. 높은 기단 위에 팔작지붕을 얹어 단아한 기품이 흐르는 입교당은 정면 5칸 중 양쪽에 방이 있고 가운데 3칸은 앞뒤가 시원하게 트인 대청마루이다. 동쪽 방 문 위에는 명성재(明誠齋), 서쪽 방 문 위에는 경의재(敬義齋) 현판이 걸려있다. 명성재는 원장실이었고 세로로 한 칸 더 큰 경의재는 부원장이나 유생의 대표 격인 유사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낮은 곳에서 입교당을 우러르듯 양쪽으로 배치된 동재와 서재는 좌고우저(左高右底)의 원리에 따라 상급생들은 동재에 기거하였다. 건물의 배치에서도 위계에 따른 엄격함이 보인다. 동직재(動直齋) 현판이 걸린 동재와 정허재(靜虛齋) 현판이 걸린 서재는 쌍둥이처럼 똑같은 구조와 규모로 전면 4칸 중 남쪽 2칸과 북쪽 한 칸에 방을 두었고 가운데 한 칸은 대청마루이다. 서재의 북쪽 방은 책은 보관하는 장서실(藏書室)로 통풍이 잘 되도록 마루를 깔았다.
입교당 동쪽 후면에는 10단이 넘는 높은 층계 위 팔괘를 새긴 기둥을 앞세우고 태극문양이 위엄 있게 그려진 내삼문이 보인다. 양쪽으로 풍채 좋은 배롱나무가 신성한 곳을 지키는 수호자처럼 서 있다. 끊임없이 피고 지는 배롱나무 꽃이 ‘쉼 없는 수양’으로 비유되기도 하고 닭 볏처럼 붉은 꽃이 벼슬을 상징하기도 하여 유학의 교육기관에 은행나무와 함께 많이 심는 나무가 배롱나무이다. 병산서원은 유난히 배롱나무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내삼문 서쪽에 배치된 배롱나무는 수령 380년이 넘는 보호수이다. 두 그루의 준수한 배롱나무와 팔괘, 태극문양이 그려진 내삼문, 정갈한 흙담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병산서원의 인기 있는 포토 존 중 한 곳이다.
층계를 오르기 전 동쪽, 담장을 두르고 작은 문을 낸 전사청이 있다.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하며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는 제수를 보관한다. 보통은 사당과 같은 담장 안에 배치되는데 병산서원의 전사청은 독립적인 영역에서 호젓하다. 전사청 담에서 내려다보이는 건물이 고직사인데 고직사에서 제수를 마련하여 전사청으로 올려 보내기 때문에 고직사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을 지휘하고 감독하기 위한 배치로 보인다.
주사(廚舍)라고도 하는 고직사는 사당을 관리하는 고지기와 유사를 도우며 잡무를 하는 장무 등 관리인이 거주하는 집으로 유생들의 식사 준비와 향사(享祀) 때 제수를 준비한다. 건물 가운데에 안뜰을 두어서 전체적으로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뜰 집으로 별도의 출입구가 있다. 고직사로 출입하는 길 옆, 돌담을 달팽이 모양으로 둥글게 감아 초가처럼 볏짚을 엮어 올린 곳은 고직사 전용 화장실로 ‘머슴뒷간’이라고도 한다. 출입문도 없고 지붕도 없지만 달팽이 구조로 내부를 보호하였다. 2003년 보수작업 이후 지금은 흙돌담을 견고하게 쌓아 버젓하고 귀여운 느낌이지만 예전에는 대나무로 엮인 달팽이 구조였다고 한다.
사당의 서쪽에 있는 3칸 집은 장판각(藏板閣)이다. 책을 찍는 목판을 보관하는 곳으로 서원이 출판사 기능도 하였음을 알려준다. 책을 발간하기 위한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으로 판본의 소장량은 서원의 명문(名門) 정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었다. 목판을 화마(火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른 건물과는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에 설치하였고 바닥을 띄우고 앞면을 판벽으로 만든 것은 습기로 인한 목판 훼손을 막기 위한 구조이다.
내삼문 안쪽에는 서애 류성룡과 수암 류진의 위패를 모신 사당 존덕사(尊德祠)가 있다. 중용 27장의 구절 ‘군자는 덕성을 존중하고, 묻고 배움을 길로 삼는다’라는 의미의 존덕성이도문학(尊德性而道問學)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서애의 학문과 덕행을 우러른다는 뜻에서 존덕사라 하였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처음 돌아오는 정(丁)일에 향사(享祀)를 지내는데 평소에는 닫혀있어 들어갈 수 없지만 서원 해설사를 통하거나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알묘(謁廟)가 가능하다. 알묘는 서원에 모신 선현을 뵙고 인사하는 의식을 말하며 알묘와 봉심(奉審)을 나누어 시행한다. 봉심이란 알묘 후 사당으로 들어가 위판함을 열어 상읍례(上揖禮)하고 위판을 받들어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알묘례는 매년 정월 초칠일 오전 11시경 새해인사를 하는 정알(正謁)이 있고 향알(香謁)은 삭망 분향례(朔望 焚香禮)라 하여 매달 음력 초하루(朔)와 보름(望)에 동트기 전 분향례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일반인들이 신청하는 알묘는 일반알묘로 귀빈이나 유림단체의 방문, 서원체험행사 등이 있을 때 행해진다.
방문객이 주인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 당연하지만 완전히 개방하면 신성한 곳이 지닌 권위가 훼손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경우에만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주인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은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임금을 제외한 모든 관직을 두루 거친 선조 때의 재상으로 우리에게는 임진왜란 때 영의정이자 최고의 군직(軍職)인 도체찰사로서 군무를 총괄하여 전쟁을 수습하였고 임진왜란을 기록한 징비록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순신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인연으로 이순신을 천거하였고 권율과 같은 명장을 기용해 임진왜란을 수습하였지만 1598년(선조 31)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 당하고 이후 향리에 머물며 정계에 나가지 않았다.
국보 제132호 징비록은 국보 제76호인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더불어 우리의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왜란이 발발한 임진년(1592)에서 무술년(1598)까지 7년간의 정황을 기록한 필사본으로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관 중이다. ‘징비(懲毖)’란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 중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에서 나온 말로 전쟁 후 참담한 심정으로 훗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했던 그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다.
위대한 선조들의 힘을 새삼 느끼며 아쉬운 마음으로 병산서원을 떠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유석영,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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