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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俗)이 떠나고 법이 머무는 “속리산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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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곁에 온 석공의 열정과 예술혼, 국보 쌍사자석등· 석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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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7월 15일(목) 12:52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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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멈춘 듯 미끄러지는 듯, 소리마저 조심스럽게 흐르는 계곡을 동무 삼아 이어지는 ‘세조길’은, 소나무, 참나무, 단풍, 물푸레나무 등 다양한 수종의 나무 터널이 봄 연두, 여름 초록, 가을 단풍, 겨울 은세계로 철마다 개성을 뽐낸다. 조선 세조와 인연이 깊은 속리산 법주사는 오늘날까지 그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세조로부터 장관급인 벼슬, 정이품을 받은 정이품 소나무는 법주사 초입에서 세조의 이야기를 전하고 복천암을 오가던 세조의 순행길은 이제 피톤치드 가득한 걷기 길로 복원되어 수많은 방문객에게 자연의 건강함과 아름다움으로 에너지를 충전해준다.
법주사가 깃든 속리산(俗離山)은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의미이다. ‘도(道)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 하네.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俗)이 산을 떠나네.’ 라 읊었던 최치원의 시구(詩句)처럼 산을 떠난 것은 오히려 속일지도 모르겠다.
1057m의 최고봉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이, 여덟 장의 연꽃잎처럼 법주사를 감싸니 세속의 먼지가 내려앉을 틈이 없어 보인다. 문장대 등 기암괴석이 웅장함을 더하는 빼어난 산수로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국립공원지역 속리산은, 일대가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정이품송을 비롯하여 하늘다람쥐와 망개나무, 까막딱따구리 등 천연기념물을 품고 있다.
법주사(法住寺)라는 이름은 창건설화에서 유래한다. 신라 진흥왕 14년인 553년 의신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는, 인도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의신조사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지나는데 나귀가 꿈쩍도 하지 않으며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세워 ‘부처의 법이 머무는 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신라 36대 혜공왕 12년인 776년에 진표율사가 대규모로 중창하였는데 정유재란으로 전소되었다가 1624년 조선 인조 2년에 벽암대사가 중건하고 그 뒤로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되었다. 사찰이 번성하였을 때는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가 있었고 삼천 명의 스님을 위해 밥을 짓는 큰 절이었다. 지금은 세조와 인연을 지키는 복천암과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 부근의 탈골암을 비롯하여 12개의 암자가 있다. 목조탑의 원형으로 평가되는 팔상전, 쌍사자석등, 석련지 등 국보 3점을 비롯하여 법주사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화유산은 시간의 언어로만 소통 가능한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한 법주사는 우리나라 3대 미륵도량으로 꼽힌다. 애초의 가람배치는 대웅보전을 축으로 하는 화엄신앙과 용화보전을 축으로 하는 미륵신앙을 자연지형과 연계하여 구현하였다고 한다. 화엄신앙의 축은 관음봉으로 이어지고 미륵신앙의 축은 수정봉으로 연결되며 화엄신앙과 미륵신앙이 팔상전에서 직교하는 구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원래의 용화보전이 헐리어 없어지고 금동미륵대불이 남쪽으로 10m 이동한 자리에 세워지면서 그 축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사실 안타까운 마음은 법주사 들어오는 길에 서 있는 정이품송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우아한 대칭구도로 귀족적인 품격을 느끼게 하던 정이품송의 현재 모습은 한쪽이 무너진 채, 사고를 당한 사람처럼 초라하다. 순식간에 그렇게 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리는 생명의 비가역적 무기력함이 아프게 와닿는다. 아름다운 형태는 무너졌지만, 부디 오래오래 살아서 생명의 위대한 힘을 두고두고 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매표소에서 ‘세조길 자연관찰로’로 접어들면 쨍쨍한 여름날에도 시원하게 일주문까지 걸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사찰의 영역이 시작됨을 알려주는 일주문에는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앞서 보이고 ‘속리산대법주사’라는 전서체 현판이 숨은 그림처럼 숨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고 수정교 너머 마중 나온 금강문을 만난다. 일주문이 중생과 부처를 하나로 보고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깨달음을 전하는 문이라면 금강문은 금강석과 같은 굳건함으로 지혜를 추구하고 깨달음을 실천하여 중생을 구제하고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普提 下化衆生)’을 발원(發願) 다짐하는 곳이다.
금강문에 들어서면 양쪽에 불교의 수호신 금강역사가 지키는 가운데 사자를 탄 문수보살,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의 모습이 보인다. 동자로 표현되기도 하는 문수와 보현은 이곳에서는 보살로 나타났다. 문수보살과 사자는 부처의 지혜를 상징하며, 보현보살과 코끼리는 부처의 복덕 실천을 상징함으로써 금강문의 의미를 전한다. 금강문은 사천왕문, 팔상전, 대웅보전과 직선을 이루는 화엄신앙의 한 축으로, 열린 금강문의 중앙 어칸은 거울 속에 또다른 거울의 모습이 보이듯 사천왕문, 팔상전의 모습까지 담고 있다.
금강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천왕문 진입 전 횡적으로 나열한 문화재들을 차근차근 만나야 한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보물로 지정된 거대한 철솥이 보인다.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무게 약 20여 톤으로 추정되는 철솥은 조선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용해온도가 높은 주철로 대형의 주물솥을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왼쪽에는 높이 솟은 철당간과 석련지가 보인다. 국보인 석련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커다란 하나의 바위에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연꽃잎을 조각하고 그 내부를 깎아 만든 작은 연못이다. 사각의 기단에 팔각의 받침돌을 놓고 삼단의 구분을 두었는데 이는 각각 고집멸도의 사성제(四聖諦), 여덟가지의 바른 길을 의미하는 팔정도(八正道), 삼보(三寶)인 불·법·승을 표현하며 불교의 진리를 전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육법공양이라 하여 각기 의미가 다른 여섯가지의 공양물인 향, 등(초), 꽃, 과일, 차. 쌀을 올리는데 석련지는 부처에게 바치는 꽃공양이다. 하나의 바위를 깎고 조각하여 연못을 만들고 돌연꽃을 피우기 까지 인고의 세월로 장엄과 찬탄을 올린 이름모를 석공의 순수한 열정과 그 예술혼이 천년의 세월을 견디며 우리 곁에 있다.
후미진 왼쪽, 의외의 공간에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의좌상(報恩 法住寺 磨崖如來倚坐像)이 있다. 높이 6m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선명하게 표현된 소라모양의 머리카락인 나발과 화려한 연꽃잎 등 전체적으로 수려한 느낌을 주는 마애여래의상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마애불이자 미륵불로 법주사 미륵신앙을 보여주며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은 의상(倚像)으로 주목을 받는다.
일주문과 금강문 영역을 거치면 사천왕문이다. 사천왕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의 중턱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니 사천왕문에 이르면 청정한 경지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이다. 법주사의 사천왕은 570㎝의 키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지만 표정은 참으로 유순하여 벌을 주기보다는 타이르는 선생님 같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건하였는데 벽암은 서산, 사명대사의 뒤를 이어 팔도 도총섭으로서 의승군을 이끌었던 스님으로서 사천왕상에 호국사상을 담았다.
국보 팔상전은 우리나라의 탑 중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건축가치가 크다. 사리를 모신 탑이면서도, 사방에 두 폭씩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捌相圖)가 있고 부처를 모신 예배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선조 38년부터 인조 4년까지 벽암대사가 다시 세웠는데 석조 기단과 계단은 화재에서 살아남은 통일신라 때의 것이다.
팔상전 너머에는 국보인 쌍사자 석등, 보물 사천왕 석등, 보물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쌍사자석등 왼쪽에 자리잡은 원통보전과 원통보전 내부에 모셔진 목조관음보살좌상, 원통보전을 바라보고 서 있는 석조희견보살입상이 모두 보물이다.
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로는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조형미가 뛰어나 예술적 가치가 있는 수작이다. 입을 벌리고 다문 두 사자는 각각 생과 사, 음양의 조화를 표현하며 서로의 조화로 걸작을 이룬다. 떨어져 나간 꼬리가 안타깝다.
법주사의 상징이 된 금동미륵대불은 높이 33m에 화려한 금박을 입혀 엄청난 존재감으로 세상을 굽어살핀다. 석가신앙이 좀더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라면 미륵신앙은 세상을 구할 미래불에 대한 희망으로 힘든 현실을 버틸 수 있도록 하는 직관적인 대중 신앙의 특징을 보인다. 크기에 압도되기 쉬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일단 규모를 크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오른손을 위로 올린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왼손을 아래로 내린 여원인(與願印)은 각각 ‘두려워하지 말라’, ‘소원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중생을 위로한다. 부처의 압도적인 크기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종교적 선입견을 떠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공간으로 마음을 연다면 큰 부처님이라고 싫어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카메라 트릭으로 부처와 하이파이브 사진을 찍는 관광객의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진 금동미륵대불은, 기단 아래 조성된 용화전에 물이 새면서 지금도 마음고생이 심하다.
마애여래의좌상 옆, 기울어진 거대한 바위 아래에는 꺾어놓은 나뭇가지들이 바위를 괴듯 세워져있다. 한 가족이 나뭇가지를 기대어 세우며 기도하는 것을 보니, 쓰러지지 않는 바위가 사람들에게 공감과 용기를 주며 어느새 애니미즘적 신앙의 대상이 된 듯하다. 거대한 바위에 기대놓은 가냘픈 나뭇가지는 인간이 얼마나 쉽게 맹목적이 되는지 보여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실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인간이 맹목적이 될 때 가장 위험할 것이다. 정신을 깨우려고 방울을 달고 다녔다는 어느 학자처럼 이 혼돈의 시대에 방울 하나 달아야 할 일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사진 유석영 조창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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