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산태극 수태극의 십승지 “태화산 마곡사”
|
|
우리나라 불교건축과 불교미술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사찰
|
|
2021년 07월 27일(화) 14:07 [(주)고창신문] 
|
|
|
| 
| | ⓒ (주)고창신문 | | <기획취재_ 산사의 하모니>
고창군 도솔산 선운사
해남군 두륜산 대흥사
양산시 영축산 통도사
안동시 천등산 봉정사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공주시 태화산 마곡사
순천시 조계산 선암사
영주시 봉황산 부석사
<순서는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마곡사의 보물>
▲ 보물 오층석탑
▲ 보물 영산전
▲ 보물 대웅보전
▲ 보물 대광보전
▲ 보물 석가모니불 괘불탱
공주 마곡사(公州 麻谷寺)_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산태극 수태극의 십승지지 “태화산 마곡사”
우리나라 불교건축과 불교미술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사찰
날이면 날마다 쏟아지는 사건 사고에 노출된 현대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이 행복’이라 말하겠지만, 마곡사 처마에 매달린 풍경의 물고기는 늘 일상을 뒤흔드는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에 부대끼면서도 푸른 하늘을 헤엄치며 자유를 만끽한다.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바람이 귀찮지도 않은지 물고기는 온몸으로 춤을 추며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길로 감싸이고 산으로 둘러싸인 마곡사는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정감록 십승지지의 한 곳이다. 산과 물이 태극문양을 이루는 산태극 수태극의 지형으로 물길을 거슬러 오른편으로 감아 돌아야 마곡사에 이른다.
십승지지의 복된 땅이 어느 계절인들 좋지 않을 리 없건만 ‘춘(春)마곡’이라는 별칭은, 생기 가득한 마곡사의 봄에 매혹되었음을 전한다.
마곡사는 백범 김구가 원종스님이 되어 머물렀던 사찰로도 유명하다. 명성왕후를 시해한 일본군을 살해하고 사형의 위기에서 탈옥하여 마곡사에 은둔했던 김구의 정신과 기상은 마곡사 곳곳에서 퇴색하지 않는 빛처럼 애국의 사기를 북돋운다.
마곡사는 643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어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 중수하였다. 고려 명종(明宗) 때인 1172년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중수하여 마곡사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하였고 조선 초까지 상당한 번영을 이루었다.
지눌은 한국 불교의 중심이 된 조계종(曹溪宗)을 창시한 인물로 한국 불교사의 중대한 이정표를 세웠다. 신라 말 우리나라에 전파된 선종은 참선(參禪) 중심으로, 경전 공부를 중요시하는 교종과 대립하였다. 반목과 갈등이 심해진 교종과 선종의 분쟁을 타파하고자 노력한 지눌은 선교일치론을 주장하며 선(禪)과 교(敎)를 병행하는 수행법으로 우리나라 전통 불교의 지침을 확립하였다. 지눌은 참선 중시의 선종을 중심으로 경전 공부를 중요시하는 교종을 아우르는 조계종을 창시하여 불교의 통합을 이룬 것이다.
마곡사 이름의 유래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마곡사를 세운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 당시의 스승 마곡 보철을 기려 이름을 정했다는 설도 있고, 마곡사에 모여든 사람들이 삼대가 빼곡하게 들어찬 것처럼 많아서 마곡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경사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므로 마곡사를 감싸 흐르는 천을 ‘경사스런 천’이라는 의미로 희지천이라고 하였다.
매표소에서 사찰 가까운 주차장에 이르는 길에는 자동차 도로 옆으로 데크가 놓여, 방해를 받지 않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표소 지나서 오른편 산길로 이어지는 ‘전망이 있는 마곡사 가는길’로 접어드는 산행길을 선호한다. 주차장은 세 방향으로 갈라지는 중앙에 있어서 양쪽으로는 암자나 산행을 위한 길이 뻗어 있고 마곡사에 이르려면 천이 흐르는 아래 방향으로 내려와야 한다.
마곡사는 희지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 영역과 북쪽 영역이 나누어져 극락교로 이어진 계류형 일원식으로 분류된다.
주차장에서 내려오면 해탈문을 만나게 되는데 직선의 진행 방향은 천왕문, 극락교를 지나 북원의 영역으로 유도한다. 남원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해탈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제일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는 해탈문은 용마루 양쪽에 용머리 장식기와가 인상적이다. 전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건물로 공포를 기둥 위에만 구성한 주심포양식이다. 양쪽에 선 금강역사는 커다란 주먹을 내지르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서유기의 사오정을 연상시키는 얼굴로 오히려 웃음을 준다.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는 지혜와 실천을 대변하며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 구제를 위한 보살행의 다짐을 전한다.
입구인 해탈문은 지나면 수미산이 중턱을 상징하는 천왕문이 마주 보인다.
전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얹었고 사람 인(人) 형태의 박공에는 풍판을 달아 무게감이 있다. 내부에는 성스럽고 청정한 공간을 수호하는 동방지국천왕, 서방광목천왕, 남방증장천왕, 북방다문천왕이 화려한 보관으로 권위를 드러내며 악귀를 벌하고 있으나 표정만큼은 옆집 할아버지처럼 수수하고 익살스럽다. 또한 여의주를 들고 있어야 할 광목천왕은 과일을 들고, 보탑을 들고 있어야 할 다문천왕은 고추와 복숭아 등이 담긴 과일바구니를 들고 있어서 지역특산물을 홍보하고 있는 듯 친근미가 있다.
진입 방향을 왼쪽으로 꺾으면 남원의 영역이다.
남원은 중심건물 영산전을 향하여, 스님들이 수행하는 선방인 매화당과 수선사, 강당인 흥성루가 ㅁ자를 이루었고 명부전, 산신각이 별도의 공간에 배치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51년(효종2) 각순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마곡사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조선 후기 건축이 자리 잡기 이전의 과도기적 건축 양상이 반영된 영산전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맞배지붕으로 전면에만 겹처마 구성을 하였는데, 임진왜란 후의 열악한 경제적 상황과 목재의 부족 현상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영산전의 현판은 세조의 친필로, 영산전은 세조와 인연이 깊은 전각이다. 세조가 ‘만세가 지나도 없어지지 않을 곳’이라고 찬탄했을만큼 풍수지리적으로 군왕이 나올만한 명당의 기운이 흐른다고 한다. 세조는 계유정난으로 은둔을 한 생육신 김시습을 만나기 위해 마곡사에 왔지만, 김시습은 이미 부여 무량사로 떠나고 세조는 타고 온 가마를 징표로 남겨두고 말을 타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전한다. 세조의 연(輦)는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일반적으로 영산전은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나한상을 모시는데 마곡사의 영산전은 특이하게도 과거칠불과 현겁 천불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이라고도 한다. 과거불로서 석가모니불을 포함하여 그 이전에 출현한 여섯 부처를 주불로 모시고, 각기 다른 표정과 얼굴의 천불을 뒤편에 빼곡하게 모셨다. 기도 후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부처를 닮은 인연이 생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극락교를 건너 북원의 영역으로 접어들면 오른편으로 범종, 법고, 운판, 목어를 배치한 종각이 보인다. 십자형 지붕을 얹은 웅장한 모습이지만 역사가 짧은 듯 깊이가 없다. 중앙 오층석탑과 대광보전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심검당(尋劍堂), 고방 등의 건물이 있다. 심검당 현판은 정조가 극찬한 송하 조윤형의 글씨로 균형미 있는 힘찬 글씨가 지혜의 칼을 찾고자 하는 좌선의 날카로움을 보여준다. 서쪽에는 조사전, 응진전과 김구선생이 은거했던 백범당이 있다. 광복 직후 마곡사를 다시 찾은 선생이 심은 향나무는 마곡사 마당에서 그때의 기억을 전하고 있다.
마당 중앙에 자리한 오층석탑은 개성이 강한 보물이다. 티베트 불교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일명 풍마동다보탑(風磨銅多寶塔)으로도 불린다. 맨 위쪽에 원나라 라마식 보탑의 영향을 받은 청동제 장식이 있어서 탑의 조성 시기를 원나라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북원에 자리잡은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은 마곡사의 중심불전으로 모두 보물이다. 멀리서 보면 단층인 대광보전과 높은 지대에 중층으로 지어진 대웅보전이 한눈에 보이면서 웅장한 하나의 건물처럼 느껴지는 구조이다.
전면 5칸 측면 3칸의 대광보전은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로 마당의 경사를 자연스러운 석축으로 바로잡아 그 위에 불전을 올렸다. 1782년 대화재 때 소실된 후 체규(體奎)를 중심으로 중창되었다.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하였고 독특하게도 남향의 건물에 동향으로 부처를 모셨다. 이는 예불 공간을 넓게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전의 바닥은 나무 마루인데 대광보전의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있고 그 밑에 이야기가 있는 참나무 돗자리가 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이 정성을 다해 백일기도를 드리며 참나무 돗자리를 짰는데 백일기도가 끝나고 돗자리가 완성되던 날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삼배를 올리고 법당을 걸어나갔다는 이야기이다.
대광보전의 용마루 중앙에는 청기와 한 장이 놓였는데 당시 사용이 극히 제한된 염초를 사용하여 만든 청기와로 마곡사의 높은 위상을 상징한다. 표암 강세황의 글씨인 현판을 비롯하여 중앙 어칸을 양쪽에서 지키는 용머리와 꽃살문 등 세련미를 갖춘 장식적인 요소는 대광보전의 품격을 더욱 높인다. 용머리는 각각 물고기와 여의주를 물었는데 누군가의 훼손으로 여의주는 없어진 상태이다. 내부의 주불, 비로자나불 뒤편에는 서향의 벽에 ‘백의수월관음도’ 그림이 있고 서쪽 외벽에도 금강역사상이 그려져 있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마곡사는 우리나라 불교건축과 불교미술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사찰로 화승(畵僧)의 계보를 이어오던 명성을 느낄 수 있다.
대광보전의 오른편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대웅보전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높은 위치에서 마곡사를 내려다보는 전경이 후련하다.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로 대웅보전 편액을 달았고 전면 5칸, 측면 4칸의 하층과 전면 3칸, 측면 3칸의 상층으로 이루어진 이층 구조인데 다포식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1651년(효종2)에 각순대사와 공주목사 이주연이 중창하였다. 외관은 2층이지만 내부는 하나의 공간인데 2층 전면에 창호를 달아 자연채광으로 불전을 비춘다. 불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삼세불을 모셨다.
내부를 받친 네 개의 기둥은 둘레 2미터가 넘는 싸리나무 기둥으로, 탑돌이하듯 기둥을 돌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염라대왕이 “마곡사 대웅전 싸리나무 기둥을 안아 보았느냐?”라고 묻는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기둥은 기도의 흔적이 반질반질하다.
바람 불자 풍경이 다시 춤을 춘다. 그저 순리대로 흐를 뿐이라는 듯 물고기의 춤이 여유롭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
유석영 기자
|
|
|
|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