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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하 강제동원 된 할아버지의 실제 이야기

2005년 03월 15일(화) 17:59 [(주)고창신문]

 

전국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된 피해접수 신고가 가장 많은 곳이 전라북도라는 통계가 나왔다. 우리 군에서도 군청에 접수된 피해신고만도 약 200여건이 된다.

그중에 우리 주위에 생존하고 계신 할아버지 두 분을 찾아 그 당시 떠올리기도 싫은 아픈 과거를 생생하게 전해듣고자 한다.


94살 유종만 할아버지의 가슴아픈 기억...

유종만 할아버지는 군내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접수 신고자 중에 가장 연장자이다. 신림면 외화리에서 부인 그리고 장애를 가진 아들과 함께 한적하다 못해 적적하리만큼 외딴 흙벽집에서 세 식구가 살고 있다.

1912년 생인 유종만 할아버지의 과거의 기억을 거슬려 올라가려고 하는데 의문점이 발견되었다. 할아버지의 실제 나이와 이름이 호적 등본과 틀리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유종만 할아버지의 실제 성함은 유종백이고 실제 나이는 87살인데 할아버지 위에 형이 일찍 돌아가시고 사망신고와 호적 정리를 안 하게 되어 그 밑에 동생인 종백 할아버지가 형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가지고 유종만으로의 삶으로 여태까지 살아온 것이다.

유종만 할아버지는 그날의 아픈 기억을 다 떠올리시진 못했다. 워낙 오래된 일이고 노환으로 기억이 감퇴한 탓에 그나마 조금씩 떠올리는 장면들을 얘기해주셨다.

24살에 장가를 들고 그 후 3년 뒤에 강제징용 되었는데 그날은 추운 겨울이었단다. 어디로 끌려가는 지도 모른 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일본 땅이었고 할아버지가 도착한 곳은  일본 야마구찌 탄관으로 할아버지의 생활은 아침에 갱에 들어가면 2교대 또는 3교대를 하면서 노동력을 착취 당하셨으며 밥과 잠도 탄광 안에서 모두 해결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함께 일을 했다고 한다. 갱 안에서 작업을 하면서 발뒤꿈치를 다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 생활하기엔 도저히 있을 만한 곳이 아닌 갱 생활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45년 해방 후에 귀국하셨단다. 여기까지가 유종만 할아버지의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얘기하신 부분이다. 유종만 할아버지는 슬하에 5남매를 두셨지만 모두가 다 장애인이란다. 남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할아버지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었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기형서 할아버지의 기억조차도 하기 싫은 기억

“일본인 교장의 꾀임에 넘어갔지”라는 말로 기억을 더듬어 가는 기형서 할아버지(80). 기 할아버지는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하셨다. 1941년 5월경 고창 덕산지구내에 있는 농사학교를 2학년으로 재학 중에 일본인 교장(쓰네야마)의 신임을 받아 일본으로 가서 교육을 받으라는 꾀임에 넘어가 4~5일이면 갈 것을 그 당시 공습이 무서워 숨어가길 여러 번 하여 약 15일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캄차카반도였단다. 공부는 시키지 않고 만날 쓰레기를 줍거나 화장실을 치우는 일이며 소나 돼지 같은 짐승에게 먹이 주는 일만 반복적으로 시켰다 한다. 그 후 일본 천도열도에 차출되어 군사요새인 비행장에서 1개월간 노동을 하고 그곳에서 한국사람 200명을 통솔했다고 한다. 그때 나이 15살에 말이다. 유일하게 일본어를 할 줄 알았다는게 이유다. 그 후 해군 시설부(가라오가)에 징용되었다.

새벽2시에 날이 새고 밤 10시에 해가 넘어가는 상황에서 저녁 내내 일본에 충성을 다하겠다라는 강령을 시키고 잠을 재우지 않았다 한다. 기 할아버지는 하늘에 떠있는 보름달을 보며 “내 부모님도 나와 같은 달을 보고 계시겠지”란 생각을 하면서 자살할 생각을 했다가 일본 군인에게 들켜 헌병대에 끌려가 주의를 받고 나왔으나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자살을 다짐했으나 행동이 수상쩍은 것을 안 해군 시설부 중위가 다행히도 편의를 봐줬다. 그 해군 시설부 중위의 아버지는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라서 선심 아닌 선심을 써준 것이다. 기 할아버지는 2년 8개월간을 그곳에서 있으면서 1945년 8월에 해방이 된 것을 이유로하여 귀국하려 했으나 일본에서 기한을 연장하려 하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데모를 해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었다.

군내에 접수된 피해 신고 중에 미비하지만 유종만, 기형서 할아버지를 만나 뵙고 많은 보상은 아니더라도 남은 여생을 지금보다 편안하게 살다 갈 수 있도록 국가가 배려해 줬으면 하는 심정이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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