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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봉기는 반봉건 지향의 혁명
1894년 3월에 전봉준 등 지도부는 무장에서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여기에서 농민군들은 4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1차 봉기는 전라도 농민군들이 주도하였고 충청도와 경상도의 농민군들이 측면에서 호응하였다. 집강소기간에도 이런 구도와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집강소는 농민통치기구였고 집강소활동은 반봉건운동이었다. 세도가와 관리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양반 상놈을 가리는 신분차별을 없애고 농민에 토지를 고르게 나누어주고 부채를 탕감하는 일을 벌였다.
농민군이 지향한 시대정신
농민전쟁의 참가층은 동학교도는 물론 광범위한 세력과 여러 계층이 참여하고 거의 모든 지역에서 봉기한 탓으로 그 규모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컸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맨주먹이나 쭉 해야 죽창을 집어 들고 저 무지막지한 관군이나 일본군에게 목숨을 던지며 싸웠던가? 그들이 지향한 바를 두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가 있겠다. 첫째는 반봉건(反封建) 운동이었다. 사회신분으로는 양반과 상놈, 노비와 백정을 없애고 평등 사회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경제수준으로는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를 개선하고 토지 제도를 개혁하고 직업의 차별을 없애자는 것이다. 또 족벌의 세도정치, 관리의 부정부패를 타도하려 하였다. 둘째는 반침략(反侵略) 운동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의 주권을 멋대로 쥐고 주물렀다. 농민군들은 유린되는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 우월한 자본주의 국가의 상품시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 한 것이다.
오늘날의 역사적 의미
농민군의 정치체제 구상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전봉준은 민씨 정권을 타도한 뒤 “임금 곁을 깨끗이 한 뒤에 몇 사람 주석(柱石)의 선비를 내세서 정치를 하게하고 우리들은 농업에 종사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곧 전제 군주제가 아니라 합의법에 따른 대의제 또는 농민적 집단체제를 구상하였다 한다.(우윤의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 참고)
아무튼 농민군의 근대적 지향(혁명의 완수)이 실현되지 않았다. 이를 실패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혁명은 한 시대에 이루어지는 사례가 세계사를 통해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실현되지 못한 역사였으나 그들이 추구하고 지향한 시대정신은 우리의 유산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풀어야 할 갈등과 모순은 널려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실현되었으나 이기집단과 양극화 현상, 지역갈등, 남북모순, 강대국의 개입 등 여러 모순이 엉켜 있다. 농민군의 시대정신의 실현은 바로 이를 하나씩 풀어가는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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