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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을 단순히 돌로만 보면 정말 재미없는 문화기행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고인돌 하나를 통해 당시 고인돌을 만들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인돌은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 이번 기획취재는 전국에 있는 고인돌을 전부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이 크게 작용하였다. 강행인 줄 알면서 시작한 첫 목적지인 포항은 멀고 먼 길이었다. 88고속도로의 위험한 질주를 시작으로 해서 휴가가 시작된 기간이라 가는 곳마다 길은 자동차로 길게 줄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고인돌들은 모두 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 우리의 가는 길이 심상치 않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덥고 습한 날씨에 시작한 고인돌 기행에서 새삼 고인돌의 특징은 그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번 호에는 경상남 ․ 북도의 고인돌을 돌아보면서 다른 지역과 변별력이 있는 고인돌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편집자 주>
경상남 ․ 북도지역에서 고인돌의 축조 연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기원전 2세기 경까지 고인돌을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점토대토기, 석검, 석촉, 옥류 등이 나타나고 있다. 고인돌이 위치한 입지를 살펴보면, 선상지상 일대와 소하천변 일대로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넓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곳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를 통해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협소한 대지를 대상으로 소규모 농경이나 수렵, 사냥에 의존하여 생활을 영위하던 지역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상석의 규모로 보아 대체적으로 거대한 고인돌이 나타나 다른 지역과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경상남 ․ 북도에서 주로 나타나는 암각화를 안동대학교 임세권 교수는 중국 북부 내이멍꾸(內蒙古) 자치구 암각화와 몽골의 암각화를 비교연구한 뒤 한국의 인면 암각화에서 나타나는 태양신 숭배의 전통과 비교해 시베리아에서 내이멍꾸를 통해 한반도 동해안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가운데 흥해읍 칠포리에 있는 암각화를 들 수 있다. 칠포리에 있는 암각화는 방패형 암각화가 새겨져 있고, 그 방패 안에 구멍을 파 놓았는데 이것을 귀 ․ 눈 ․ 입 ․ 코 등으로 보는 견해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성혈로 보는 견해, 그리고 중국의 도철문처럼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의 기능을 가진 눈으로 보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바둑판식 고인돌에서 나타나는 암각화들은 주로 경상남 ․ 북도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영일 인비리, 포항 칠포리, 경주 안심리, 함안 도항리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경상남북도에서 암각화가 발달하게 된 것은 몽고나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해류를 따라 동해안으로 유입해 들어와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몽고나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암각화가 발달되어 있었고, 이들은 이 암각화를 통해 신앙의 행위를 실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암각화에서 엿볼 수 있는 당시의 신앙은 고인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들 암각화는 주로 청동기시대에 암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들 암각화는 죽은 자의 영생과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례행위로 보고 있다.

울산 상안동 고인돌은 길이가 약 210cm이고 넓이는 170cm이며 두께가 약 100cm이다. 이 고인돌에서는 다 수의 성혈이 나타나고 있다. 충북대학교 이융조 교수의 실험에 의하면 이 성혈은 성인 남자가 약 4시간 정도 홈을 파게 되면 어느 정도의 성혈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성혈 또한 암각화의 일종이며, 이 성혈을 파면서 죽은 사람의 영생과 살아 있는 사람들의 풍요로움과 다산을 기원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주 남산 국사골에 위치한 고인돌은 능선을 따라 열을 지어 나타나는 고인돌이다. 고인돌이 소규모의 군집을 이루고 있다면 대체적으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고인돌은 다른 고인돌과 다르게 정성을 들인 고인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곳 남산에 위치한 고인돌 역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인돌의 상석은 마치 거북이 같은 형상을 하고 있고, 굄돌도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이 고인돌보다 아래 위치하고 있는 고인돌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만약 이 고인돌이 무덤으로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다른 고인돌과 신분적 차이를 추정할 수 있고, 무덤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면 이 고인돌군을 대표하는 제단으로서의 기능을 예측해 볼 수 있다.
김해시 장유면 무계리 고인돌 상석의 규모는 길이 6.1m, 폭 2.9m, 두께 1.3m이며, 장축은 남북방향이다.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이 고인돌은 다른 고인돌보다 거대한 상석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다는 고인돌에서 간돌검이 발견되었는데 이 돌칼의 자루 위아래 폭이 20cm 정도 되어 손잡이가 보통의 검보다 길게 나타나고 심하게 돌출되어 있어 의례용 칼임을 짐작하게 하였다. 아쉽게도 그 고인돌이 현재는 이 지역에 없음을 주민을 통해 확인하였다.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고인돌이 위치한 이 지역은 고인돌이 마을 앞 논 가운데 열을 지어 나타나 이 고인돌을 칠성바우라고 한다. 고인돌의 위치를 가르쳐주신 그 마을에 사시는 김종기 할아버지와 정자에 앉아계시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고인돌로 해서 농사를 마음대로 질수가 없어 답답하다고 하신다. 문화재로 지정만 하고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방치해놓아 치울 수도 없게 만들어 불편하다는 불만을 토로하셨다. 그 얘기를 듣고 문화재의 현주소를 생각하며 씁쓸하게 서 있을 때 좋은 고인돌 더 보고 가라고 가르쳐준 곳이 이숙자 할머니 집이었다. 고인돌은 할머니 집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인돌의 높이 120cm, 길이 320cm, 넓이 90cm의 크기의 고인돌을 보고 취재진들은 놀라워했다. 그 고인돌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성혈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성혈 가운데 북두칠성과 같은 모양도 볼 수 있었다. 다양한 크기의 성혈들을 어루만져 보며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이리 많이 기원했을까를 생각하며 그 때의 삶 앞에 잠시 머리를 숙였다.

고성군 하일면 오방리에 도착해 우리는 논 한 가운데 고인돌 한 기를 보고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고인돌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고인돌은 논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것이 고인돌이라는 표시로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다시 차에서 내리자마자 맨 먼저 보았던 마을 입구에 있는 돌탑 앞으로 갔다. 거석문화의 하나인 이 돌탑 가운데에 남근석이 세워져 있어 무엇보다 눈에 띄었다. 이 돌탑을 세운 사람들은 마을의 풍수지리와 자연지형을 보고 세웠을 것이다. 이 돌탑은 마을의 터가 불안정한 것을 편안한 삶터로 가꾸려는 의지의 표상물이다. 대체적으로 남근석은 여근지세의 음기를 눌러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 곳 마을지형에 따라 이 돌탑은 남성의 기운을 설하고, 여성의 기운을 보호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남자들이 대부분 장수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여자들이 단명하는 것은 남성의 기운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 앞에 당산인 돌탑을 세워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본래 당산제는 모두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지혜로움에서 시작된 전통민속임을 재차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일행은 숨을 크게 쉬고 일정에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경상남도에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난 고인돌은 사천시 신벽동에 위치하고 있는 고인돌군이다. 이 지역은 청동기 시대의 묘제부터 현재의 묘제로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비교적 평지인 이곳에 위치한 고인돌은 2열로 열을 지어 나타나고 있고, 남방식 고인돌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대를 아우르는 이 지역을 보면서 죽음은 삶의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고, 그 삶의 현상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겸허함을 배울 수 있었다. 달려드는 모기떼에게 엄청난 헌혈을 한 후 우리는 그 자리를 부산하게 떠나왔다. 모기도 우리들의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한 순간이었다./이숙희, 김희정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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