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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창고인돌의 중요성 재조명 ⑩

동남아시아 고인돌과 한반도 고인돌 비교 분석 <2>

2007년 10월 26일(금) 16:08 [(주)고창신문]

 


사가 구보이쯔미 마루야마 유적


 

" 정복은 또 하나의 문화적 충격... 신마치 고인돌의 인골은 투쟁에서 좌절된 삶의 단상이다."

 

8월 16일 한반도 고인돌과 동남아시아 고인돌의 비교 분석을 위한 무겁고 힘든 과정의 일정을 위해 일행은 고창을 떠났다. 떠나는 마음은 늘 부산하고 즐거운 것인데, 이렇게 낯설고 대책없는 여행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두렵고 부담스러웠다. 전주에서 리무진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에도 내 무거운 배낭의 무게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까지 안내해 줄 가이드도 없었고 일본이란 나라에 대한 기초지식도 갖추지 못했으며, 언어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라 근심은 더욱 커졌다. 인천공항에는 여름휴가철을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많은 여행객들이 보였다. 나도 그 틈에 서서 출국수속을 밟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핸드폰 로밍하는 것도 잊지 않고 준비를 갖추었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먼저 입국수속을 밟았다. 그러나 이제부터 정말 우리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하카타역까지 어떻게 가야할지를 우리는 처음부터 알아가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어 고인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물어 보았지만 전혀 알지 못한다는 대답을 듣고 나니 우리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일단은 하카타역 내에 있는 관광안내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책에서 하카타역에 가면 관광안내소가 있다는 것을 본 기억을 생각해 내었다. 하지만 어떻게 타야 하는지 막막하던 차에 옆에서 한 여학생의 입에서 ‘하카타 에키’라는 단어가 들렸고 우리는 바로 그 여학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한국인을 만나 하카타역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으나 그 다음이 또 문제였다. 종합관광안내소를 찾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안내원에게 고인돌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당황스러워 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그림을 그려가며 영어로 써가며 설명을 해주었지만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안내소에서 호텔을 안내받아 호텔을 먼저 가는 방법을 찾았다. 길 가는 일본인에게 “스미마셍”하며 내가 가고자 하는 호텔이 어디 있는지를 드문드문 아는 일본어를 써가며 물어 우리는 저녁 7시가 넘어서야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프런트에서 직원에게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받아 우리는  택시를 렌트해 취재를 시작하였다. 70대의 할아버지 기사에게 후쿠오카 시토고인돌군과 신마치유적, 그리고 사가의 요시노가리 공원까지 데려다 줄 것을 요청했다. 고인돌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할아버지는 일단 시토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시토고인돌과 신마치유적이 위치해 있는 곳을 알 수 있었고, 마을 주민들의 친절한 설명으로 우리는 시토 고인돌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토 고인돌

 

시토고인돌군에는 10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그 가운데 4기는 1953년 문화재보호위원회에 의해 발굴조사되었고, 1972년 국가 사적에 지정되어 있다. 현재는 주변이 논으로 되어 있고, 유적에 대한 안내문만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신마치 유적으로 이동하면서 이 지역의 풍습이나 특별한 기념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志摩町의 庚申信仰에 대한 유래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곳 志摩町에는 육십갑자 중 庚申일을 기념하는 풍습이 있다.

庚申의 기원은 중국의 도교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다. 인간의 몸속에는 三尸라고 불리는 벌레가 있어 庚申날 밤에 체내를 빠져나가 천제에게 올라가 그 사람의 죄를 보고하러 간다고 한다. 그 보고로 인해 그 사람의 건강이나 수명이 정해진다. 그래서 경신날에 철야를 해서 三尸가 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장수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져 여러 신앙과 결합되어 庚申信仰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庚申 날에 철야하는 것을「庚申기다리기」라고 하며,  庚申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이야기하는 것을「庚申講」이라고 한다. 庚申講의 시작은, 奈良시대 말이라고도 하며, 平安시대라고도 한다. 본래는 귀족이나 승려들이 신앙하였는데, 室町시대 이후 민중에까지 퍼져서 江戸시대에는 널리 신앙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가 끝나고 기사 할아버지는 ‘프레젠또’라고 하며 잠시 택시에서 내려 우리 일행에게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음료수는 긴장한 일행들에게 무엇보다 기분 좋은 선물이 되었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일행은 비로서 긴장을 늦추었다. 신마치 유적을 찾아가는 데는 아직 멀었다. 길은 여러 곳이고, 낯선 곳에서 우리는 몇 번을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서 마침내 신마치유적 전시관을 찾게 되었다.


신마치전시관 내부

신마치 유적은 한적하지만 무엇보다 잘 정비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마치유적은 昭和61년에 처음으로 발굴조사가 시행되었고, 미생시대 초기의 고인돌을 포함한 분묘가 57기 발견 되었다. 이 고인돌에서는 미생초기의 인골도 출토되어 학계에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 인접한 『御床松原遺跡』과 마찬가지로, 고대중국(진시황의「秦」이나, 전한(前漢)을 전복한 신(新)의 화폐인『半両銭』․『貨泉』도 발견되어 이곳 新町유적이 있는 인진만(引津灣)연안이 고대부터 교역이 번성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新町유적에서는 비교적 완전하게 보존된 고인돌 4기를 발굴조사하였다. 그 가운데 24호 고인돌에서는 넓적다리에 돌화살촉이 꽂혀 있는 인골이 발견되었다. 죽은 사람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사를 진행하는 중에 이 고인돌 바닥 면에서 사람의 머리만한 크기의 구멍이 보였고 여기에서 아이의 치아가 발견되었다. 이 치아의 출토상황은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부족간의 전쟁에서 이 고인돌의 주인은 전쟁의 희생자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승리한 부족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보복으로 상대의 부족 가운데 나이 어린 소년을 잡아서 그 목을 잘라내고 고인돌의 주인인 희생자를 위한 조의로 이 고인돌에 함께 넣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른 고인돌에서 발견되지 않은 목이 없는 이 인골은 신마치 고인돌이 유일하여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新町유적에서는 弥生시대 초기 인골이 14구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초기 弥生시대의 인골이 발견된 것은 일본에서도 新町유적이 처음이다. 고인돌에서 출토된 화천(貨泉)․ 반량전(半両銭)을 보아 弥生문화는 벼농사와 함께 한반도 남부에서 전래되어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고인돌에서 인골이 발견되었을 때, 대체적으로 대륙계통의 특징을 가진 사람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조사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신마치인(新町人)은 일본의 승문인(縄文人)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은 弥生문화의 기원에 대해서 큰 의문을 던지게 되었고,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新町유적에서는 옹관(甕棺)이나 부장소호(副葬小壺)가 출토되고 있다. 모두가 원형 모습 그대로의 형태이며 공예품으로서도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옹관이 출토하는 예는 그리 많지 않으며 이는 弥生시대 초기의 묘제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신마치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 제1차 조사가 시행되는 구획을 平成 4년도에 사적으로 지정하고『新町유적전시관』을 건립하였다.『新町유적전시관』은 昭和 61년에 제1차 조사가 실시된 유적 바로 위에 세웠다. 건축할 때, 지하의 유구가 파괴되지 않도록 흙을 쌓아 건물자체의 기초가 유구를 파손하지 않도록 고려하였다. 관내의 유구는 조사 시에 발굴되었던 위치에 복원하였고, 실물은 아니고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유적 자체가 사구에 구축되었기 때문에 유구의 재현에서도 모래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복원 할 때 모래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벽면을 약품으로 굳혀놓았다.



신마치전시관 내 하부구조

 

전시관에는 고인돌 3기를 복원하였다. 특히 11호기와 13호기는 통로 가까이에 있어서 그 당당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고인돌 앞에는 사자에게 올렸던 부장품인 소형의 단지(항아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 우리는 사가로 급하게 달려갔다. 보이는 곳은 고창과 다름없는 시골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배가 고프자 문득 고창이 못견디게 그리웠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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