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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국화 옆에서 시상은 고창읍 월곡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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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미당을 만났던 먼 옛날의 회고담!)
정 규 갑(전북일보 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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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10일(화) 00:00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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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술의 애찬론
두주불사의 미당과 필자(기자시절)는 1974년 5월 서정주 시비(선운사동구) 제막과 1981년 5월 선운산가비 제막에 앞서 고창읍 동촌동 김양일씨(작고, 신아일보 재직 시) 등 3~4차례의 만남이 있었다. 선운사 불도전 앞 그늘진 잔디밭 만남의 자리에서 필자는 미당에게 “선배님 ‘국화 옆에서’ 시상이 고창읍 월곡리가 맞냐”고 묻자 “요새 젊은 기자들은 감성이 빠르단 말이야. 맞다. 아버지가 학교(고창고보)를 보내기 위해 이곳으로 이사해서 사춘기의 어려운 시절에 퇴학까지 당했으니 꼴이 되었나” 부모님에 대한 면목도 없고 그러면서도 미당은 고창고보에서 졸업은 못했지만 재학했다는 자긍심만은 컸다. 미당은 고향에 내려올 경우 학교 후배들이 선생님 보다는 선배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흡족하게 생각했다. 미당은 “나 말이야, 어릴 적에 서당도 조금 다니고 해서 부처님께 귀의는 안했지만 반 불교도가 되어 왜놈들의 감시를 피할 겸 주로 사찰에서 불교 경서 등을 열심히 탐독했지.” “월곡의 집을 나와 선운사의 동운암과 석상암 등 선운사에 기거하면서 불경서를 공부하다 상경, 혜화전문학교에서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전신)로 옮겨 수학은 했지만 왜놈들의 방해로 졸업장은 하나도 없어.” 하시면서 좀 쉰 소리 같은 소리로 껄껄 웃으셨다. 미당은 바로 술의 찬미를 꺼냈다. “후배기자, 술 할줄 아나, 그러시면서 할머니들이 독에 찹쌀과 누룩을 빚어 아랫목에다 이불로 털어 씌우고 며칠 후 독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면 거기다 용수를 박아 놓고 사발 같은 작은 뚝배기로 퍼 마시면 그 맛이야 어디다 비할 수 있겠는가. 간혹 국화꽃 몇 개를 따다 술독에 넣어 두었다가 며칠 후에 퍼 마시면 은은한 동향적인 향취, 국화주는 천하일품의 술로 시의 영감이 떠오른다면서 두주불사의 미당은 술의 애찬론에서 당나라의 이태백은 달과 국화주로 시를 읊었으며 진·송나라의 도연명(365~427)도 술과 함께 자연을 벗 삼은 자연시(당시는 산문)의 초기시인이었다. 우리나라 이조례의 김삿갓(김립, 본명 김병연 1807~1863, 경기 양주 출신)은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조부가 선천부사로 재임 시 적군에 항복 패족이 되었는데 김병연은 그 사실을 모르고 조부를 모독하는 시를 써 향시에서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가 뒤늦게 이를 알고 물러나 금강산을 비롯해 전국을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며 술과 벗을 하고 해학시로 선비들을 조롱하는 수많은 한시를 남겨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미당은 할머니가 독에 담아준 술맛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고 당시 고창에는 부안약주가 유명했다. 미당은 부안약주를 주는데로 마시고 거나하면 시인은 술을 마셔야 만이 낭만적인(휴머니즘) 사물의 영적 시적 감각이 대자연 섭리의 영감으로 좋은 시를 창작해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모방시를 많이 쓰게된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미당은 “기자후배, 시 쓰나?”라는 물음에 필자는 “일체 못 씁니다”라고 대답했다. 미당은 ‘기자들은 자연사물을 잘 파악, 시인이고 수필가로 낭만이 깃든 서사시를 펴낼 수가 있어. 언제 한편 써서 나에게 보내봐’라고 하셨지만 그 약속을 못 지키고 오늘까지 왔다. 미당선배와 기자후배가 노변 정담식으로 시와 술에 대한 장시간의 정담을 나누었다.
미당은 한 때 샤머니즘에 몰려 논쟁
미당의 특이한 점은 출생지가 부안면 선운리 질마제로 높은 곳에 올라서면 변산반도와 곰소항 선운리 앞바다에 있는 독도(독섬) 섬이 한눈에 굽어보이고 줄포만은 선운리와 한지선으로 이따금씩 갈매기의 끼룩끼룩 노래가 들리는 어촌이면서도 농촌으로 미당이 어릴 적에 파도소리 등을 들었음에도 고향인 ‘질마제로 가다’의 시 중 바다에 대한 시구가 한구절도 볼 수가 없었다. 주로 불교에 연관된 시가 많아 한때 미당은 샤머니즘(접신술)자로 1964년도 문학춘추에서 김종길과 논쟁을 해왔다. 미당은 불교의 연기사상과 융합 불교의 삼세인연과 윤희전생이라는 관념적인 불교시문학에 전념 동향적인 내연과 감성의 세계 천착으로 그 시계를 변모해가 무명세계에서 해매는 중생의 원관념은 불교의 진리세계임을 헤아려 관념사상을 주창하기로 했다. 미당은 질마제의 신화는 산문시로 토속적인(주술) 고향마을의 구전 전승되어오던 설화를 구술적으로 형상화 하여 설화를 낭만적인 상상의 평원으로 이끌어 내 시적으로 표출했다.
선운사의 동구
미당은 ‘아버지 돌아가시고’의 수필 형식의 서술시에서 심원의 김억만씨가 아버지의 재산관계로 인한 재소(재판) 사건으로 미당이 취하함으로 감옥살이를 면한 김억만씨가 초청 -중략- 미당은 이날 이슬비가 내리는데 우산도 없이 심원에서 선운사로 걸어가는 도중 길가에 오막살이 주막이 있어 “약주 있소” 하고 들어서니 “예”하면서 맞이해주는 주모는 전라도 그대로의 육자배기 여인이었네. “그렇잖아도 오늘은 개봉해볼까 하자 꽃술이 한 항아리 기다리고 있는디라우.” 미당은 육자배기 그루모와 꽃술 한동이를 눈 깜짝할 사이 비워버리고 술에 얼얼한 육자배기 주모는 진짜 육자배기도 들려주고 “동백꽃이 피거들랑 또 오시소”의 작별을 한 뒤 10년이 지난 1951년에 빨치산 전투 때 육자배기 주모가 경관들에게 밥을 지어주었다는 죄로 가족전체가 학살을 당하고 그 주막도 불을 질러 미당이 그 후 주막을 찾았을 때는 잿더미의 자리가 남아 있어 미당은 이와 같은 사실적 사물을 시로 표현, 꽃술, 육자배기주모, 선운사 동백꽃 등을 연계한 서술적인 시구로 묘사했다. ‘선운사의 동구’의 시비에 선운사 고랑으로/선운산 동백꽃을/보러갔더니/동백꽃은/아직일저/피지 않았고/막걸리 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작년 것만/상기도 남았습니다/그것도/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미당 서정주는 이와 같이 그 유명한 ‘국화 옆에서’와 ‘선운사 동구’등 지역과 연계된 산문의 서사시로 묘사와 표출로 그를 따른 지역후배 동호인들이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자체적으로 자금을 출연 발족한 고창 국화축제위원회(위원장 정원환)에서는 2008년도까지 4회째 축제를 열어 전국에서 1백20만명의 관광객이 고창을 찾았다는 것이다. 국화축제는 들국화의 향기 내음과 꿋꿋한 동양적인 절개 국민의 시인인 미당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시상이 국화축제장소인 석정리의 이웃인 고창읍 월곡리에서 발상이 되어 해를 거듭하면서 성황을 이루고 있다.
도솔암과 한벽송 스님
52년전(1957년 단기 4290년) 불교계가 중심이 되어 시문학의 록원이 창간호를 발간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송종헌 축간사와 전국의 사찰이 총동원되고 불교에 대한 권위자 등이 총망라. 참여 불교의 시문학지 록원이 발간 정태혁의 권두사, 김범권, 권상노 등의 축사 평론시편에는 유당 최남선의 시조, 노산 이은상의 록원송. 공초 오상순의 록원의 자명, 미당 서정주의 쑥국새 타령 등 수명의 유명인들이 참여했으며 저술편에 박순천의 현대 여성에게 드리는 각서 등 평론 시, 단평 창작에 이르기까지 40여명의 유명인들의 글이 수록되었다. 이중 창작편의 한숙희는 콩트 ‘눈먼 왕자’를 수록한 주인공으로 한숙희는 불명 한벽송으로 30여년 전 고창선운사 도솔암에서 스님으로 있었다. 이전 출신으로 제2의 청춘을 불사르고 주인공인 한 스님은 언론계와 문단에서 활약하다 불교분규 때 분신기도까지 했던 한 스님은 선운사하면 불교계에서는 미당 서정주를 연상하며 산사 곳곳에 미당의 서정이 도사려 이곳을 선택, 수도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본 필자가 취재했던 한 스님의 편을 게재하겠음) 미당이 ‘국화 옆에서’의 시상을 떠올렸던 고창읍 월곡리 그 집에는 현재 유재준씨가 부친 때부터 살아오고 있어 이곳에 문학동호인들이 앞장서 국화 옆에서의 시비 하나쯤 세어봄직도 하다. 끝으로 시인도 평론가도 아닌 필자는 언론계서 40여 년 동안 글을 썼지만 국민의 시인 미당 서정주 편은 무척 부담스럽고 난처한 입장이었다. 특히 시문학의 반열에 올라선 김정웅씨(세계시문학연구회장)를 비롯한 미당시문학관이사장 법만스님(선운사 주지), 전 고창예총지부장과 미당시문학관 2대 이사장 박우영씨, 현 고창예총지부장 박세근씨, 고창문화원장 송영래씨, 전 고창문인협회장 박종은씨(고창교육장), 고창국화축제위원장 정원환씨, 고창신문사장 조창환(문학박사, 우석대교수) 등 시문학의 동인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또한 한평생 시 창작과 후학의 시문학 사상 창달을 위해 대학 강단에서 분필 가루와 맞서다 가신 미당의 극락왕생(영생)하시기를 염원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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