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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칼럼 - 고창 동학농민혁명의 가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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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양 식(충북개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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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2월 20일(금) 00:00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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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창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잉태하다
동학농민혁명을 잉태한 산모 역할을 한 것은 고창군 죽림리에서 1855년 12월 3일 태어난 전봉준이었다.
전봉준(1855~1895)은 고창 당촌마을에서 13살 무렵까지 유소년 시절을 보낸 뒤 전주·원평·태인 등지를 거쳐 서른 살을 갓 넘긴 1886년 이전에 고부 조소마을에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약방을 열고 풍수도 보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동학에 들어간 시기는 38세이던 1892년경으로, 그 이유는 수심(修心)하여 충효를 근본으로 삼아 보국안민“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종교적 차원이 아닌, 사회 개혁의 일환으로 동학에 들어간 것이다. 1892년 11월 전라도 삼례에서 동학도들의 집회가 열렸을 때 전라감사에게 올리는 소장을 직접 작성하였으며, 다음해 3월 금구 원평에서 열린 동학집회를 주도하였다. 그 무렵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수탈에 맞서, 1893년 11월과 12월에 걸쳐 고부 농민들이 조병갑에게 올릴 민장(民狀)을 손수 지어 주었다. 1893년 11월에 작성된 사발통문에 서명한 20명 중 한 사람이었다. 1894년 1월 10일 조병갑을 처단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폭발한 고부 농민봉기를 직접 진두지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통해 전봉준은 혁명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동학 조직과 농민세력을 결합하여 정부를 상대로 직접 물리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2) 고창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분만하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잉태한 곳은 고부이지만, 그것을 분만한 곳은 고창 무장이었다. 고부 농민봉기에 실패한 전봉준은 3월 초순 고부와 인접한 무장으로 옮겨 은밀하게 거사를 준비한 뒤 3월 20일 창의문을 포고하였다. 이것은 정부를 상대로 한 선전포고이자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파죽지세로 관군을 격파한 뒤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고 5월 8일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그 뒤에도 수차례 정부를 대표하는 전라감사 김학진과 수차례 협상을 통해 동학농민군이 주도하는 집강소체제를 이끌어내는 등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이 같은 투쟁노선은 강경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8월 말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고 각지의 동학농민군들도 개별적으로 재봉기하자, 더 이상 시국을 관망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9월 10일경 전주 근처에 있는 삼례에 동학농민군 본부인 대도소를 설치한 뒤 본격적인 재기병 준비에 들어갔다. 그를 위해 군사물자를 준비하는 동시에 남북접 연합을 시도하여 북접 동학교단과의 항일전선을 구축하였다. 이렇게 출정 준비를 마친 뒤 9월 말경 직속부대 4천명을 이끌고 북상을 시작하여 10월 12일 충청도 논산에 도착하였다. 직속부대도 1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곳에서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였다. 그런 다음 동학농민군 연합부대를 총지휘하여 11월 8일부터 11일에 걸쳐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크게 패하고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11월 19일 전주성에서 4일간 머문 뒤, 11월 27일 태인전투를 끝으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장성 입암산성과 백양사를 거쳐 순창 피노리로 피신하였다. 이 때 옛 부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한신현(韓信賢)이 이끄는 민보군에 의해 12월 2일 밤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마침내 1895년 3월 29일(양력) 사형언도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3) 동학농민혁명의 보금자리, 고창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고창지역은 혁명의 보금자리와도 같은 곳이었다. 전봉준과 같은 고창 출신 지도자들이 크게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고창 출신 많은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다. 무장현은 강경중, 고순택, 곽창욱, 김병운, 김준옥, 김흥섭, 문덕중, 박경석, 송경찬, 송문수, 송진호, 양상집, 엄홍삼, 이문교, 장두일, 전막동, 전성숙, 정백현, 추윤문, 황화성, 현재서 등 21명, 고창현은 전봉준, 김수병, 김양두, 김치삼, 남사규, 신정옥, 이춘경, 이동술, 서재성, 오시영, 오하영, 임형로, 임천서, 조판용, 최서중, 홍계관, 홍낙관 등 17명, 흥덕현은 고성천, 고영숙, 고태국, 김도순, 서상옥, 정무경, 서상은, 이청용, 이희풍 등 9명은 혁명을 이끌거나 혁명대열의 앞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활동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무장에서 처음 봉기하여 고부 백산에 집결하였을 때 손화중포에 속한 고창지역 동학농민군은 고창두령인 오하영, 오지영, 임형로, 임천서 등이 통솔한 인원이 1,500여 명, 무장두령 송경찬, 강경중 등이 통솔한 인원이 1,300여 명, 흥덕두령 고영숙 등이 통한한 인원 700여 명 등 도합 3,800여 명에 이른다. 이 규모는 당시 뜻이 있는 고차지역 대다수의 농민들이 참여한 것이었다. 전라도지역에 집강소에 설치된 1894년 7, 8월에도 무장, 흥덕, 고창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어 폐정개혁이 추진되었다. 9월에 들어와 전봉준이 재봉기하였을 때도, 고창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총봉기하였다. 고창에서는 임천서, 임형노가 5천여 명, 무장에서는 송경찬, 송문수, 강경중이 7천 여 명, 흥덕에서는 고영숙이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사실상 고창지역 거의 전농민이 나라를 구하고자 총봉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창지역은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곳일 뿐 아니라, 혁명의 불씨가 끊임없이 살아 피어나도록 한 보금자리였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과 자산은 매우 소중한 지역 자원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동학농민혁명은 무한한 역사적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만큼,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지역 발전과 결합시켰을 때 매우 큰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8년 4월 17일 고창미래포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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