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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고창중.고등학교 개교 90주년 기념에 부쳐

정 기 동(군산대학교 명예교수)

2009년 05월 06일(수) 09:56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이 나라 항일민족교육의 본산인 고창중.고등학교가 개교 90주년을 맞았다. 이 학교는 개교시 부터 해방될 때까지 한결같이 항일의 기상을 이어왔기에 항일민족교육이 이 학교의 표상일 수밖에 없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40여일 후인 4월 13일에 망국의 한을 품은 독립지사들이 중국의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바로 그 다음날에 향학에 불탄 고창군민의 뜻이 담긴 고창고등보통학교(현 고창중.고등학교)가 개교되었다. 단 하루를 사이에 두고 임시정부와 고창고보가 설립되었다는 인연도 이 학교가 항일로 일관되어야 하는 운명이었나 보다. 그래서 이 학교는 다른 학교와 차별이 되는 몇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이 학교가 개교 3년 후 경영이 어려워 폐교의 위기에 처하자 교육열이 왕성한 고창군민들이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1922년 2월 2일 군민대회를 열어 학교인수경영을 결의, 당시 토지가격 100원에 대하여 6원 50전을 할당해서 35만원이라는 거금을 모아 이 돈으로 학교도 짓고 재단기금도 마련했다. 그러므로 이 학교는 고창군민이 세운 민립(民立)학교이다. 당시 한국의 중등학교는 대부분 공립학교이고 사립학교도 개개인이나 종교 등 어느 집단에서 설립했지 군민이라는 다수집단에서 세운 일은 없었다.
둘째, 이 학교는 입본시대임에도 일본인은 한 사람도 다니지를 못했다. 당시 고창군내에는 적지 않은 일본인이 살고 있었고 고창읍 그리고 무장 등에는 일본인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중학교는 전주 등 다른 곳으로 보냈지 고창중학교에는 보내지를 못했다. 그만큼 이 학교에는 일본인이 발을 붙이지 못할 분위기였나 보다. 해방되기 전 해에 전시 도시소개령에 의하여 당시 고창군청 내무과장의 아들이 중학교에 처음으로 들어왔으나 다른 학생이 상대해주지 않고 조그마한 일로도 두들겨 패므로 날마다 울고 지냈다. 요사이로 말하면 ‘왕따’를 시켜버린 것이다.
셋째로 이 학교는 해방될 때까지 학생들 간에 항일조직을 갖고 있었다. 당시 교내 서쪽 신관에는 일본군 대대본부가 있어서 교내에는 일본군이 포진하고 있었는데도 ‘조선독립만세’, ‘일본 놈을 죽여라’라는 삐라가 교내에 붙여져 이를 색출하기 위하여 일본 헌병이 군화를 신은채로 칼을 찬대로 교실에 들어와 학생들의 필적을 조사하고 경찰은 학생들의 하숙방까지 되지는 일이 있었다. 당시 상급학생 중에는 몽양 여운형선생이 주도했던 항일운동단체인 건국동맹과 접선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그들의 쪽지를 전하는 등 심부름을 여러 차례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들의 항일운동을 도와준 듯하다.
넷째로 이 학교는 일본시대에도 일본말 교가가 없었고 오직 지금 부르고 있는 우리말 교가만 있었으며 이를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당시에는 일 년에 한 차례 도내 중등학교가 한 곳에 모여 합동군사훈련을 했었는데 그 때에 각 학교가 재 각기 자기의 일본어 교가를 부르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고창중학교는 조선말로 된 교가를 불러 다른 학생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다섯 번째로 이 학교는 교내에서 조선어를 늦게까지 사용했다. 조선총독부는 1938년부터 모든 관공서에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했고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으나 고창중학교는 이를 무시하고 버젓이 상당기간 동안 그대로 조선말을 썼다. 이는 전 총동창회장이었던 한글학자 한갑수선배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자랑삼아 말하였다.
그 외에도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전교생이 시위에 참여, 주모학생 20여명이 자퇴를 종용받았고, 1937년에는 일본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폐교된 전주신흥학교 학생 전원을 받아드렸다. 위의 일 외에도 항일의 사례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이러한 모든 일을 고려할 때 당시 고창중학교는 ‘일본 바다에 당당하게 떠있는 외로운 조선의 섬’이었다. 주위가 모두 일본화 되었는데도 이 학교만을 일본화를 거부하고 끝까지 조선인의 얼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당당하고 굳건한 항일민족학교에서 배움을 닦은 3만여 동문들이 단결하고 협력하면 어떠한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그 많은 인연 중에서 동창의 인연처럼 중요하고 끈끈한 것은 없다. 같은 배움터에서 길게는 6년에서 짧아도 3년을 함께 하였고 그 기간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동창이라는 인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랄 것이다. 앞으로 10년 후면 개교 100주년이다. 그때에는 남북한의 자욱 왕래도 가능할 터이니 북쪽에 있는 동문들과 온 세계 곳곳에 씨가 되고 있는 동문들을 비롯하여 모든 동문들이 함께하는 거창한 개교 100주년 기념모임을 갖도록 하자.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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