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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동란(비사) 희생자 가족 화해와 용서로 군민 모두 화합을 다져야한다.

정 규 갑(전 고창신문 주필)

2009년 06월 26일(금) 09:32 [(주)고창신문]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동란(사변)이 발발한지 반세기가 지나 만 59년이 되었다. 고창지역은 이 동란에서 전국에서 수복이 가장 늦어 3천여 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한 가슴 아픈 지역이다. 수복이 늦어지자 전남의 장성, 영광, 함평 등지의 공비(빨치산)가 고창군의 대산, 공음, 무장면 등지에 집결되어 1950년 하반기에 시작, 1951년도에 이 3개면에서만 1484명이 군경의 전투시 사살과 주민들이 피난차 유탄에 맞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최후의 발악에 나선 공비들은 51년도 미군부대가 고창에 머물렀다가 전남 영광방면으로 빠져나가자 이 기간 우익단체들은 태극기를 들고 나와 환영해 학살피해는 더 커졌다. 필자가 기자시절 매년 6월이 되면 6.25동란에 대한 기획취재 지시가 내려온다. 당시 격전지와 공비로부터 희생(학살)이 집중된 공음과 대산면을 취재한 사실이 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젖먹이, 갓난아이를 포함한 온 가족을 대창과 곡괭이, 삽 등으로 쳐서 몰살시킨 사실에 천인공노할 만행에 치가 떨리기도 했다. 피살자의 명단과 피살 장소, 일자 등은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고장의 6.25동란의 전란사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우.좌익간의 희생자들을 정부기록을 근간으로 월간조선사에서 6.25사변 피살자 명부에서 발췌한 기록에는 피아간에 2393명이 학살된 것으로 기록되었다.(참고, 고창문화 2008년도에 발간된 특집 고창의 6.25전쟁사) 본 필자가 취재 당시 고창경찰서 사찰과에서는 행불자와 공비들이 밤에 출몰, 약탈한 짐을 나르기 위해 어린아이들까지 동원해 입산했는가 하면 군.경 합동의 공비토벌작전에 동원되었고 월북자와 제국민병에 입소 귀향을 못한 행불자가 많아 그 숫자가 3천명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수복이 늦은 것이 큰 원인이지만 미군부대가 고창읍에 잠깐 멈추어 있던 것과 외지의 공비(빨치산) 집결지로 공비들의 난동이 심했다. 군내에서 희생자가 많은 면은 공음면이 740여명, 대산면이 453명, 무장면이 291명 순으로 많은 학살자가 발생했다. 군의 모 사단 6중대와 경찰합동으로 1951년 1월에 공음면의 수복을 위해 예전리 앞을 진격하는 찰나 대밭에서 따발총이 발사, 군인 2명이 현장에서 전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게 되자 중대장은 공음 수복작전을 변경했다. 선산마을 등 이웃마을과 선산 등으로 밀려온 피난민과 주민들까지 붙잡아 저수지둑에서 즉결처분하고 부대를 철수시켜 이를 일명 ‘선산작전’이라고도 한다. 당시 공비들은 자신들의 방패막으로 주민들의 피난을 독려했으며 피난을 가지 않으면 반동분자라 몰릴까봐서 당시 군경이 수복을 위해 진입을 하는데로 피난민이 많았던 것은 그러한 사실로 그전 속에서도 불리한 조건에서는 공비들은 다 빠져나가고 현장에 남은 선량한 주민들만 희생이 컸다는 것이다.
◆ 한국의 고질적인 감투병에 큰 일이 일어났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투를 좋아해 인공치하에서 공산당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지인들에게 자유대장과 여성동맹위원장들에게 붉은 완장의 감투를 채워주고 지시에 따라 실행에 옮겼다. 또한 당시 자기가족과 마을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형제간에 좌익, 우익으로 갈라서 가족을 보호한 사례도 많았다. 공음과 대산면에서는 가족몰살사가 많았는데 머슴으로 있던 자유대장은 자기가 섬기는 주인가족은 물론 군경가족, 종교인(주로 기독교인), 무당(당굴레), 평소 감정이 있었던 이웃들을 종자도 남겨서는 안된다는 학살로 관에서만 15세미만의 어린이가 615명, 이중 어머니의 품에서 응석을 부리는 1세~5세까지의 철부지 248명이 어머니의 등에 업힌 아이나 꼭 껴안고 있던 아이를 대창이나 삽, 곡괭이를 맞아 흙구덩이에 묻혀 죽어갔다는 것이다. 어떤 이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마을에서는 갓난이를 업은 체 끌려가자 할머니들이 나서 어린이를 빼앗아오자 잔당들이 안된다고 뿌리쳤다. 그러자 우두머리가 그냥 놔두라고 해서 그의 마을에서는 그때 어린이들 5~6명이 성장해 회갑을 맞는다고 한다. 여기에서 대산, 공음, 무장면이 한권역이고 해변가인 상하면은 학살자 명단에 19명으로 이중 1명은 전주 형무소(우익)에서, 1명은 피난 중 동호해변가에서, 2명은 길거리에서 유탄에 숨졌다는 것이다. 상하면은 국회의원, 군법무관, 대법원판사, 염전경영자, 면장, 면의회의장과 공무원, 중앙요로에 진출한 사람이 많았으며 교육수준이 타지에 비해 높은 편이다. 군경부대의 작전 중 피난민의 피살자를 제외한 면민의 피살자는 15명으로 군내에서 가장 취약 지구인데도 학살자가 적은 것은 평소 면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노옹들이 앞장서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주의에 희생자가 가장 적었다는 것이다.
◆ 수복지인 고창읍내는 대나무로 바리케이드
1950년 11월 19일 고창읍을 비롯한 성내, 흥덕, 부안, 신림면 등지에 수복이 완료되었고 미 수복지구인 대산, 공음, 상하, 해리, 심원면 등지에 군경합동작전이 개시되었다. 당시 미 수복지구나 수복지구의 오지마을에서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으로 주민들은 판단을 잘못한 말 한마디에 공비들에게 온가족이 몰살될 수도 있어 낮에 수복지로 이사를 많이 했다. 수복작전에 나선 00사단 대대는 고창중학교에 주둔본부가 설치되고 군경합동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비상시로 전투중 피난민들이 유탄에 맞아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상하면의 하장리, 자룡리, 고리포, 용대리 택동과 해리면의 동호와 심원면의 만돌 고전리 작전에서는 많은 피난민들이 희생되었다. 일부 공비들은 바다로 뛰어들기도 했는데 이곳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지역사람은 별로 없고 군경작전에 방패막이로 밀려온 외지 피난민이었다고 한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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