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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현(興德懸)의 연혁(沿革)과 의병활동(義兵活動) ④

고 석 상(성균관 부관장, 전 흥덕향교 전교)

2009년 09월 22일(화) 09:53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1. 흥덕향교(興德鄕校)
흥덕향교는 태종(太宗) 7년 1407년 현 흥덕면 흥덕리 목화정마을에 대성전(大成殿)을 비롯 명륜당, 동재, 서재, 양사재, 외삼문, 내삼문 등을 창건(創建)하고 선성현(先聖賢)을 숭모하는 봉향(奉享)소 한편으로는 관내 학생들의 교육과 유학을 연구 강론하는 지방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된 것을 광해(光海) 13년 현 위치인 흥덕면교운리 206번지에 재건하여 현재까지 공자(孔子)를 비롯한 오성(五聖)과 송조사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韓國十八賢)을 음력 2월, 8월 상정(上丁)일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現在) 공자탄강일(孔子誕降日) 9월 28일을 성균관대학교에서는 그전부터 공휴일로 하고 있어 2007년도에 성균관에서 장정(章程)을 개정하여 탄강일과 돌아가신 날 5월 11일에 석전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각 향교에 따라 3년간 유예하되 그 후부터는 장정에 따르기로 하였다. 향교는 오늘날의 국립고등교육기관에 해당된다. 향(鄕)은 수도(首都)를 제외한 정치구역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고 교(校)는 학교를 뜻하는 것이므로 결국 향교(鄕校)는 지방의 학교(學校)이다.
2. 의병활동(義兵活動)
-1906년 4월 20일 순창전투에서 일광 정시해 중군장이 순국전사하고 동년 음 11월 7일 면암 최익현 의병대장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8개월 후.
-1907년 8월 10일 의병발상지(義兵發祥地)인 방호정사(方壺精舍) 현 도동사(道東祠)에서 고석진, 고용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만, 고제남, 노병희, 김양수, 황종관, 고제천, 백인수, 강종회 등 호남의사(湖南義士) 60여명이 밀회(密會)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모병과 군자금과 군량미를 모아 무기 등을 구입하여 의병항전 할 것을 결의하고 기삼현, 김영구 등 의병장들에게 은밀하게 연결지어 의병 모병과 무기의 공급 군자금등을 마련하여 100여명의 의병이 정읍, 장성, 고창, 영광등지에서 창의포고문을 돌리며 항전하였다. 동년 12월 5일 김영백부대와 고석진부대가 규합한 의병 120여명이 담양, 곡석, 여수로 남하 전진하면서 창의포고문을 살포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동년 12월 26일 정읍 입암산성에서 일본헌병과 교전하여 대파시켰다.
-1908년 3월 8일 흥덕화시산 용정암에서 왜병과 교전하였으며 동년 11월 7일에는 흥덕 후포리에 있는 일헌병소를 화공으로 습격하여 권총 13정과 군도15정, 탄환 900여발 등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6월 23일 고제남, 김영백, 변순호, 이화일, 고석진, 고예진, 고용진, 김양수 등 8인이 정읍 소성면 두암리에서 잠복 작전을 모의중 일 헌병에 피체되었으나 고제남은 7인의 동지들은 무관함을 주장하여 당일로 석방케하고 고제남 자신은 장성사거리에 있는 일 헌병분견대로 압송되어 가진 악협을 받았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남아의 정의는 충효라 예의동방 우리 강토를 무참히 짓밟는 섬 오랑케 놈들을 전멸치 못하고 손발이 묶였으니 불충불효함이 이에 더할 바 없다”는 한탄 일서를 남기고 고제남은 왜병의 총탄에 쓰러지니 1909년 6월 30일 23세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3. 한국유림독립운동(韓國儒林獨立運動)
파리장서(巴里長書) 약사(略史)
※ 프랑스 파리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萬國平和)회의에 제출할 대한독립청원서에 서명한 한국유림대표 137인 중 호남은 10명이며 10명중 우리고장은 고석진, 고순진, 고예진, 고제만 선생 등 4명이다.
1. 개요
가. 제1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1918년 11월경에 종식됨에 따라 국제연맹이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발족하였다.
나. 미국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원칙이 그대로 국제연맹의 당면정책으로 채택되었다.
다. 전후배상문제(戰後賠償問題)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 있는 베류사이유 궁전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고 있었다.
위와같이 새로운 세계질서를 강조하는 신조류를 따라 자유주의 사상과 민주주의 제도를 확립하려는 운동이 지구 구석구석에 홍수 같이 밀어 닥쳤다.
그당시 일제는 전후평화회의가 열리게 되면 한국문제가 등장될 것이다는 점을 미리 내다보고 그 대비책으로 이완용(李完用)을 정당 대표로 김윤식(金允植)을 유림대표로 한 독립불원서(獨立不願書)를 조작하여 일본정부에 제출케 한 사실이 있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서울 유림들은 일제의 이러한 간계(奸計)를 분쇄하기 위하여 프랑스 파리평화회의에 우리들의 독립 청원서를 제출해야겠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싹트고 있었다. 이 무렵 곽종석 문인 윤충하는 서울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1919년 2월 19일 거창으로 곽종석을 찾아갔다. 영남유림의 영수였던 곽종석에게 프랑스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대한 내용과 전망 그리고 독립불원서 문제로 인한 서울유림들의 동태를 자세히 보고하면서 차제에 파리평화회의에 대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것이 우리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과 곽종석이 이 운동에 대표가 되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 실행 방법은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이 3월 1일로 공포되었으니 그 때를 이용하면 전국유림들의 서명운동도 용이하다는 사실도 아울러 논의하였다. 곽종석은 즉석에서 쾌락하면서 나는 이미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즉한둘연소배를 서울에 파견할터이니 모든 일을 상의하여 진행하라하였다. 여기서부터 각자 동지규합에 전력한결과 유망한 인사들이 다수 포섭되어 그 날 서태영의 집에서 그동안 동자자들이 자리를 같이 하면서 지방유림들에 대한 동원 대책을 논의한 결과 각 지방별로 전남북은 유준근(柳濬根)이 담당하여 10명의 서명을 받고 전국 유림 대표 137인 연서로 대한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심산 김창숙(金昌淑) 밀사(密使)를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임정 김규식(金奎植)으로 하여금 프랑스파리 베르사이유궁전에서 개최되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제출케 하였다.
※그 과정이 3·1 운동과 상의한 점을 지적한다면 3·1운동은 국민봉기로써 대내 투쟁을 제1차적인 목적으로 하는 반면 파리장서운동은 유림의 총의를 비밀리에 망라하고 그것으로써 국제무대에서 공개적으로 투쟁하려는데 차이점이 있다. - 끝 -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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