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6-04-22 | 05:53 오후

로그인 회원가입 기자방 원격

    정치/지방자치 사회 교육 문화/생활 지역소식/정보 고창광장 독자위원회 전북도정 기타

 

전체기사

커뮤니티

독자투고

공지사항

개업 이전

편집회의실

뉴스 > 뉴스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겨울방학 특집 - 내 고장을 빛낸 사람들 ① 민간 항공의 개척자 신용욱 선생

우리나라 민간 항공의 뿌리를 내린 항공계의 선구자

2010년 01월 14일(목) 10:21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1920년대의 근대 개화기에 안창남(安昌男)의 뒤를 이어, 아직 황무지와 같았던 우리 항공계를 개척하고 그 발판을 굳혀 끝내 우리나라 민간 항공의 뿌리를 내린 항공계의 선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 고장 출신 신용욱(愼鏞頊)이었다. 안창남이 항공계의 선구적 이미지를 심어준 사람이었다면 신용욱은 그 이미지를 안고 미개한 항공분야를 갖은 역경과 싸워가면서 오늘의 명맥을 유지시키기에 온 생애를 다 바친 단 한사람의 개척자였다. 그는 흥덕면 사천리 내사마을에서 광해조 때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을 중조(中祖)로 하는 명문의 후예로 태어났다. 거창이 관향(貫鄕)인 그의 집안은 퍽 일찍 개화하여 그가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한국 초유의 독일 유학생이기도 한 신용식(愼鏞植)을 비롯하여 일본·중국 등지에 이미 6명의 유학생을 배출한 ‘깨워진 집안’으로 이름이 높았다. 휘문고보를 마친 그가 비행사가 될 청운의 뜻을 품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집안의 선구적인 풍토에서 물려받은 정신적인 감화의 영향으로 새로운 문명의 여명기에 대처할 스스로의 각오를 다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그는 어려서부터 개성이 강하고 독특하여 사소한 것이라도 남에게 뒤지는 것을 싫어한 성격형성의 과정들이 복합되어 그로 하여금 무녀독남의 가정환경을 박차고 일어서 대담하게 개척기의 비행사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바탕을 이루었을 것이다. 1922년 스물두살의 열혈 청년으로 일본 ‘오구리’ 비행학교를 마친 그는 안창남과 함께 한국 최초의 일등 조종사로서 화려한 인생의 막을 연 것이다. 1925년의 어느날 고창·정읍·부안 지방에서는 이른 새벽밥을 해먹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것은 흥덕사람 신용욱이가 비행사가 되어 비행기를 몰고 흥덕 땅에 내린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시락까지 싸들고 새벽길을 나서 난생 처음의 비행기를 구경하기 위해 신림면 평월리 공 터 주변에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 낮쯤 해서 쌍 날개에 프로펠러가 달린 자그마한 경비행기 한 대가 나타나더니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 위를 몇 바퀴나 돌면서 재주 부리다가 이윽고 빈터에 착륙의 나래를 폈다. 하늘을 찌르는 구경꾼들의 함성소리가 천지를 뒤흔들더니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에 파묻힌 함성은 마침내 만세소리로 변해 버렸다. 비행장도 아닌 빈 공터에서의 무사 착륙을 성공시킨 신용욱의 담력과 투지와 모험성은 문자 그대로 선망의 적이었다. 그의 금의환향은, 일등 조종사로서의 그의 믿음직한 기술을 부러워해서가 아니라 일제치하에서의 한국인 비행사가 탄생된 민족적 긍지에 얽힌 감격적인 뜨거운 사연, 그것이었다. 이 후 그는 가끔 고향이 생각날 때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선운산의 경관과 우뚝한 방장의 영봉을 스쳐 기름진 인천강 유역을 축하 비행하듯이 살피곤 하였다. 그의 포부는 일등 조종사로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일본보다 앞서 있는 서구(西歐) 항공계를 익힘으로써 세계적인 비행사로 성장하겠다는 결심이 서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면서 미국 유학을 결행하여 1933년 미국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살라’ 헬리콥터 학교 조종과를 졸업하기에 이르렀고 동양 사람으로는 유일한 일등 조종면허의 국제 조종사가 된 것이다. 이리하여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는 이름 있는 대가들이 자신의 영예와 권위에 사로잡혀 대부분 안하무인 하던 통계를 묵살하고 후배 양성에 심혈을 다하는 한편 미진된 이 나라 항공계의 발전을 위해서 그 밑거름이 될 것을 다짐하여 개척자적인 그의 소신은 굽힐 줄을 몰랐다. 귀국 후 그는 사재를 털어 여의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학교를 설립하였다. 1936년의 조선항공사업주식회사 그리고 1942년 조선항공주식회사의 설립 등은 모두 항공분야에 대한 그의 탁월한 식견과 불굴의 의지와 정력을 웅변해 주는 것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사업을 전개하면서도 그는 주체의식과 긍지가 남달리 강해서 일본사람과는 아예 담을 쌓는 성품을 항상 간직해 왔다고 한다. 그가 8.15 해방을 맞이하면서 평생의 과업인 KNA(大韓國民航空士)를 세워 민간항공을 개척한 일은 무엇보다도 길이 남을 그의 생애를 통한 업적이었다. 온갖 심혈을 다한 이 사업을 통해 그는 비행사로부터 항공사업인으로 그의 자신을 전환하여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 것이다. 그것은 또 우리나라 최유의 민간항공 개발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의와 보람을 지닌 획기적인 사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KNA사업은 그로 하여금 수많은 출혈을 강요했었다. 그것은 황무지를 개간하는 개척자에게는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할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시련을 불굴의 의지로 이겨내면서 민간 항공의 위기를 끝내 극복해 내기에 최선을 다했었다. 1953년 그는 동양 사람으로는 최초로 비행시간 3천 시간을 돌파했고 미국 민간항공연맹으로부터 무사고 비행기록 표창을 받은 최초의 동양 사람으로 그는 한국이 낳은 국제 비행사로서 우리 항공사에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인물로 부각된 것이다. 그는 1956년 처음으로 한미항공협정(韓美航空協定) 체결을 성공시켜 미국보잉회사로부터 1백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내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때, KNA는 돌이킬 수 없는 비운이 밀어 닥쳤다. 1958년 2월 16일 KNA 소속 여객기가 북괴 간첩들에 의해서 공중 납북되어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한 노선의 결항이 잦아 여객을 외국항공에 거의 빼앗기는 비운의 연속 속에 KNA는 운영상의 중대 위기에 직면했던 것이다. 평소 가족보다도 사랑한 그의 일생의 결산이었던 대한국민항공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존폐의 위기가 더해 갔으며 그의 실의와 번민은 그에게 마지막 운명을 재촉하는 고비가 되고 있었다. 마침내 4·19와 5·16의 정치적 변혁까지 몰아친 1962년 어느날 그토록 한때의 풍운을 몰았던 신용욱 일등 비행사는 한강 하류의 어느 지점에서 그가 아끼고 가꾸어 온 여의도 공항을 눈앞에 두고 60세를 일기로 스스로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것은 생명처럼 아껴온 KNA의 도산에 따른 엄청난 번민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의 결산이었다. 그의 죽음은 비단 한 자연인의 죽음이라기 보다 출범된 개척기의 우리 민간항공의 장송(葬送)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민간항공의 개척을 위해 일생을 불태웠던 그의 강한 집념과 천연한 업적은 우리 항공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주겠지만 그의 타계는 그를 아는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고 말았다. 그는 민간항공의 폭넓은 발전과 항공개발에 대한 그의 집념, 정치적 소신을 현실화하기 위해 자유당 시대인 2대와 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바 있기도 하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제46회 장애인의 날 기념 장애인 인식개선 공연..

봄의 기억, 길 위에 남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고창군 예비후보자 현황..

과거를 품고 내일로, 신재효판소리박물관 재개관!..

회사소개 - 조직도 - 임직원 - 윤리강령 - 편집규약 - 광고문의 - 청소년보호정책 - 기자회원 약관 - 구독신청

 상호: (주)고창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404-81-20793 / 주소: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성산로48 (지적공사 옆) / 대표이사: 유석영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유석영
mail: gc6600@hanmail.net / Tel: 063-563-6600 / Fax : 063-564-8668
Copyright ⓒ (주)고창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