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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의 차이, 그리고 또 다른 미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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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6월 08일(수) 09:41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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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의 차이, 그리고 또 다른 미래의 꿈」
몽골 체 그 미 드
한국말이 귀에 익숙해지고, 한국음식이 입에 당기는 나는 21살 아가씨였을 때 신랑이랑 처음 만났습니다. 첫 만남에서 신랑이 나한테 반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저 착해 보였지만 필이 팍 갈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일주일간 만나다 보니 사람이 괜찮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나는 외동딸이었고, 신랑은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가고 한국 갈 날이 다가오고 뭐부터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우선은 신랑과 시댁 어른들한테 드릴 선물을 샀습니다. 이것저것 준비를 한 후 공항에서 울고 계시는 엄마를 뒤 돌아보지도 않고 나를 기다리는 신랑을 찾아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 보다 더 멋지고 큰 비행기를 타고 이름만 들어본 한국이란 내 꿈의 나라로 “몽골 안녕”하고 떠났습니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한 ‘화려한 한국’ 대신 논과 산, 노인 분들 밖에 없는 시골 삶이 나를 맞이했습니다. 친구도 없고, 말도 못하는 나는 그저 산과 논을 바라보고 하루에 몇 번씩 마주치는 노인들 하고 인사 하고 저 멀리 지나가는 비행기를 보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고 신랑은 아주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하고 만나게 해주고 한국-몽골 사전도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적극적으로 인사말부터 가르쳐주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몽골 사람이랑 만나고 싶고, 몽골음식을 먹고 싶어 했지만 신랑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나는 신랑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딴 생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과 어리석은 생각! 사람은 잘해줄 수록 고마움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랑은 그저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한국 사람들하고 살아야 하니까 빨리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 사고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눈, 세대 차이 이런 모두가 심각한 문제가 될 줄 몰랐습니다.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도 없다 보니 신랑과 시어머니를 자꾸 미워하게 되고 이런 선택을 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한국에 대한 핑크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임신입니다. 축하합니다.” 란 의사 선생님의 말.... 마음이 무척 설레고 기뻤지만, 과연 나는 아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란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아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아주 열심히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가 태어나려면 일주일 남았을 때 아이의 상태가 안 좋아서 갑자기 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나는 눈물만 흐르고 뭐 때문에 왜 우는지도 모르겠으나 그냥 서럽고, 엄마가 너무나 보고 싶었습니다. 수술실에서 나와 병실에 오는데 배가 아파서 꼼짝도 못 했습니다. 세 시간 지나서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아이가 배고파서 많이 울고 있었어요. 일어나서 우유를 먹여주지 못 한 내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워서 또 한 번 울었답니다. 울고 또 울고 ... 아이 키우는 것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어요. 내가 키우는 방법과 시어머니의 옛날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나는 우리 아들하고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만 지내고 나가기도 싫어했어요. 특히 어머니 방에는 가지도 않았답니다. 이것 때문에 신랑하고 많이 싸우게 됐어요. 아이가 5개 월 좀 넘었을 때 저는 둘째를 갖게 됐어요. 실망과 원망 그리움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마마”라고 부르는 아들이 내 마음을 잡아주고 있었어요. 저는 모두를 버리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는 걸 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입덧도 심하고 큰아들도 돌봐야했고 신랑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저는 힘들고 늘 화가 나 있었어요. 내 마음 깊은 곳에 실망이 가득 들어있었지요. 나는 큰아들이 돌 지나고 3개월이 됐을 때 둘째를 낳았어요. 스트레스도 많고 피곤하다 보니 그 화를 아이들한테 자주 내게 되었어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자꾸 심해져가고 있었어요. 신랑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도와주어야 되고, 집안일도 해야 되고, 신랑하고 시어머니랑 갈등도 심해지고 죽을 만큼 힘이 들었어요. 마치 누구하나 흔들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았어요. 제 마음은 오랫동안 심한 바람과 싸워오는 나무랑 똑같았기 때문이죠. 애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미안한 마음에 눈물로 새는 밤들도 많았답니다. 이제 큰 아들이 2살이 됐고 어린이 집에 보내게 됐답니다. 말도 많이 늘었고 좀 여유가 생겼어요. 여유가 생기니까 할 일도 많아졌어요. 운전면허증도 땄어요. 몰론 신랑과 시어머니 도움이 컸어요. 실망과 원망으로 가득 차있던 제 마음에 햇빛이 서서히 들어오고 저는 다시 한 번 꿈을 꾸게 되었어요. 저는 한국어 능력시험에도 도전 해 봤어요. 지난날들이 내 아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한 결과 한국어능력시험 4급에 합격하게 되었어요. 통번역양성 교육도 받고 최우수상까지 타고 수료했어요. 언젠가 저는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어요.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 같았어요. 둘째마저 어린이 집에 보내고 지금은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다문화 몽골강사로 일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한국에 대한 화려한 꿈만 꾸었지만 현실은 틀리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은 현실에 맞는 또 다른 미래의 꿈을 꾸면서 살아가는 두 아이 엄마가 되었답니다. 기회는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한테만 온다는 말을 생각하면서 저는 앞으로도 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할 것입니다. 저의 두 아이들과 우리가족을 위한 행복한 미래의 꿈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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