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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향취와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현장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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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과 공주 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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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7월 01일(금) 09:20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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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서산 해미읍성 진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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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공주 공산성 정문 전경
겨우내 이파리 하나 날 것 같지 않던 앙상한 나뭇가지에 어느덧 신록의 계절이 찾아와 싱그러운 초록 잎이 돋아나고 부드러운 바람 따라 흔들리는 6월의 주말! 가벼운 운동화와 모자를 눌러쓰고 충남 해미읍성과 공산성을 취재하기위해 차에 올랐다.
어릴적 소풍을 모양성(고창읍성)으로만 가서 매우 불만이었지만, 점점 커가면서는 봄이면 하얀 벚꽃이 흐드러지고, 성 외곽에 둘러진 푸른 담쟁이는 그 푸르름만으로도 마음 설레게 했다. 또한 성 안에 길게 뻗은 소나무 속에서 바람을 맞으면 한여름의 더위는 금세 잊혀지기도 한다.
왜군의 공격을 막기위해 쌓았던 성을 오늘날 사람들의 쉼터로 자리 한다는 것이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는 한편 그 옛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여 가슴이 먹먹해져오기도 한다.
처음 도착한 곳은 충남 서산에 자리한 천주교 박해 집단 순교성지로도 잘 알려진 해미읍성이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해안지방에 출몰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혀 온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옮겨 쌓은 것이다. 본래 해미읍성의 이름은 ‘해미내상성(內廂城)’이며 이 성을 쌓도록 지시한 사람은 조선조 세 번째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 16년(1416) 서산태안지역을 돌아본 태종은 왜구에 대한 방비책의 하나로 해미내상성을 축조하도록 지시한다. 성곽의 석축 돌에 청주, 충주, 상주, 제주, 연안, 공주, 부여, 서천 등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인력이 전국에서 차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미읍성은 230여 년간 종2품 병마절도사가 주둔하는 충청도의 군사중심지로서 군사권은 물론 내란방지 등 사회질서의 기능까지 담당하는 격이 높은 성이었다고 한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천주교 박해는 197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 박해는 병인양요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국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이때 해미진영의 겸영장은 내포지방 13개 군현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해당지역의 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이곳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000여명 이상이었다. 이곳으로 끌려온 천주교인들은 회화나무에 철사줄로 매달려 고문을 받았으며, 서문 밖 돌다리 위에 자리개질을 쳐서 죽기도 하였다. 많은 인원을 한 줄로 엮어 한꺼번에 생매장시키거나, 물에 빠뜨려 수장시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많은 신도들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장소여서 1965년부터 성지조성운동이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수 만명의 성지순례행렬이 이어지는 우리나라 최대의 순교성지이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해미읍성은 모양성과 달리 성 내부가 거의 평지로 되어 있다. 들어가는 정문 앞에는 진짜 사람이 창을 들고 문을 지키고 서있어 마네킹을 세워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깜짝 깜짝 놀라며 재미있어한다. 정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관리사무소가 있으며 관리소에는 해설사가 배치되어 있어 해설과 함께 해미읍성을 둘러보면 역사를 빠르게 이해 할 수 있다.
또한 관리소를 지나 중앙으로 곧게 뻗은 길 양쪽에는 서산의 자연과 사람들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어 계절마다 변하는 해미읍성의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해미읍성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의 정문으로 화강암 홍예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단층 문루, 성문 내측의 인방석에는 ‘황명홍치사년신해건(皇明弘治四年辛亥建)’이라는 각자가 크게 새겨져 있어 성종 22년(1491)에 대대적으로 중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동헌(東軒)과 객사(客舍) 동헌은 병마절도사를 비롯한 현감겸영장의 집무실로서 관할 지역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며, 객사는 건물의 중앙 정청에 궐자가 새겨진 전패를 모시고 삭망(매월 초하루, 보름)에 관아의 대소 관원들이 국왕에 대한 예를 올렸던 곳이다. ▲해자(垓字) 성곽 주변에 만들어진 인공수로로 방어용 군사시설로 쓰였던 곳이다. ▲옥사 1935년에 간행된「해미순교자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하였다. ▲청허정(清虛亭) 영조대에 간행된 여지도서에서는 청허정을 이라하여 건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드며, 「신증동국여지승람」기록에 의하면 병마절도사 조숙기가 세웠다고 한다. ▲회화나무 일명 호야나무라고도 불리며, 수령은 3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해미읍성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이 나무의 동쪽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였다. ▲민속가옥 조선시대 부농과 상인 및 말단관리 서리의 집 등 조선시대 민가 3채를 재현하였다.
해미읍성을 도는 내내 천주교 신자들이 고문을 당하였던 회화나무 한그루는 줄곧 나를 따라 다니는듯하여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잔인한 과거를 묵묵히 끌어안고 오랜 세월동안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사람을 대하듯 보이지 않는 신을 대하듯 엄숙해지고 경건해 진다.
회화나무를 지나 민속가옥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면 방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계신다. 할머니들은 전통 베짜기 시연을 위해 바지를 무릎께까지 걷어 올리고 손바닥과 무릎 사이에 나무껍질을 비벼가며 실을 만들고 계셨고, 할아버지들은 대나무를 이용해 각종 바구니와 조리 등 생활 용품을 만들고 계셨다. 실제로 만드는 모습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또 다른 재미를 주었고 어린 아이들이 함께 체험해 보면 과거의 생활을 쉽게 이해하는 학습장소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주요 건축물들을 모두 둘러본 뒤 성 외곽을 한 바퀴 돌았다. 해미읍성 역시 담쟁이가 성 외곽을 감싸고 있어 성의 멋스러움을 더 해 주고 있었으며, 정문으로 빠져나와 오른쪽 외곽으로 돌면 순교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해미천 좌우 주변과 진둠벙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팔이 묶인 채 거꾸로 떨어뜨려져 생매장 당한 곳이다. 생매장시 천주교도들이 죽음에 앞서 예수마리아를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들은 주민들이 이곳을 여숫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모양성과의 또 다른 분위기를 가진 해미읍성을 빠져나와 공주 공산성에 도착했다.
공산성의 정문은 해미읍성의 아치형입구와 달리 네모났게 만들어져 있다. 양 옆과 천장을 어떻게 쌓았는지 반듯함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정문을 통과하면 왼편에 해설사가 있는 사무실이 한 채 있으며 정시마다 해설을 해주고 있다. 또 수문병교대식도 함께 하는데 매년 4월 출정식을 시작으로 10월 말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수문병 출정식은 행사 개시 프로그램으로 백제의 왕에게 수문장이 사열과 분열을 실시한 후 근무병의 출정을 고하는 의식이다.이 외의 행사로는 백제 왕·왕비 체험, 백제 장군·병사 체험, 백제 의상 체험, 백제 문양 탁본 체험 등이 있다. 이런 행사는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끼리 와서 체험해 보아도 아깝지 않은 경험이 될 것 같다.
수문병 출정식이 끝난 후 보도블럭이 놓여진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가면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마주서고 있다. 모양성 못지않게 시원함을 가져다주는 나뭇가지에는 자연을 사랑하자는 푯말이 아기자기한 그림과 함께 걸려있다. 보도블럭을 중심으로 대부분 오른쪽에 건축물들이 곳곳에 숨어있어 숨바꼭질을 하는 듯 건축물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공산성은 백제 문주왕 원년(475)에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후 성왕(聖王) 16년(538) 부여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5대 64년간 웅진시대의 방어거점이었던 산성이다.
공산성은 웅진성, 쌍수산성, 공산산성, 공주산성 등 여러 이름이 있어 시대적인 변천을 알 수 있다. 웅진성이란 백제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까지 공주가 웅진으로 불릴 때의 이름이며, 그 후 고려 초기 전국적으로 난을 피하여 인조(仁祖)가 공주에 파천한 이후로 왕에게 쌍수의 이름을 받아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고 불렀다.
이 산성은 북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혜의 요새로서 동서로 약 800m, 남북으로 약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이며 원래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선조, 인조대에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개축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석축 산성(石築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인 세종 14년(1432) 이전에는 이미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듯하고, 선조 29년(1596), 선조 36년에 고친 기록이 있으니 대체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대대적으로 수리 보수한 듯하다. 현재도 일부는 토석 혼축(土石混築)으로 되어 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로 토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된다. 현재의 성벽은 높이 약 2.5m 너비 약 3m 대부분 보수되었고 성내 유적은 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쌍수정, 명국삼장비, 쌍수산성사적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임류각, 광복루 등이 남아 있다.
공산성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공산성진남루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으로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석축성으로 고쳐 세운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다. 진남루도 그 때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제하여 원래대로 복원했다. ▲쌍수정 공산성 진남루 서쪽에 있으며, 조선 영조 10년(1734)에 처음 세운 정자이다. 인조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이곳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서운 것이라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다 1970년에 전체적으로 해체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광복루 공산성 안에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의 문이었으나 광복 이후 8.15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라 불렀다. 광복루는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이라 불렀는데 1946년에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이 이곳에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고쳐 부르게 되었다. ▲공산성연지와 만하루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남쪽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 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었으나 1982년부터 1983년에 걸친 발굴조사결과 확인, 정비한 것이다.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지형의 조건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쌍수정사적비 조선 인조 2년(1624)에 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성에 머물렀던 장소에 사실을 기록하여 숙종 34년(1708)에 석비를 건립하였다. 이괄의 반란과 인조의 남천에 대한 내력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10동안의 행적, 그리고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있다. ▲명국삼장비 비석은 선조 37년(1655)에 건립된 것이며, 3개의 비석으로 되어 있다. 삼장비의 내용은 “명나라의 3장수는 정유년 이듬해인 선조31년 가을 공주에 이르러 군기를 엄히 다스리는 한편 주민들을 정성껏 보살펴, 공주민은 왜구의 위협에도 안전할 수 있었고 임진년에 비로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북루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금서루 공산성의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이다.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등의 문헌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임류각 백제가 공주로 천도한 후, 약 25년이 지난 백제 제 24대 동성왕 22년(500)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아있는 건물이다. 1980년의 조사에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건물의 문화적, 학술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본래의 유지에서 약간 위쪽에 새로이 복원되어 있다. ▲영동루 공산성 4개의 성문 중 동쪽에 설치된 문이다.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 하부구조를 확인 하였다. 성문의 너비는 2.5m였고 문옆 양쪽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문지석을 원래 모습대로 찾아내었다. 잊혀진 문루의 명칭을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영동루라고 지었다. ▲공산정 공산성 서북쪽 산마루에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철교(문화재 제232호)등 공주의전경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와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누각의 명칭은 유신대, 전망대등으로 불려오다가 2009년 시민 공모를 통해 공산정이라 지어졌다. ▲공산성 추정왕궁지 공산성 내 서쪽의 표고 85m의 정상부, 종래 쌍수정 광장으로 불려 왔던 약 6,800㎡의 면적이 추정 왕궁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980년에 조사된 임류각지에서 서쪽으로 왕궁이 입지할 수 있는 위치는 이곳 밖에 없다는 논거로 1985년부터 1986년에 걸쳐 조사되었다.
▲영은사 <공산지>에 의하면 조선 세조 4년(1458)에 지은 사찰이며 광해군 8년(1616)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두고 전국의 사찰을 통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영은사 내에는 주불전인 원통전과 강당인 관일루가 있다.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 위에는 보를 받치고 장식도 겸해 새 날개 형태의 부재를 짜맞춘 익공계의 맞배지붕을 하였다. 규모는 21m로 현재 건축물은 1933년 12월에 보수하였다.
길게 난 보도블럭 길을 따라 구석구석에 숨어있던 건축물들을 만나고 공주 시내와 금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을 돌았다. 모양성 보다 더 가파른 지형에 산성이 만들어져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날지 몰라 산성을 도는 내내 아슬아슬했다. 그 아슬아슬함 속에서도 산성을 끼고 도는 금강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이 났고, 산성의 푸른 모습과 한데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곳에는 인공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갔을 때에는 연못 속에 물이 없고 연못 깊은 바닥이 시멘트로 되어 있어 어떤 모습이었을까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원래 연못은 대접모양으로 자연석을 정연하게 쌓아 만들었는데 윗부분 지름이 7.3m, 바닥 지름이 4.78m, 깊이는 3m에 이른다고 한다.
백제가 475년에 한성에서 공주로 수도를 옮긴 직후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지 연못이다. 1985~1986년에 걸친 왕궁터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연못 안에서는 연꽃무늬, 만(卍)자 무늬 막새기와 벼루, 등잔, 삼족토기 등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그 아쉬운 부분을 또 다른 것이 채워주는 것일까? 공산성의 영은사는 아담하게 지어져 있어 오르막길에서 내려다보면 한적하고 여유로운 절의 모습이 돋보인다.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둘러본 공산성의 내부, 이 보다 더 좋은 산책길이 어디 있겠으며 이 보다 더 좋은 공원이 어디 있을까?
해미읍성과 공산성이 있는 충남을 빠져 나오면서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우리의 산성들이 남아 있어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은사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 가끔은 바람이 불때마다 영은사의 풍경을 떠올리면 도시 속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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