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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을 통해 재조명된 우리나라 석성의 역사와 가치 재발견 2 - 부산 금정산성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산성,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킨다.

2011년 07월 13일(수) 15:37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금정산성(金井山城)은 사적 215호(1971.2.9 지정)

↑↑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져 있는 서문.

ⓒ (주)고창신문



금정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성이다. 보통 우리가 산성이라고 하면 30~40분정도 주위를 둘러보면 끝나는 그러한 성곽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차를 타고 산속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10여분을 달리면 그 속에 면단위 규모의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산성 안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집과 식당, 슈퍼 그리고 펜션 등이 있다는 것이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광경에 갑자기 정신이 번뜩여 졌다.
얼마나 큰 성인건지 아니, 여기가 아니라 차를 타고 더 들어가야 우리가 찾던 금정산성이 나올꺼야를 연신 되뇌이며 10분여를 더 달렸을까? 우리 취재에 함께 참여해 주신 김태진 시도전 초대작가께서 이쯤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서문을 봐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어디에도 성의 문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김작가님을 따라가니 도로변에서 짧은 숲길을 헤쳐 들어가서야 서문이 나타났다. 등산로와 도로가 생기면서 문과 연결 되어 있던 성들이 없어지고 문의 흔적만 남아있었던 것이다.
금정산성은 언제 처음으로 성이 수축되었는지 문헌상으로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의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조선 숙종(肅宗) 29년에 국방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해상을 방어할 목적으로 축성된 것이라고 한다. 성은 내.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벽은 자연석으로 쌓았지만 중요한 부분은 가공한 무사석으로 쌓았으며 성의 길이는 17,336m이고, 산성의 높이는 1.5m~3m정도이며 서의 총 면적은 약 2,512,000평에 동,서,남,북의 네 성문을 둔 방대한 산성이었다고 한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독진의 수성장을 겸하고 있는 동래 부사가 맡았으며, 중군 승병장, 군기감, 도훈도군외, 문직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과 군병 등의 상비군이 파수하고 또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나 변난이 발생하면 동래, 양산, 기장의 세 읍 소속군과 세 읍 사찰의 승려들이 승군으로 차출되어 방어토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가지 계획의 이름 아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축이 철거 되었으며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성축도 민가가 점유하여 훼손당하고 망월사지를 중심으로 성곽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고 한다.
1972년부터 계속 성문과 성곽을 복원과 보수를 계속하여 국방유적으로 길이 남겨야 할 산성은 이로써 어느 정도의 면목을 유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이름은 동래산성이지만, 금정구로 분구가 되면서 금정산성이라 부르고 있으며, 금강공원에 있는 케이블카나 산성버스(온천장에서 203번)를 이용하여 정상에 올라간 뒤, 걸어서 10분쯤 가면 현재 4km 정도 남아 있는 성벽과 동서의 두 성문을 볼 수 있다. 산성이 있는 금정산은 1일 등산코스로도 많이 이용되며 금강공원과 북문쪽의 범어사도 함께 둘러보아야 할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찾은 서문(西門)은 계곡에 세워져 있었다.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진 것이 서문(西門)으로 낙동강에서 대천(大川)을 따라 금정산성마을로 오르면 마을 입구에 이 문이 자리하고 있다. 계곡에 세운 성문답게 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금정산성 동문과 서문은 사제지간인 스승과 제자가 경쟁적으로 세웠다고 한다. 동문을 스승이, 서문을 제자가 동시에 조성했고 그 결과 제자의 실력이 스승을 능가했다는 것이 당시 주민들의 공통된 판단이었다고 할 만큼 시원한 계곡물이 산성다리를 따라 흐르는 모습이 운치도 있으며, 왜군을 막기 위한 용도로 쌓아진 성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실제 전문가들은 서문은 동문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졌다고 말한다. 서문의 초루와 ㄷ자 꼴로 돌출한 성곽의 모습은 사뭇 예술적이고 또한 서문 바로 옆으로 흘러내리는 대천(일명 화명천)에는 세 개의 아치를 이룬 수문(水門)을 크고 묵직한 돌을 쌓아 만들어 두었다.
이 수문은 금정산성에서 유일한 것으로 그 위로 성곽이 통과하게끔 해 놓았다. 좌우편에 험준한 지형의 산이 솟아있어 천연요새인 협곡에 서문과 수문을 만들었던 선현들의 지혜를 이곳에서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다.
서문이 위치한 곳은 금정산성 성곽 1만7,337m 가운데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지점이다. 그러나 이 서문 좌측은 지형이 험준하여 등산로도 없는 석문(石門) 능선이며, 바른편은 역시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미치지 않는 파류봉과 연결되는 능선이다.
서문은 그 해발고도가 낮지만, 계곡을 끼고 적을 방어하기 아주 용이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산성마을 죽전 부락 맨 끝에서 다시 서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거리이다. 화명동의 낙동강 쪽에서 보면 금정산성마을의 관문이기도 하다.
자문가의 말에 따르면 금정산성 전체의 방위 개념으로 보면 이곳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낙동강 하구로 침입한 왜적들은 화명동에서 대천을 따라 이곳으로 공격로를 열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왜적들은 바다에서 바로 상륙하기도 하였지만, 다대포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구포에서 만덕동으로 몰려오거나, 화명동에서 대천의 계곡을 따라 오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어 소박한 모습의 남문(南門)도 찾았다. 금정산성 서문(西門)에서 대천(大川)의 상류를 끝까지 따라 오르면 남문(南門)에 닿게 된다. 이 남문은 동제봉(東帝峰)과 상계봉(上鷄峰)을 잇는 능선상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해 있다.
남문에서는 북쪽으로 고당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고, 남쪽으로는 백양산이 바로 건너다 보인다. 백양산과 남문 사이는 만덕고개와 만덕동이 자리한다. 지난날에는 유명한 만덕사(萬德寺)가 남문 남쪽방향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남문은 동문과 2.5km, 북문과 6.5km의 거리를 두고 있다. 또 이 남문에는 산성고개에서 도로가 이어져 있으며, 금정산 유일의 케이블카 종점과 600m 남짓한 거리여서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타고 찾는 사람들이 많다. 등산로도 만덕동과 상계봉 등에서 사통팔달로 열려 있다.
남문은 그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돋보였다. 언뜻 보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이 남문은 동문이나 서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신라(新羅)의 축조 기법이 깃들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현존 금정산성은 조선 숙종 29년(1703년)에 축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동래부지' 등의 공식 기록이지만, 신라의 기법이란 이야기가 왜 등장하는가에 대한 연유는 한번 눈 여겨 볼만하다.
'부산부사(釜山府史)'라는 일본어로 쓰여진 초고 제1권에 금정산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금정산성이 원래 신라시대로부터의 성이라는 사실은 이를 세밀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성의 4대문 가운데 동, 서, 양문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수한 흔적이 완연하나 남, 북 양 문의 결구(結構)는 개수의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수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문의 내외에 둔병(屯兵)의 사타의 양식이 신라 특유의 축성기법인 반원형 층 단으로 세 겹, 다섯 겹으로 되었다.'
이 사실을 지적한 '금정산성 전돈대지 발굴조사개보'는 그러한 '정확한 사타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불명하기 때문에' 금정산성의 신라 축성설 제창의 특유기법을 지금의 남, 북 양 문에서 찾기란 쉽지가 않다고 하였다. 전문 학자들도 불명이라는데, 일반 사람들이야 더욱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치형의 동문(東門)은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00m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성문은 금정산성을 굳게 지키는 역할 못지않게 전망이 뛰어나 망루로서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정묘년(순조 7년, 1807년) 추계(秋季)에 이르러 토목공사를 잇달아 일으켜 한 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쏟아졌을지 짐작이 갔다. 이듬해 정월에는 기둥과 들보를 백 리 밖에서 운반하고, 벼랑에서 낭떠러지를 깎아내는데 메고 끄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 만(萬) 사람이 힘을 일제히 쓰니 149일만에 서, 남, 북문의 초루(성문 위의 누각)가 완성되었다.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금정산성 증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설비문의 일부이다. 그 자신이 글을 짓고 썼다고 하니, 이것이 동문을 다시 세운 공식 기록인 셈일 것이다.
동문은 동래읍성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한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따르면 이 동문은 1807년 음력 10월에 준공한 것이 된다고 한다. 특히 동문과 성첩(城堞)은 동래읍민이 일을 맡았고, 나머지 서, 남, 북문과 성곽은 경상감영의 71개 주(州)에서 차출한 민정(民丁)의 부역으로 이룩했다고 한다.
현재의 동문은 지금으로부터 188년 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세운 그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지배를 받을 때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던 이 성과 성문, 군관아시설이 일제의 만행으로 파괴되어 크게 훼손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투박하고 거친 북문(北門) 금정산성 북문(北門)은 범어사에서 서쪽으로 1.6km,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의 남쪽 0.9km 지점에 있다.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려는 잘록한 안부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친 모습이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직사각형의 석문에 누각과 성곽을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세운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이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금정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금정산성은 임진란의 혹독한 피해를 입은 동래 부민들이 난리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은 피란겸 항전성이다. 임진란에 있어서 동래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고을에 비할 수 없이 중요했다. 나라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난리의 발생과 함께 적의 첫 상륙지점으로 제일 먼저 전화(戰禍)를 나누고 굳센 항전을 전개한 곳이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또 난리의 장기화에 따라 적의 교두보로서 오랜 수난이 계속된 곳이기도 하다.'(금정산성 전돈대지 발굴조사개보)
이런 상황에서 축성한 금정산성의 성문이라면 미적(美的) 감각을 동원할 수 있는 겨를이 없었음이 오히려 당연하다. 투박하고 거칠며 모양새가 없는 북문에서 금정산성의 실체를 아주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북문은 복원 작업도 다른 성문들에 밀려 부산시가 가장 뒤늦게 하였다.
김작가님은 우리나라 성중에 금정산성이 선조들의 지혜가 가장 많이 담겨있는 성이라고 말씀하신다. 동쪽과 북쪽의 지형은 거의 암벽으로 둘러져 있는데 이런 지형을 잘 활용하여 산성을 쌓았다고 한다.

금정산성의 마을

부산의 명소인 금정구 금성동에 자리잡은 금정산성마을은 일찍이 부산시민 뿐만 아니라,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도 친근한 곳이다.
부산의 명산으로 불리는 금정산(金井山) 해발 400m의 분지에 아담히 자리잡은 산성마을로 해발 500~600m 높이의 금정산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고지대라 기후가 차가와 부산의 평지보다 2~3℃가 낮고 계절도 15일 정도의 차가 있다.
마을의 면적은 7.45㎦로 금정구에서 제일 큰 동이다. 인구는 약 2,000명이며, 세대수로는 435세대 3개통 10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성동의 행정관리를 위한 금성동사무소와 유일한 교육시설로 전교생이 백여 명도 채 안되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금성초등학교가 소재하고 있다. 그리고 도요지 두 곳과 전국에 이름난 산성막걸리 제조회사(유한회사 금정산성토산주)가 제조업소의 전부이며, 123곳의 주류 및 음식업소 등 단순한 산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금정산성마을은 90% 이상이 녹지로 부산시에서 20여 년 가까이 유원지 예정지로 묶어 놓고 개발을 제한하고 있어 주민들의 재산권행사 등에 막대한 불편을 주고 있는 등 주거환경이 열악한 실정이다.
하지만 공기 좋고 물 맑은 수려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휴일이면 이곳을 찾는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금성동 주민들이 유일한 생계수단으로 경영하는 음식점에서는 부산시 지정 음식인 30년 전통의 흑염소불고기와 전국적으로 이름 난 부산지역 특산물인 "산성토산주"로 불리는 막걸리 등의 음식들이 있어 가족나들이 장소로도 많이 이용된다.



금정산성 마을의 풍수

금정산의 지기를 가장 밀접하게 받는 지인상관설의 마을이라면 당연히 금정산성마을이다.
금정산성마을의 풍수형국은 젊은 여자인 옥녀(玉女)가 받쳐 든 소반 위에 차려진 풍수마을로서, 금정의 지인상관설에 의하면 소반은 바로 금반(金盤)이 됨에 옥녀금반형(玉女金盤形)을 이루고 있다. 이는 어느 누가 보아도 옥녀금반형임을 알 수 있으나 문제는 옥녀의 형상인 옥녀봉은 어딜 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옥녀의 기 감응은 확연히 뿜어져 나오고 있다.
보통 관상을 볼 때, 기가 센 사람에겐 눈을 감으라 한다. 이는 눈의 강렬함이 얼굴의 상을 감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성마을에서 가장 강렬한 산기를 내뿜는 봉우리인 파리봉이 없다는 가상(假想)을 하고서 산성 마을의 관산(官山)을 시작해 보았다. 하나 옥녀의 치마폭처럼 주위의 산들은 부드러웠으나 옥녀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산성풍수로 지인상관설에 접근해 보기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산성풍수의 중심을 밝혀야 한다. 금성동은 죽전, 중리, 공해라는 자연부락 3개가 모여 이루어져 있는 곳이다. 어느 곳이 금정산성마을의 풍수 중심점이 되는지는 선조들이 붙인 자연부락 지명으로 밝힐 수도 있다. 금정산성마을 산 너머에는 두구동이 있다. 두구동에도 죽전마을이 있는데 금정산성마을과 같이 표기도 ‘竹田’이다. 게다가 둘 다 죽전마을 옆에 중리(中里)라는 마을을 두고 있다. 그러면 중리가 두 마을의 풍수 중심점이 될까. 그렇치 않다. 십이오리(十里五里)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중리란 중간쯤 떨어진 곳이란 표현이 된다. 해서 중리 옆에 붙은 마을이 바로 풍수 중심점이 된다. 두구동에서 중리 다음 마을은 대두마을이다. 대두란 ‘우두머리’라는 뜻을 갖는다. 대두마을은 현재 두구동의 행정 중심지이기도 하다. 금정산성마을의 중리 다음은 공해마을이다. 공해(公邂)란 관아(官아)를 칭하므로 예부터 이곳은 관아가 들어선 금정산성의 중심이기도 하다.
산성풍수의 중심은 공해마을이다. 풍수에 의하면 중심(공해)의 배후에는 의당 진산(鎭山:음택에서는 主山이 된다)이 있으며, 보통 15도 안에(30도범위) 있어야 한다. 이는 그곳에 옥녀의 비밀이 있음을 가리킴도 된다. 그리하여 금정산성의 공해마을 뒤편 즉 남문 부근을 집중적으로 탐문해 보았다.
남문 근처에는 생기산(生氣山)이 있다. 하나 생기산은 옥녀봉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생기(生氣)가 일어난다는 뜻에서 풍수상의 기세(氣勢)를 칭 할 뿐이다. 옥녀의 자태는 보이지 않고 치마폭을 이룬 산들로 둘러싸인 산성의 풍수. 그럴수록 옥녀의 살내음은 더욱 강하게 풍겨져 왔다. 한데 『생기산 아래쪽에 꼭 닮은 그러니까 이상한 형상의 바위가 하나 있는데 공알(宮) 바위로서 자궁과 같아 볼 때마다 야릇하다 』는 얘기가 들렸다. 당장 현장으로 가보니 역시 그러했다. 여근(女根) 아래로는 물줄기마저 흐르는데 공해마을을 우측으로 끼고 도는 원류가 됨에 음수마저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금정산성마을의 옥녀는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누워있는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제 풍수발복은 물의 문제로 좌우된다. 지인상관설에 따르면 이곳 주변의 자연경관이 파손되거나 물이 흐리면 음탕해지고 남자 자손들에게는 정신박약자가 태어나지만, 이를 잘 관리하면 자손이 번창하고 재자가인, 관인기인, 정치가 같은 인물들이 태어난다고 한다.

금정산성 마을의 유래

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인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으로 금성동(金城洞)의 명칭은 금정산성 안의 동네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라는 흔적은 있으나, 오늘날의 성은 조선시대 축성 논의에 따라 축성되었다.
효종 때 동래부사 임의백(任義伯)이 금정산에 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고, 현종 8년(1667)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 왜구를 방어할 책략을 지시하였다
그 후 숙종 27년(1701)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상계(上啓)하자 숙종이 동의하면서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동의를 얻은 조태동은 동래부사 박태항(朴太恒)에게 공사를 주관하도록 하여 본격적으로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금성동은 죽전(竹田).중리(中里).공해의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며 산성 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때부터 화전민과 승려들이 거주하다가 금정산성이 축조된 뒤에 현재의 마을들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동래부지(1740)』에는 산성리로 불렸으며, 조선 중기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고 말기에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 속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동래군 서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일제 때도 부산부 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다시 1918년에는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행정관할이 옮겨다녔다. 1963년 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부산시에 편입되어 진구 금성동이라 하였으나,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자 이의 관할 하에 두었으며, 1988년 금정구의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1872년 지방지도에 의하여 지금의 부산교육원 자리에 아문리(亞門里)라는 마을이 존재함이 증명되었다. 금정산성 안에 있는 산성리(山城里)는 영조 16년(1740)에 편찬된 <동래부지> 각면각리원근정도조에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거리는 18리(里)라 하였고, 순조 32년(1832년)에 나온 <동래부읍지> 방리조에는 동래부 북면의 마을로 관문으로부터 20리 거리라 하였다.
1914년의 부군(府郡) 폐합 때 산성리를 금성리(金城里)로 개칭한 듯하다. 이는 1899년에 발간된 <동래부읍지> 방리조에 ‘北面 山城里 距官門十八里’라 기록된 것이 1937년에 발간된 <동래군지(東萊郡誌)> 읍면동리조에는 구포면 금성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뒤 이 산성마을은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아래와 같이 편입되었다.

▶ 1943년 10월 1일 경상남도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
▶ 1963년 1월 1일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금성동
▶ 1978년 2월 15일 부산직할시 동래구 금성동
▶ 1988년 1월 1일 부산직할시 금정구 금성동
▶ 현재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마을의 위치

금정산성마을의 위치를 보면 동경 129도2분 - 129도3분, 북위 35도13분 - 35도17분 사이에 있으며, 북쪽 끝에는 금정산(801.5m), 남쪽 끝에는 상계봉(638.2m)이 있다. 산성의 동문 표고(標高)는 410m, 남문표고는 510m, 서문 표고는 230m, 북문 표고는 580m로 되어 있어 서문 쪽 지대가 다른 성문에 비해 낮다.
그래서 1960년 전만 하여도 이 마을 주민들은 서문을 통해 구포시장(3일, 8일 개시)으로 가서 생활 필수품을 구입해 왔기 때문에, 그때는 동래 지방보다도 구포 지방과의 접촉이 잦았다고 한다.
이곳 금성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 국(鞠)씨와 두(杜)씨 성씨를 가진 두 가족이 이 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이곳의 전 마을사람들이 왜군에 납치되어 가서, 한동안 마을이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양산 철마에 살던 장사(壯士)인 김해김씨가 이주해 오면서 다시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누룩생산이 유명했으며, 물맛 또한 유명하였다 한다. 동래부사가 한 모금의 산성물은 마시기 위하여 자주 이곳 금정산성마을 찾았다고 한다. 부사가 즐겨 마시던 샘물은 1960년까지만 해도 동문을 들어서서 40m 되는 지점에 있었다. 지금은 매워지고 없어졌으나 그 자리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되어 물이 고여있다.
산성토산주는 조선시대 산성주변에 살던 화전민들인 국(鞠)씨와 두(杜)씨가 이 마을에서 처음 술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산성토산주의 역사는 누룩을 만들어 생계로 삼아 온데서 유래한 것으로 족히 450여 년은 된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때는 고유의 맛을 지닌 이 막걸리가 더욱 알려져, 금정산성에서 누룩을 많이 만들고 적게 만드는 차이에 따라 부산.동래지방과 경남 일원의 쌀값이 올랐다 내렸다 할 정도였다고 한다.

* 본 기획물은 지역신문 발전위원회의 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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