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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을 통해 재조명된 우리나라 석상의 역사와 가치 재발견 ③-부산 ‘진주성’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성한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 깊은 성

2011년 07월 22일(금) 15:33 [(주)고창신문]

 

↑↑ 촉석루

ⓒ (주)고창신문


촉석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제일의 명승.

↑↑ 진주성 서장대

ⓒ (주)고창신문


서장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진주성 서문의 지휘소. 지금의 서장대는 1934년 독지가 서상필씨가 중건 한 것.

↑↑ 진주성 호국의 종

ⓒ (주)고창신문


호국의 종(종신 2.7m,지름 1.7m) 진주성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가 문화재 육성기금으로 1980년에 제작한 범종

진주성은 외적을 막기 위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성한 성으로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깃든 유서깊은 곳이다. 고려말 우왕 5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잦은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여 본래 토성이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임진왜란 직후에는 성의 중앙에 남북으로 내성을 쌓았다.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3,800여 명의 군사와 성민이 힘을 합쳐 물리쳤으니 이것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이다.
이듬해 6월에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해 옴에 7만 민.관.군이 이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일제강점기에 허물어졌던 서쪽 외성의 일부와 내성의 성곽을 복원하였다. 1979년부터는 성 안팎의 민가를 모두 철거사는 등 진주성 정화사업을 시작해 2002년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직막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높이는 5~8m이며 성 안에는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창렬사, 호국사, 서장대, 임진대첩계사순의단, 국립진주박물관 등이 있다.
진주성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일명 촉석성(矗石城)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 때의 거열성지(居烈城址)였다고 하며,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때 7차례 중수되고 왜구 방비의 기지로 사용되었다. 내성의 둘레1.7km, 외성의 둘레 약 4km이다.
임진왜란 때는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왜군을 대파하여 임란3대첩(壬亂三大捷) 중의 하나가 벌어진 곳이며, 1593년 6월 왜군의 재침시에는 군관민 6만이 최후까지 항쟁, 장렬한 최후를 마쳤으며, 이때 논개(論介)는 적장을 안고 남강(南江)에 투신하였다.
기록에 보면 1605년(선조 38)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진(鎭)을 성내로 옮기고 성이 너무 넓어 수비가 곤란하다 하여 내성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성은 자연 촉석루를 중심한 현 진주공원 일대의 외성과 현재의 성내동(城內洞) 주변 내성의 둘로 나눠지게 되었다. 그뒤 병사 김태허(金太虛)가 1607년 포루(砲樓) 12개를 증축하였고, 18년(광해군 10) 병사 남이흥(南以興)이 성 수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금의 진주성은 대략 이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주성의 의미를 되새기며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진주성은 진주의 중심답게 아주 잘 가꾸어 놓은 모습이다. 수목도 그러하고 잔디도 아주 잘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진주성 내부도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찾기도 어렵지 않다.
진주의 가장 유명한 곳은 촉석루 이다. 촉석루 내에는 논개의 대표적인 두 곳 의암과 의기사가 있다. 의암은 촉석루에서 남강쪽으로 내려가면 볼 수 있었는데 의암 아래에는 바로 바다가 있어 사진 찍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넓은 바다를 보며 논개의 당시 상황을 상상하며 마음을 헤아리고 있을때 쯤 같이 간 일행들이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되돌아와 촉석루로 향하였다.
촉석루에서 의기사를 볼 수 있었는데 이곳은 바로 논개를 모셔놓은 곳이었다.
촉석루에서 나와 조금 더 걸으면 큰 종을 볼 수 있는데 이종의 이름이 호국의 종이다. 겉보기에도 오래돼 보이지 않는 이종은 1980년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촉석루에 올라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다시 내려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촉석루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자, 영남제일의 명승이다. 전시에는 장졸을 지휘하던 지휘소로, 평시에는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고려 고종 28년(1241년)창건된 이래 수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광해군 10년(1618년), 전보다 웅장한 건물로 중건하여 1948년 국보로 지정된 바 있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다시 불탔으며, 지금의 건물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중건하였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누대로 촉석루란 이름은 강가운데 돌이 우뚝 솟아 있다하여 붙인 이름이며 남장대 또는 장원루라 부르기도 한다.

▲의암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 위험한 바위라 하여 위암이라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후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기 위하여 의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의기사(논개사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임진왜란 당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으로, 영조 16년에 경상우 병사 남덕하가 창건하였으며, 지금의 의기사는 의기창렬회가 시민의 성금을 모아 재건한 것이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임진년(1592년)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높이 받들고, 계사는(1593년)에 순국하신 7만 민.관.군의 충혼을 위령하기 위하여 1987년에 국란극복의 표상으로 건립하였다.

▲김시민장군 전공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1호)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대첩에서 6일간의 혈투 끝에 왜군을 격퇴하고 순절한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석이다.

▲호국의 종
진주성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진주시가 문화재육성기금으로 1980년에 제작한 범종으로 종신에는 각종 문양이 부조되어 있고, 이은상 시인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촉석정충단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2호) 임진왜란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 김천일, 황진, 최경회 및 7만 민.관.군의 충의를 새긴 비로서, 조선 숙종 12년(1686년)에 세웠다.

▲쌍충사적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 순국한 제말장군과 정유재란때 전사한 그의 조카 제홍록 장군의 충의를 새긴 비석이다.

▲서장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호) 진주성 서문의 지휘소이다. 여지도서에 보면 회룡루로 나오는데 규모는 작았으나 촉석루와 같이 다락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서장대는 1934년 독지가 서상필씨가 중건한 것이다.


논개( ?~1593년)
논개는, 정조있는 여성 중 대표적으로 꼽힌다.
논개는 원래 양반가 출신이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집안이 몰락 위기에 처하자 최경회의 후처, 즉 첩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후 최경회가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열심히 싸우다가 전사하게 된다.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기생들을 데리고 축석루에서 연회를 벌이는데, 이 때 논개는 지아비인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연회에 참석한다.
논개는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왜장을 꾀어 함께 남강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 후 논개가 왜장과 올라갔던 바위는 의암으로 칭하게 되었다.
구전돼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자화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면서부터이며, 그녀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岩)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논개의 충성심은 이미 의심할 바 없었는데도 일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편견을 내세워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논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의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의기 논개가 공식적인 호칭이 된 때는 경종 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이후이다. 이후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고, 매년 논개추모제가 성대히 치러지게 되었다.

논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은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일명 장계) 주촌(朱村)마을이다. 이곳에 논개의 생가가 복원돼 있으며, 장수읍 두산리에 의암사(義巖祠)라는 논개사당과 논개의 수명비(竪名碑)가 세워져 있다. 한편, 논개의 묘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의 당산 뒤편 골짜기에 있다. 최근 사적지로 지정되어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었다.

장수와 함양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논개의 일생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열네 살 나던 해인 1587년,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천하 건달인 숙부가 토호인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가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는데, 김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이를 알려 심문을 받게 하였다. 논개 모녀로부터 전말을 들은 최경회는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며 병약한 최씨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를 소실로 맞이할 것을 권유한 뒤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이렇게 해서 논개가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길을 떠났는데,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 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장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건져 고향땅에 장사 지낼 요량으로 운구해오다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다.

논개의 생애

남해안 임진왜란 전적지를 찾아서

1) 출생지와 가문

전라도 지역의 역사서들은 논개를 장수군 태생임을 강조하였다. 1846년 조정은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현에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논개의 출생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계내면 대곡리 주촌이 유력해 보인다.

논개의 가문에 대한 것은 지역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구전되어 오던 것이 최근 공개되었다. 즉 논개의 성은 朱氏이며, 본관은 신안이다. 부는 주달문, 모는 함양박씨, 숙부는 주달무라 한다. 주달문은 한학에 밝았고, 향리에서 청년 자제들의 훈학에 종사한 선비였다고 한다. 따라서 논개는 천한 신분이 아닌 양가여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논개의 출생 연월 일시가 1574년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사갑술이었으므로 술은 개 戌이라서 '놓은 개(낳은 개)'라 하여 '논개'라 이름하였다 한다.

2) 논개의 애인은 누구였는가.

논개의 애인은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전사한 충청 부사 황진과 우병사 최경회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황진설은 장지연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는데, 그 이유는 황진이 장수 황씨로 남원부 주포리 산내촌에서 태어나 1593년 충청 병사가 되었다가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런데 황진은 본관이 장수라는 것과 장수와 인접한 남원 출생이라는 점 외에 장수와 인연을 맺은 적이 없다.
최경회설은 논개가 진주로 가게된 동기를 최경회의 사랑을 받아서 최경회가 진주성에 입성하자 이를 따라 들어간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최경회와 논개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에 대해서도 최근에는 최경회가 장수현감 시절 논개의 송사 사건 해결과 관련을 지우고 있다. 논개의 숙부가 논개를 인근의 김씨 문중의 민며느리로 팔아버리자 함양 안의현 외가로 도망했다가 붙잡혀 송사에 연루되었으나 최경회에 의해 진실이 밝혀지고, 돌아갈 곳 없는 논개의 모녀를 최경회가 데리고 있으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것으로 민간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최경회의 장수 부임 시기를 1589년으로 보아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역사서에 의해 증명되는 최경회의 장수 부임 시기는 1577년경 이어서 시기 차이가 크다. 따라서 최경회와 논개의 관계는 최경회가 진주성에 입성한 1593년 4월부터 6월 사이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3) 논개가 끌어안고 죽었던 왜장은 누구인가.

대체적인 견해는 가등청정의 부하로 조선에 건너와 진주성 공격의 선봉대장이었던 '毛谷村六助'라 한다. 이는 일본에서 유명했던 검객으로서 적국 미녀의 손에 죽었다는 이유로 무덤이 없었으며, 1974년 九州의 유지들이 건축사 上塚博勇을 파견하여 진주의 흙을 가져다가 九州英彦山麓에 무덤을 만들었다 한다.

4) 논개와 의암 바위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란 글씨는 정대융의 글씨라 전해진다. 정대융은 임란시 함경도 의병장이던 정문부의 차자로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던 선비였다. 인조 2년 1월 정문부가 무고로 피해되자, 그의 유명에 따라 형 정대영과 함께 다음 해 진주로 이거하였다. 따라서 의암이라는 글씨를 쓴 것은 인조 3년(1625) 이후이다. 그리고 효종 2년(1651)에 오두인이 의암이 쓰여진 바위를 보고 「義巖記」를 쓰는 것으로 봐 1625년에서 1651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즉 논개가 순국하고 난 30여년 후에 의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논개의 순국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논개의 순국사실이 진주 지역민들에 의해 확고한 사실로 인식되어졌음을 증명해 준다.

5) 논개의 무덤은 어디 있는가.

최근에 논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하여 논란이 많은데, 발견된 곳은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이다. 함양 지역에는 조선 후기 이후 신안 주씨들이 유력 양반 사족으로서 상당한 지역적 기반을 가진 문중이었다. 그리고 서상면 방지리는 논개의 부모가 일시 웅거했다고 전해지는 지역이다. 그리고 논개의 출생지인 주촌마을과 고개를 넘어 왕래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그 타당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6) 논개의 순국 사실은 어떻게 증명되었는가.

논개의 치적에 대해서 진주민들은 입으로 전하였지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경종 원년(1721) 경상우병사로 부임한 최진한이 진주 지역의 士民들의 요구로 ≪어우야담≫과 '義巖'이라 새겨진 글자를 근거로 논개에 대한 포상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이때 당(唐)의 왕씨 여인을 숭의부인에 봉했듯이 논개도 이에 상응하는 봉작을 베풀고, 진주성 함락시 전몰한 제신들과 같이 사당을 건립하고, 왕이 사액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1722년 비변사로부터 논개의 순국사실이 담긴 문적을 조사 보고하라는 지시에 따라 公金과 사전을 공동으로 염출해서 「義巖事蹟碑銘」을 건립했다. 이 비명의 내용을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이에 정부는 논개의 순국사실을 인정하고 논개의 자손에게 포상하기 위해 이들을 찾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논개의 자손을 찾을 수 없어 결국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최진한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지만 계속해서 논개 포상을 요구하였지만 성과는 없었다.
논개 포상 건의는 영조 14년(1738) 남덕하가 경상우병사로 부임하면서 계속되었다.
진주민들의 요구는 모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영조 16년(1740) 6월에 義妓祠 건립을 허가 받았다. 의기사는 그 후 정조 3년(1779)에 우병사 홍화보가 처음으로 보수하였고 정약용이 논개를 추모하는 「矗石樓懷古詩」, 「晉州義妓祠記」를 지었다. 그후 의기사는 퇴락했고, 다시 순조 23년(1823) 목사 홍백순과 경상감사 이지연이 중건했다.
이때 그동안 지내왔던 6월 29일제를 폐지하고 춘추상제를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고종 5년(1868)에 목사 정현석이 춘추상제와 별도로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하여 의암별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가무를 곁들인 의암별제는 300명의 女妓가 연 삼일간 치제하는 화려한 대제전이었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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