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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을 통해 재조명된 우리나라 석성의 역사와 가치 재발견 4 - 여주 ' 파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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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럽고 소박하며 웅대한 자연의 힘을 담은 파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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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7월 29일(금) 11:44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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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여주 파사산성
지 정 - 사적 251호 위 치 -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장마가 끝나자 그 동안 방안에만 갇혀 안절부절 못하던 햇님이 오늘은 새벽부터 길을 나선 참이었다. 45억 6720만살이나 된 햇님은 여전히 젊은 기운 팔팔한 기세로 오랜 내공 수련의 힘을 보여주는 듯 하다. 푸른 하늘 아래 입체감있게 흐르는 구름조차 오랜만에 집을 나선 햇님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북쪽으로 비껴흐른다. 도로 옆 어디라도 눈만 돌리면 절정에 오른 짙푸른 녹음과 그 초록 바탕위에 보색으로 수놓인 능소화, 자귀, 백일홍에 질세라 언덕 가득 풍성한 노란 들꽃까지 어우러져 여름은 화려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파사산성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호남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를 달려 이천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에 잇닿은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 집 같은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중부 내륙선은 내비게이션 정보에도 없는 모양이어서 네비게이션 화면에 우리 자동차는 도로가 아닌 산야와 강을 건너는 수륙양용의 전차처럼 달리고 있었다. 여주 휴게소를 나서자마자 길은 충주로 가는 길과 양평으로 가는 길로 나뉘어 서로 손짓하고 있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충주가는 길을 비켜서 왼편의 양평가는 도로로 접어들었다. 이정표도 채 완성되지 않은 도로라 이용하는 차들도 드물어 도로는 온통 우리 차지였다. 출산률이 자꾸 낮아지고는 있다지만, 아직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 이렇듯 마음놓고 운전할 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몇 번이나 올까? 하는 생각에 잠시 신이 났다. 15분쯤 달렸을까 북여주 톨게이트가 고속도로의 끝을 알려주고 있었고 갑자기 후두둑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북여주 톨게이트를 나와 이포대교 쪽으로 우회전하여 달리는 도로의 갓길에는 참외를 주로하여 토마토, 옥수수를 파는 가게가 50m가 멀다하고 늘어서 있었다. 아마도 여주엔 참외가 많이 나는 모양이었다. 파사성 가는 길목엔 세종대왕릉을 비롯한 명성황후 생가 등 왕실유적지가 많아 조선 도읍지 한양을 지척에 두고 있었던 여주의 지리적 여건을 말해주는 듯 하였다. 여주에 왔으니 오늘의 우리 문화를 존재하게 한 위대한 대왕릉에 먼저 참배하고 싶었으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촘촘한 일정을 이해해 주시리라 용서를 청하며 파사성으로 향했다. 남한강을 건너는 이포대교로 가는 길은 흐르는 하얀 물길이 초록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이었다. 이름모를 지류에는 군데군데 퇴적된 모래위에 흑로와 백로가 양반이 밥상을 받듯 그리 급할 것 없는 먹이활동을 하며 유유자적한 물길을 희롱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수많은 막국수집들이 촌락을 형성하여 배고픈 방문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달려온 피곤한 자동차들은 주차장 가득 늘어선 채 잠시 조는 듯 하였다. 이포대교에서 양평 방향으로 200m쯤 달리자 대신면 천서리 마을 인근에 4대강 사업의 일환으로 수문 물막이 공사가 한창인 도로 옆에 파사산성 방문객을 위한 주차시설이 있었다.
경기도 여주 천서리 파사산성은 사적 제251호로 남한강 동쪽 파사산의 능선을 따라 돌로 쌓은 성으로 신라 5대 파사왕(재위 80-112)때 쌓았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정상이 해발 250m로 낮고 도로에서 가까워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다. 우리가 출발할 때 산악오토바이 한 대가 같이 출발하였는데, 우리가 100m도 오르기 전에 그 산악오토바이는 벌써 내려오고 있었다. 산 길 옆 계곡으로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를 친구삼아 녹음 짙은 그늘로 몸을 숨기며 쉬엄 쉬엄 오르다보면 어느덧 세월에 닳고 닳아 편안해진 얼굴의 돌성벽이 여름의 분장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이렇듯 몸을 낮추어 누구나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파사산성이지만, 삼국시대 혹은 그 이전에 축성되어 줄잡아 200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아득한 날부터 전설을 켜켜이 품고 있는 역사깊은 성이다.
옛날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하였는데, 남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중국에 다녀오고 여장군은 파사산성을 쌓는 내기였다고 한다. 개군면 석장리에 가서 치마폭에 돌을 담아오던 여장군이 성을 다 쌓기도 전에 남장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치마폭이 찢어지면서 돌이 떨어져 마을에 돌담이 만들어졌고 여장군이 내기에서 지면서 파사산성은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2000년 6월 파사산성을 발굴조사한 경기문화재단(기전문화재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동문지에서 6~7세기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 진흥왕시기의 굽다리접시류(단각고배류)가 발견되었고, 부족국가시대에서 발견되는 무늬 없는 토기와 무늬 있는 타날문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신라보다 빠른 원삼국시대에 파사산성을 쌓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파사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우리나라 성곽의 역사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낮지만 급경사를 이루는 산을 올라 파사산성 위에 올라서면 여주, 이천, 양평이 한 눈에 들어오고 발아래 남한강이 굽이 굽이 펼쳐져 있을 뿐 아니라 천서리 일대가 곡창지대임을 생각해 볼 때 군량확보에도 유리하여 뛰어난 요새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유성룡의 건의에 따라 총섭 의엄이 승군을 동원하여 3년 동안 옹성과 장대, 군기소까지 갖춘 성으로 수축(修築)하였다고 한다.
성벽 형태는 정상에서 좌우로 완만한 경사를 타고 내려가다가 가장 낮은 계곡에 남문지가 있다. 문지입구 좌우에는 잘 다듬어진 고주형의 주춧돌이 1개씩 남아 있었으나 우측 것은 현재 사라지고 왼쪽에 문루의 기둥으로 보이는 8각기둥만 보존되어 있고 남문에서 좌측 20m 거리 회절부 하단부에는 신라의 축법이 고스란히 보존된 성벽이 있다.
산성 가장 높은 곳에는 장대가 있는데, 장대아래 성벽도 예스럽게 남아 있다. 남문지에서 장대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인데 이 구간의 성벽은 파사산성 성벽 중 가장 긴 구간으로 성벽의 높이도 5m 전후로 안과 밖을 동시에 쌓아올렸다. 이 구간은 완전하게 복원된 상태이다.
남문에서 동문구간의 성벽은 드문드문 파괴된 상태로 이어지다가 동문지에서는 성문 밖으로 ㄱ자 모양의 옹성을 설치했다. 이곳에서 장대까지는 가파른 지형인데 현재 성벽복원공사가 진행 중 이다. 파사산성 성벽 복원과 보수는 무너진 성 돌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타 지역의 복원보다 훌륭한 편이다. 성벽이 끝나는 지점외부에 치성의 형태가 보이는데, 남문지 아래와 동남쪽 치성 아래쪽으로 무너진 성 돌이 널려 있어 이곳에 외성이 있지 않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산성의 둘레는 문헌에는 1800m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1000m 남짓하다. 1999년부터 보수공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꽤 오랜 세월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눈 아래로 사방의 풍경이 펼쳐진다. 성벽 어디에서도 남한강의 물줄기가 한 눈에 굽어보여 탁 트인 평야에 은색으로 굽이치는 물길이 온갖 시름을 잊게 한다. 또한 이곳은 일출 일몰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산성으로 취재 중 만난 천서리의 류석환씨는 해마다 1월 1일에 이곳에 와서 새해맞이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혜의 절경에 반해 고려 말 이색 선생과 조선 선조 때 영의정 유성룡 선생은 파사성 위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치를 시로 남겼다.
파사성(婆娑城)
-류성룡(柳成龍) (1542~1607)
婆娑城上草芊芊(파사성상초천천) 파사성 위에는 풀이 무성하고
婆娑城下水縈廻(파사성하수영회)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둥글 굽어 돈다.
春風日日吹不斷(춘풍일일취불단) 봄바람 날마다 끊임없이 불어오고
落紅無數飛城隈(락홍무수비성외) 지는 꽃잎 무수히 성 모퉁이에 날린다.
道人神眼覷天奧(도인신안처천오) 도인의 신령한 눈, 하늘의 진리 살피고
一夜昆明生刦灰(일야곤명생겁회) 한밤에는 곤명지에 탄 재가 생겼구나.
金剛百萬奉指揮(금강백만봉지휘) 금강 역사 백만이 지휘를 받드니
尺劍長嘯臨江臺(척검장소임강대) 큰칼 긴 휘파람불며 강의 누대에 서있다.
화려하거나 유명하지는 않지만, 예스럽고 소박하며 웅대한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파사산성은 그 옛날 조선의 선비가 느꼈던 감동과 호연지기를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글 : 유석영
사진 : 조창환
*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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