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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을 통해 재 조명된 우리나라 석성의 역사와 가치 재발견-⑥

대몽항쟁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있는 진도의 남도석성

2011년 08월 25일(목) 16:32 [(주)고창신문]

 

지 정 : 사적 제 127호 (1964. 06. 10 지정)
위 치 : 전남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

ⓒ (주)고창신문

아침부터 잠깐 동안 모진 비가 내리더니 할 일 다 끝낸 것처럼 하늘 가장자리로 물러나고 구름 커튼 제친 햇님이 화사한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들어 하루 한 차례 이상 갑작스럽게 내리는 예측불허의 소나기지만, 제 나름의 경로와 계획이 있다는 듯 동쪽으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진도 가는 길에 몇 번 더 구름의 경로와 조우할지도 모르겠다.
속세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오늘은 한 주가 마무리되는 금요일이면서 칠월도 막바지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마디마디 새롭게 시작되고 접어지는 시간들은 다 어디에 쌓이는 것일까? 시간도 재생과 폐기로 분류되어 반복과 진보의 변증법적 고리로 복잡하게 얽혀 이루어져가는 것일까?
오래 묵은 시간이 켜켜이 쌓였을 진도 남도석성 가는 길.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목포 종점에서 빠져나오니 이 곳은 무화과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100여미터 간격으로 늘어서서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과일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영암의 특산물로 소개되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 날씨가 정말 더워지긴 한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뼈가 드러나 강한 인상의 유달산을 오른편으로 보며 달리는 도로는 영산강 하구둑 공사가 한 참 진행 중인 도로로 이어졌다. 목포가 배웅하고 영암이 마중하는가 싶던 도로는 곧이어 해남으로 이어지고 해남을 달리는가 싶었는데, 멀리 진도대교를 쇠줄로 묶어 손아귀에 쥐고 있는 탑이 보였다.
414년전 정유재란 때 겨우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제압했던 이순신 장군의 기개는 여전히 울돌목을 호령하고 있었다. 소리내어 우는 세찬 물살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범인(凡人)은 다만 장군의 동상 모습으로 그 기개를 짐작 할 뿐이다.
옥주(沃州)라 불리던 진도는 한반도 서남단에 위치하여 한반도 서남부의 바닷길을 잡고 있는 지형적 중요성 때문에 역사상 크고 작은 전쟁의 흔적을 많이 안고 있는 곳이다. 동남북쪽으로 각각 해남군, 완도군, 신안군과 이웃하고 있고 남해안의 문화와 서해안의 문화가 교차되고 합해지는 지역으로 많은 민속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수많은 침략의 전쟁을 안고 있듯 진도 역시 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땅이다. 909년 고려의 국조 왕건이 견훤과 마지막 싸움을 벌였고, 1271년 고려 말에는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하였으며, 1894년 동학의 마지막 전쟁이 끝난 곳이기도 하다.

↑↑ 남도석성의 만호비

ⓒ (주)고창신문

특히 대몽항쟁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있는 곳이 진도의 남도석성과 용장산성 이다.
대몽 항쟁에서 선봉에 섰던 삼별초는 몽고에 항복한 고려조정을 몽골의 ‘괴뢰정부’로 취급하고,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1270년에 배중손의 지휘 아래 즉각 반기를 들어 왕족인 승화후(承化候)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강화에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 개경이 가까운 강화도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던 삼별초는 1천여 함의 배로 강화도를 떠나 진도에 이르러 그곳에 항구적인 근거지를 두고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았다. 당시의 용장산성은 둘레 13킬로미터, 높이 5척의 대형 산성으로 관아도 세워 도읍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오랑(五狼)'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삼별초 진도정부는 친몽고적인 왕실에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아 고려의 유일한 정통 정부임을 주장하며 일본과 연계를 도모하는 외교도 펼쳤다. 그러나 1271년 용장산성은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 정권이 수립된 지 9개월 만에 함락당하고 배중손도 남도석성에서 전사하였다. 1271년 말, 김통정이 이끄는 잔존 세력이 탐라(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여몽연합군의 조직적 공략으로 1273년(원종 14년) 음력 4월 제주 삼별초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비록 삼별초의 왕국은 삼년 만에 무너지고 용장산성은 이제 산성 일부와 왕궁터에 남은 주춧돌만이 쓸쓸히 여행객을 맞고 있으나 몽고에 대한 저항정신과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보여주었던 그 날의 함성은 쌓인 돌틈의 묵은 시간 속에서 들리는 듯 하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임회면 남동리에는 배중손이 여몽연합군에 쫓겨 최후를 마친 곳, 남도석성이 있다. 삼국시대에 쌓아 1438년 조선 세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고 재축성한 수군진영으로 높이가 5~6 미터 되는 성벽이 610m의 원형으로 복원되어 있다. 빙 둘러 선 성곽엔 외부로 출입하는 문이 세 개인데 동문과 서문은 문터만 남아있고 남문만이 복원되어 있었다.
남문의 둥근 옹성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서면서 무심결에 고창읍성과 같이 잘 정비된 풍경을 기대했을까? 성내의 풍경은 살짝 놀랍다. 적으로부터 양민들을 보호했을 성은 이제 품안에 자리잡은 사람들의 삶을 안고 소박하고 편안한 아낙네같은 모습이었다. 남문의 망루는 더위를 피해 오수를 즐기는 노인들과 그 옆으로 넓게 펼쳐진 어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망위에서 잘 마른 멸치는 이 마을이 어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성 주변에는 농사일에 필요한 비료며 농기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때를 기다리고 있어 농촌이기도 하다는 것을 대변하였다.
78세의 강남석 할아버지에 의하면 일본 강점기 때만 해도 성안에는 1백2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15가구 30여명만이 좋기도 싫기도 한 마음으로 본격화될 이주와 철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고 했다. 성 밖으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남동전원마을을 조성하면서 성안의 마을은 정리가 되어 가는 중인 듯 하다. 성안에 사는 사람들이 나가면 이 자리엔 머잖아 여느 사적지처럼 깨끗하게 정비된 성이 액자의 그림처럼 자리하게 될 것이다.

↑↑ 복원중인 동헌

ⓒ (주)고창신문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복원은 지지부진 한 듯, 성 안에는 오래전에 복원하고 관리를 하지 않아 회칠이 벗겨진 동헌과 객사가 있었다. 주변의 농가와 동떨어진 그 모습은 외롭고 쓸쓸하여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 죽지 않고 짖어대는 진돗개 소리가 오히려 활기있게 느껴지는 여름 한 낮, 소박한 삶을 지키는 것은 변함없이 피고 지는 소박한 꽃들인지라 오래된 돌담아래 봉숭아가 붉게 피어 정다운 웃음을 나누고 있었다.
성곽의 폭은 1미터가 넉넉하여 밟으며 걷기에 좋았고 610여m로 아담한 성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 동, 서문 세 개의 출입문이 있어 길은 세 번 끊어지고 그럴 때마다 내려갔다 다시 올라야 한다.
석성 앞으로 흐르는 개울은 아마도 해자였을 것 같은데, 동쪽에 단홍교, 서쪽에 쌍홍교라는 귀여운 다리가 걸려있다. 홍예다리라고도 하는 홍교(虹橋)는 무지개 홍(虹)자가 말해주듯 둥근 ‘무지개 다리’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다리를 ‘남박다리’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남쪽 문 밖에 있는 다리라 ‘남박다리’라고 불렀다고 하니 그 이름의 유래가 얼마나 친근하고 소박한가?
무지개가 하나 뜬 단홍교는 1870년 이후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무지개가 두 개 뜬 쌍홍교는 1930년 주민들이 세웠다고 한다. 다듬지 않은 납작한 돌을 세로로 세워 불규칙하게 돌려 쌓은 아치가 무지개 다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데, 다리 위로는 20cm 가량 두툼하게 쌓인 흙위로 잔디가 푹신하게 자라있어 정감을 더한다.
강남석 할아버지는 이 곳이 거북 혈의 명당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아닌게 아니라 마을 앞으로 물굽이 둥근 만(灣)이 쏙 들어와 하루 두 번 바다가 다녀가는 갯벌이 형성되어 있고, 석성은 서망산과 망대산 사이 폭 들어간 평지에 자리잡고 있어 적의 눈에는 띄지 않으나 적을 보기는 쉬운 곳이었다.
눈에 쉽사리 띄지 않는 석성처럼 진도의 참 모습도 차를 타고 휙 둘러보고 나가는 관광객들에게는 감춰져 있다. 사실 나에게도 진도는 초행길이 아니었다. 두 번의 진도 행 모두 차를 타고 도로를 따라 일주하는 여행이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기억 속의 진도는 다만 쓸쓸한 섬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적 현실의 허상과 감각의 독재에 갇힌 영혼이 석성처럼 오래 묵은 시간의 체취 안에서 해방될 때 우리는 비로소 중몰이의 흥겨운 아리랑 장단에 어깨 춤을 추는 진도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고창신문 기획취재팀
글 유석영 / 사진 조창환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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