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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을 통해 재조명된 우리나라 석성의 역사와 가치 재발견 8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민족 자존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남한산성

2011년 10월 04일(화) 12:57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지 정 - 남 한 산 성: 사적 제57호 (1963년 1월 21일 지정)
남한산성행궁: 사적 제480호 (2007년 6월 8일 지정) 위 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84-16(산성리 563)

남한산성을 향해 길 떠나는 새벽. 와르르 쏟아질 듯한 별들이 총총 배웅한다. 별을 볼 때마다 그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렇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 사람들 때문에 이름과 의미가 지어지고 문명이 싹트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무한광대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별의 이야기에 비하면 너무나 가까워서 피붙이같은 정다움마저 느껴지는 지척의 우리 역사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이 땅에서 반복될 미래의 열쇠는 이 땅에 있을 것이므로 의식의 밭이랑에 심을 꿈 한 톨 캐기 위해 역사를 뒤적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50억년전 더듬거리며 걸음마했을 인류의 문명은 이제 뛰고 있는 느낌이지만, 각자에게 인생은 여전히 백년의 시한 속에서 더듬거리는 일회성의 삶일 것이다. 지금은 몽환의 어둠속을 더듬거릴지언정 매일 잊지않고 나무와 대지가 꾸는 빛의 꿈처럼 언젠가는 알을 깰 꿈 하나 있어 이 땅 반 만여년전 역사가 현재형으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어딘가에 착륙한 아침은 빠른 속도로 전진하여 산과 들을 깨운다. 미처 불투명한 안개를 거두지 못한 강물이 반쯤 감긴 눈을 뜨자 밤새 배고팠던 왜가리 한 마리가 그 새를 참지 못해 강물 속에 발을 담근다. 인간의 문명은 갈길이 바빠 자연의 무욕한 여유로움을 앞지르는 것일까?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구리 방면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성남으로 들어서자 도시는 이미 깨어 분주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큰 길을 따라 곧장 뻗은 길 끄트머리는 검단산인지 청량산인지 영역이 분명치 않은 산 자락으로 이어진다. 청량산과 검단산이 약간의 틈을 벌여 허용해 준 구불구불한 산길에는 벌써부터 일렬 종대로 행군하듯 많은 차와 자전거와 사람이 올라간다. 좁은 이차선 여유가 없어보이는 도로 옆으로 한 발 한 발 힘주어 페달을 밟는 산악자전거 족들이 위험해보이지만, 정작 그들의 표정은 순례자처럼 평화롭다.
370여전 청의 13만 대군의 침입을 피해 눈까지 내리는 이 길을 인조는 천민이던 서흔남의 등에 업혀 올랐다한다. 그 참담함을 오늘 이 길을 오르는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을까? 전란의 아픔을 간직한 남한산성은 이제 손자와 놀아주는 흰수염 할아버지처럼 인근의 서울과 성남, 하남, 광주시 뿐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을 맞아 조근 조근 옛이야기를 전한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 고위평탄면에 쌓은 성이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에 위치해 있는데 행정구역 상으로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고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수원화성이 서울의 남쪽을 수호한다면, 남한산성은 서울의 동쪽을 지키는 요새로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적의 침입이 어려운 곳이기에 왕궁을 지키는 성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는 산성이 많이 발달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남한산성, 행주산성, 공주 공산성 등이다. 그러나 규모면에서나 가치면에서 남한산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성돌을 활용하여 구축되었고, 외성은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되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성을 쌓는 기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한 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숭렬전의 건립에 얽힌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숭렬전은 온조묘라고도 불리는데, 온조왕과 남한산성 축성의 총 책임자였던 이서를 함께 모시는 사당이다. 한 사당에서 신분이 다른 왕과 장군을 함께 모시는 일은 흔치 않은데, 그렇게 된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청나라 군사가 북성으로 침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청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한다. 전쟁이 끝나고 인조는 온조왕의 은혜를 갚기 위해 남한산성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렸는데, 온조왕이 꿈에 다시 나타나 “대왕이 내 사당을 지으시니 진실로 감사하오. 그러나 혼자 있기가 몹시 외로우니 대왕의 신하 중에서 명망 있는 신하 한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시오”라고 하였다. 인조가 간밤의 꿈을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이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온조왕이 이서를 선택해서 데려간 것이라 여기게 되어 이서를 온조왕 묘에 함께 모시도록 하였다.
남한산성의 축성과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주장성은 신라 통일 후 당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으로 신라 북쪽의 변방을 지키는 방어의 거점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의 거센 공격을 당했으나 광주부사 이세화의 지휘 하에 군민이 힘을 합하여 이를 막아냈다.
남한산성의 본격적인 수축은 이괄의 난과 후금의 위협이 거세진 인조 2년(1624)때 이루어졌다. 그 결과 둘레 6297보, 여장 1940개, 옹성 3개, 대문 4개(동문: 좌익문, 서문: 우익문, 남문: 지화문, 북문: 전승문),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가 만들어졌고 왕이 거처할 행궁과 객관인 인화관도 함께 지어졌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미처 강화도로 가지 못한 인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이 곳으로 피신하여 47일간 항전하다가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 삼전동 부근)까지 내려가 항복하였다. 인조는 ‘천은이 망극하오이다’ 하며 아홉 번 맨땅에 머리를 찧어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이 때 이루어진 청과의 강화 결과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고 이후 1645년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 달만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는 역사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다.
1950년대에 들어 이승만 대통령이 남한산성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수어장대에는 ‘리대통령기념식수비’가 있는데, 오늘날과는 많이 다른 시대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 뒤 제2공화국이 남한산성의 국립공원 지정을 무효화시켜 남한산성의 유지보수를 위한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가 1971년 도립공원으로 재지정되면서 1975년부터 문화재에 대한 부분적인 보수 정비가 시작되었고 1997년까지 성곽 5.1km를 보수하면서 조금씩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1974년 광지원리에서 남한산성을 관통하여 성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포장되고 자가용이 보급되면서 인조가 업혀서 오르던 길을 자가용으로 달리게 된 것이다. 남한산성의 보수 정비 공사는 지금도 진행중이어서 이번 답사 중에도 옹성과 동문과 행궁에 들어갈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행궁의 단청공사는 2012년 3월에야 끝난다고 하니 2012년 봄에는 남한산성 행궁의 수려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09년부터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 및 연구조사 활동을 벌인 결과 2010년 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가능성을 열었다.
남한산성 내부는 일시적 방어요새로만 기능하는 다른 산성과는 달리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에 광주 군청이 설치될 정도로 행정의 중심지이자 지역 중심지로 기능해왔다. 남한산성 내부의 취락은 고도가 높고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별되는 입지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된 기동훈련(인조 17년 1639)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만 2700명이라고 전해지니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 안의 유치 가능인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성벽의 둘레를 측량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성벽 외곽 기단부를 기준으로 하는 방법과 여장 안쪽 기저부를 중심으로 하는 방법, 여장의 옥개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방법인데, 그 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것은 여장의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다.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정한 결과 외성과 옹성을 제외한 원성의 규모는 둘레가 7545m이고 성 내부 면적은 212만 6637m2 이다. 부속 시설을 포함한 성벽 전체 규모는 12356km에 달한다. 남한산성 내에는 200여 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자연생태환경과 더불어 산성 내에 역사와 설화가 살아있는 5개의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다. 연간 다녀가는 관광객의 수만 해도 100만명이 넘는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문에서 북문까지 걷는 내내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 때문에 의아했었는데, 주차장까지 내려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남한산성 노점상 생존권을 위한 투쟁” 깃발이 펄럭이는 가운데 투쟁가를 어찌나 크게 틀어놓았는지 온 산이 다 흔들렸던 것이다.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도중 도중 휴식 공간마다 음식냄새가 고약하여 상쾌한 기분이 사라졌다.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남들에게까지 들려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둘 사이의 애정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참 난처하였다. 한 번 스쳐가고 말면 그만이지만, ‘한 자리에 선 채 매일 매일 그런 소음과 냄새를 견뎌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니 말없이 서있는 성곽과 나무들에게 미안하였다. 다음 번 답사에는 순례자처럼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장엄하게 솟은 소나무의 결기어린 비늘에 스치는 역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글 유석영 사진 조창환
고창신문 기획취재팀
* 본 기획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지원을 받았습니다.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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