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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무장.흥덕향교를 통해 우리나라 향교의 역사와 가치 재조명-1. 고창.무장.흥덕향교

유교문화 이념으로 설립, 운영된 교육기관, 고창의 향교

2011년 10월 25일(화) 07:28 [(주)고창신문]

 

↑↑ 고창향교 대성전

ⓒ (주)고창신문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하지만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진 향교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점차 무력화되었다. 사람이 중심이 되어 세운 사학인 서원이 거의 대치하게 되었고, 향교는 지방 양민들이 군역을 피역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1894년(고종31년) 갑오개혁 때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이름만 남게 되고 단지 문묘에 대한 제사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오늘날 지방을 다니다보면 옛 향교가 문화재로서의 기능 외에 쓸쓸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 이에 고창신문은 우리의 전통과 역사를 발굴 보존하자는 취지 아래 기획취재를 통해 각 지역의 특색을 갖춘 향교를 찾아보고, 역사속으로 사라져가는 향교를 보존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림들을 만나 저마다 지니고 있는 특성과 그 역사, 가치를 재평가하는 계획을 세워본다. <편집자 주>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된 교육기관 향교

향교는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운영된 교육기관으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향교의 연원은 유교문화이념이 소개되는 때부터 비롯되지만, 향교가 적극적으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여 지방 사회질서를 유교문화 논리에 접목시키며, 과거제 운영을 유교 교육과 연계시키려 했다. 이러한 사회문화의 기초기구로서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 향교이다. 따라서 국가는 군현제(郡縣制)의 정비와 함께 지방 수령들에게 향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보호·육성을 촉구했으며, 이를 위한 재정적 지원도 적극적으로 했다. 따라서 향교는 지방 수령의 책임하에 그 운영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유교적 정치 이념 보급시키려는 의지의 소산

조선시대에는 향교의 설치를 통해 유학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국가는 모든 향교에 유학을 교수하는 관리인 교관(敎官)을 임명·파견했다. 교관은 유학에 소양이 있는 지식인으로 선임하고, 수령과 함께 파견되도록 법제화했다.〈경국대전〉에 의하면 교관을 교수(敎授:종6품)·훈도(訓導:종9품)로 구분, 군·현에는 훈도를, 부(府)·목(牧) 이상은 교수를 파견하도록 법제화했다. 그러나 수령의 적임자조차 부족한 상황하에서 교관까지 선임한다는 것은 여의치 않았으므로, 교관의 파견이 법제도대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제적 조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생원·진사 또는 경학 지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라도 관리를 선발하여 임시로 교관직에 보임하려고 노력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향교 교육을 위해 여건의 불리함을 감수하면서도 교관의 파견에 많은 노력을 했다. 이는 조선왕조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널리 보급시키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중기·후기로 가면서 관학 교육기관에 대한 비판적 언론과 사학(私學) 교육기관의 활성화로 인해 학도들은 향교를 기피하고 서원·서당 등의 사학기관을 찾게 되었다. 이에 제독관(提督官)·교양관(敎養官)을 두어 관학의 교육기능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그 결과는 부분적 성과에 그쳤다. 이후 향교는 문화적·정치적 기능이 강화되어 유교문화이념의 또다른 성격을 구현하는 기구로 변화되었다.

순수한 교육적 기능 점차 상실

향교는 지방 지식인들의 구심처였으므로 지방 단위의 문화행사, 특히 유교문화이념에 따른 행사가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춘추의 석전례(釋奠禮)와 삭망의 분향이 향교의 문묘에서 이루어지고, 사직제·성황제·기우제·여제 등도 향교를 중심으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지방민의 기원이 이곳에서 규합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교가 향약의 운영도 주관했으며, 향사례(鄕射禮)·향음례(鄕飮禮)·양로례(養老禮)도 여기에서 중심이 되어 집행되었다. 또한 향교는 왕의 윤음을 비롯한 중대한 정치적 내용을 직접 지방민들에게 전달하는 공식적인 장소가 되기도 했다. 즉 향교는 순수한 교육적 기능을 점차 상실하면서 문화적·정치적인 기능은 그대로 상존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문화적·정치적인 기능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이미 상실한 교육적 기능을 소생시키려고 했다. 양사재(養士齋)·흥학재(興學齋)·육영재(育英齋) 등 향교의 부속건물 기구를 설치하면서 교육기능을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그 예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고, 지식인들의 지방적 거점이 되어갔다.

정치력의 구현 장소로 정치적 구심처

향교는 출발에서부터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즉 향교에서 유학을 교육받은 지방민은 생원·진사 시험을 거쳐 다시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중앙의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지방민의 입장에서는 중앙정치권에 진입하기 위한 합법적이고 개방된 절차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물론 지방 지식인들에게는 극히 좁은 문이 되었으나, 전체 지방 지식인들이 갖는 정치력이야말로 중앙의 세력에 일정한 제약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앙세력의 대표격인 수령은 호구의 조사, 조세의 부과, 군적의 편성 등 정치운영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지방 지식인들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동시에 지방 지식인은 중앙정치를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당쟁하에서 중앙관료들의 비정에 대한 비판적 여론은 지방의 지식인들, 즉 사족(士族)이라고 하는 양반들의 집단 속에서 조성되었는데, 특히 그들은 향교를 중심으로 정치 활동을 활성화했다. 물론 향청(鄕廳)·사마소(司馬所)·서원(書院) 등의 기구를 통해서도 정치적 활동을 했으나, 향교가 중앙정치력과 지방사족들의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이자 정치력의 구현 장소라는 점에서 정치적 구심처가 되었다.


지방 유림들의 집회소이자 여론의 발원적 기관

이와 같이 향교는 중앙정치력과 지방 지식인 사이에 정치력의 긴장이 존재했는데, 그런 양상은 결국 재정적 투자 형태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우선 중앙정치력은 지방침투를 위하여 학전(學田)·학노(學奴)라는 이름의 재정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수령들이 때때로 전곡(錢穀)을 내어 향교의 중수·중건·비용 등을 마련하거나, 향교전의 설치를 위해 토지를 매득하기도 했다. 한편 지방 유림들도 향교 운영과 보수를 위해 스스로 유전(儒錢)을 갹출하거나 일반 백성들에게 원납전을 받아 기금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지방세력이 재정투자를 하면 이에 상응하여 조세 분담, 또는 군역 분담 등에서 일정한 혜택을 부여받았다.
지방 지식인들은 향교의 운영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향교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면역의 특권을 누리거나 지방정치에의 구심세력이 될 수 있었다. 즉 조선 후기 향교의 운영을 위해 교생의 면강첩(고강을 면제받으면서 학생신분을 유지하는 증명서)을 발매한다든지, 교촌(校村)·교보(校保)라는 향교 주변마을을 국가의 일반 역에서 제외시키는 대신 향교만을 위해 사역하도록 조처하기도 했다.


신분상승의 사회적 변화를 추구

향교가 유교문화이념에 따른 질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라는 확실한 교육목표가 주어짐에 따라 향교의 교육대상은 양인 전반이 되었다. 조선이 신분제 사회인 만큼 상류신분층이 다른 계층보다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향교는 소수의 귀족문벌뿐만 아니라 많은 양인신분층에게 유학교육의 기회를 부여했다. 이에 양인들은 향교에 입학하여 교생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신분상승의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교생에게는 군역이 면제된다든지, 학업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진사 시험 회시(會試)에 직접 응시하게 하거나 고강(考講)에서 우수한 사람에게는 호역(戶役)을 면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등의 특전이 부여되었다.

조직과 체계 재정비하기 위한 노력

오늘날 지방을 다니다 보면 옛 향교가 문화재로서의 기능 외에 쓸쓸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점차 사회교화(社會敎化)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모습을 점차 되찾아가고 있다. 지금 전국 각 향교에서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청소년인성교육 현장교실’ 등을 개설하는 등 유교의 본산으로서의 조직과 체계를 다시금 재정비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먼저 우리지역에 있는 고창향교, 무장향교, 흥덕향교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직접 찾아가 보았다.

고창향교-문화재자료 제98호 지정(등록)일:1985.8.1

고창군청과 고창초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고창향교로 향하였다. 마을 가운데 자리잡은 고창향교는 성대하던 옛시절을 뒤로 한 채 소박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고창향교 이정범 전교와 안재운 총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고창향교에 대한 여러 서책을 보여주며 고창향교의 역사를 설명해나갔다.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월곡리에 있던 학당사을 옮겨온 것으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다시 지었다. 대성전은 선조 38년(1605)에 수리하였고, 1974년에 기와를 보수하였다.
현재 석전대제를 비롯해 향교 일요학교와 기로연 등 전통문화행사를 주관 유교문화를 널리 홍보하고 전통문화 계승으로 건전한 사회풍토를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해 오고 있다.
또한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
고창향교는 대성전, 명륜당, 양사제, 사마제, 동제, 서제, 외삼문, 전사청이 있다.
대성전은 위패를 모신 곳, 명륜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대강당, 양사제는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쓰는 방, 사마제는 합격생이 쓰는 방, 전사청은 제를 올릴 때 음식을 장만하고 보관하는 곳이다. 대성전 앞에 500년 된 은행나무도 보였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고창향교에서는 매년 음력 2월 첫째 정일과 8월 첫째 정일이 되면 대제를 올린다.
전교와 총무외에도 고창향교의 명맥을 지켜나가는 회원들은 안도연, 이금섭, 이종운, 윤석태, 유길식, 고정상, 나종남씨등이 있다.


무장향교-문화재자료 제107호 지정(등록)일:1985.8.14
무장향교는 조선 세종 2년(1420)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을 교육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헌종 8년(1842)에 중건한 것이며 전통예절 체험관을 열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현대인들에게 잊어버리기 쉬운 옛 성현의 가르침과 숭고한 향교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데 앞장서 오고 있다.

흥덕향교-문화재자료 제108호 지정(등록)일:1985.8.14
흥덕향교는 조선 광해군 13년(1621년)에 창건되었으며, 그후 당시 흥덕현 유림들의 숙원으로 숙종 원년(1675년)에 어명에 의해 중창되었다. 이곳에는 판본 117종 206책, 사본 14종 16책이 있으며, 이 가운데 교전답총기, 교궁총록, 창의록 등은 향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손꼽히고 있다.
제사 공간인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와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 본 기획물은 지역신문 발전위원회의 취재 지원을 받습니다.
고창신문 기획취재팀

고창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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