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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담양향교, 곡성향교, 나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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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일은 인륜을 밝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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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2일(화) 13:15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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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군 담양향교(潭陽鄕校)
지 정 - 지방유형문화재 제103호 (1986. 11. 1. 지정)
위 치 - 전남 담양군 담양읍 향교리 323
담양 죽록원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홍살문도 없는 입구에 눈에 띌 듯 말 듯 하마비가 서있다. 향교가 있다는 증거이다. 하마비가 서 있으나 마나 차들은 굽어진 골목을 돌아들어 Y자로 나누어지는 길 왼편으로 담장도 없는 외삼문 주변에 질서없이 늘어서있다. 고개를 들면 누각 위에서 예서체로 내려다보는 담양향교의 명륜당과 눈이 마주친다.
담양향교는 태조 7년(1398)에 창건하여 정조 18년(1794) 부사 이헌유가 중건하는 등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명륜당을 왼편으로 놓고 돌아 층계에 오르면 오른편으로 고직사(庫直舍)를 아래로 둔 층계 위 명륜당과 통하는 문이 보인다.
명륜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루(樓) 건물로 정면은 약 280cm 높이의 2중기단으로 쌓고 덤벙주초 위 그렝이질을 한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의 루 아래에는 살(箭)을 설치해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루 위의 좌우 툇간에 온돌방이 있는 것과 루 아래의 벽을 뚫어 만든 함실 아궁이가 특이하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홑처마이며 바람막이 판이 있다. 경사지에 세워진 향교들이 대부분 그렇듯 담양향교도 명륜당 뒤편으로 동재와 서재가 있는 전당후재의 형태이며 뒤쪽 높은 곳에 대성전이 배치되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이다.
대성전의 건축형식을 보면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약 130cm 높이의 석축기단을 쌓고 덤벙 주춧돌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홑처마이며 바람막이 판이 설치되어 있다. 동·서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반듯하고 편평한 주춧돌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솟을문인 내삼문에 오르는 계단은 약 4m의 높이며 내삼문 좌우에는 2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가을바람에 ‘툭툭’ 은행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깬다.
이곳에는 5성 2현과 우리나라의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고 대성전, 명륜당을 비롯한 동,서재와 동,서무 외에도 육영재, 사마재, 전사청 등이 있었으나 고종 31년(1894) 이후에 허물어졌다고 한다.
곡성군 곡성향교 (谷城鄕校)
지 정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7호 (1984. 2. 29. 지정)
위 치 - 전남 곡성군 곡성읍 교촌리 190
곡성으로 접어들어 넓은 벌 생활체육공원을 지나 들깨냄새 가득한 마을이 끝나는 지점 산자락이 시작되는 곳 우뚝 홍살문이 서있다. 곡성향교는 조선 선조 3년(1570)에 지었다고 전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중종(재위1506∼1544) 이전에 세운 것으로도 보인다. 안내문에 의하면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곡성현이 남원부에 속하면서 향교의 기능이 정지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도 피해를 입어 광해군 11년(1619)에 이어 인조27년(1648), 숙종 11년(1685)에도 중수하였으며 헌종8년(1824) 대성전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
건물 배치는 경사지에 있는 향교가 흔히 그렇듯 명륜당 뒤편으로 동재·서재가 마주보고 서있는 전당후재의 교당부와 내삼문을 지나 뒤쪽에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되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유림관이 있고 명륜당 오른편 문으로 들어서면 샛노란 은행잎에 둘러싸인 비석군이 있다. 명륜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동재와 서재는 각각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를 갖추고 있고 서재 뒤편으로 전사청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맞배지붕을 얹고 있다.
석양빛은 아무도 없는 향교에 쓸쓸함을 더하는데 완만한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학동들을 잃은 향교의 고적함을 달래준다. 그 옛날 아이들은 푸근한 산자락과 도란도란 정다운 계곡물과 더불어 좋았을 것이다. 현대의 아이들에게도 좋을 자연 속의 향교는 노란 은행잎과 더불어 이리도 아름다운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주시 나주향교(羅州鄕校)
지 정 - 전라남도 문화재 제128호(1985. 2. 25 지정)
대 성 전 : 보물 제394호(1963. 9. 3 지정)
향교일원 : 국가사적 제483호(2007. 7. 31 지정)
위 치 - 나주시 향교길 38(교동 32-3번지)
나주에 들어서면 조선시대 나주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느껴진다. 나주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행정구역상 목(牧)으로 분류되어 조선 말까지 이어졌는데, 나주목은 해진, 영암, 영광 등 3군과 강진, 무장, 함평, 남평, 무안, 고창, 흥덕, 장성 등 8현을 영속하고 있었던 역사깊은 큰 고을로 향교 또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나주향교는 고려 성종 6년(987)에 창건되어 조선 태조 7년(1398)에 중건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성균관을 복원할 때 나주향교의 건축양식을 모방하였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건물형태가 아름답다. 특히, 대성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그 학술적이며 예술적 가치가 높다.
향교는 현대의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으로 마을 서당에서 우수한 학동이 향교에서 공부하여 생원진사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나주향교는 과거에 급제하는 인재가 많아 전주향교와 더불어 위상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특히,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금성별곡을 통해 나주향교 출신 10명이 함께 향시에 합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종 10년 박성건이 교수로 재임시에 10명이 함께 향시에 합격하여 이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나주인재의 영광과 명예를 자랑하는 금성별곡(錦成別曲)을 노래하였다고 한다.
나주향교는 나주의 중심부에 있는 진산(鎭山)인 금성산 장원봉이 굽어보는 서성문 옆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은 향교를 비롯한 일대의 복원이 이루어져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향교는 대성전 뒤에 명륜당이 위치한 전묘후학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위계질서가 뚜렷했던 향교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을 경우에는 대성전을 위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대성전을 명륜당 뒤에 배치하지만, 평지에 자리잡고 있을 경우에는 대성전을 앞에 배치하는 전묘후학의 형태를 취한다. 전주향교와 나주향교는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향교이기 때문에 전묘후학의 형태로서 대성전이 앞에 위치해 있고 또한 동,서재가 명륜당 앞에 있는 전재후당의 배치형태를 보이고 있다.
나주향교임을 알리는 비석과 하마비 바로 뒤에 외삼문이 있고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향교전(鄕校田)이 펼쳐져 있다. 내삼문은 대성전으로 이어지는데, 외삼문과 내삼문을 비롯한 대성전의 문들은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하는 분향과 매년 봄 가을로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이루어지는 석전대제(釋奠大祭) 때에나 열리지만, 마침 나오신 장의의 허가를 얻어 대성전 앞 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성전은 폐쇄형의 동,서무를 양 옆으로 거느리고 있다. 대성전의 상층벽토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곡부(曲阜)에서 반입한 것이라 전해지고 주춧돌은 용두조각으로 고려시대 예술작품인데,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근사찰이 헐리면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대성전은 개방형으로 둥근 기둥이 위엄을 더하고 있고 팔작지붕을 얹어 세련된 자태가 화려하다. 동무(東廡) 옆으로는 두 사람이 팔을 이어 안아도 다 채우지 못할 풍채의 은행나무가 600년을 한결같이 서서 세월을 지키고 있다. 대성전에는 중앙에 정위(正位)로 모셔진 공자의 위패를 중심으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사성의 위패가 두 분씩 양쪽으로 모셔져 배향위(配享位)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동서 벽면에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송조 4현의 위패가 종향(從享)으로 모셔져있다. 동무 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동무에는 설총, 안유,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서무에는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 뒤쪽으로 난 문을 지나 들어서면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허전한 넓은 뜰이 명륜당을 중앙으로 동재 서재에 둘러져 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 11칸으로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큰 규모였으며 동재와 서재가 서로 등을 돌린 형태로 각각 바깥 담쪽으로 마루가 놓여져 있기 때문에 마당쪽에서는 위쪽으로 한지 들창과 아래쪽으로 구들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들만 보인다.
『맹자』「등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명륜당은 교육공간으로 오늘날의 교실과 같은 개념인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는 형태를 취하는데, 그 이유는 명륜당이 교육 장소인 동시에 교관의 거처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나주향교의 명륜당은 중앙의 대청과 좌우에 방이 딸린 익랑(翼廊)이 각각 독립적인 건물로 이어져 있어 마치 한 채의 솟을지붕인 것처럼 보이는 구조가 특이하다. 나주향교의 명륜당은 건물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둔 것은 다르지만 원래 성균관의 명륜당을 모방하여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성균관의 명륜당이 불에 타 소실되자 거꾸로 나주향교의 명륜당을 모체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명륜당 동쪽으로는 충효관과 도서를 보관하는 보전각(普典閣), 향교 사무실로 쓰고 있는 교직사가 있다. 명륜당 담장 밖으로 나오면 비석군과 마주친다. 많은 비석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충복사유허비’. 정유재란때 노비의 우두머리 김애남이 위패를 안전하게 보호한 공적을 기록하고 있다. 비석군을 뒤로하고 담장을 따라 나오다보면 왼쪽으로 사마재가 있고 이 밖에도 영란문, 부정문, 학생사가 있다. 양사재, 충복사, 수복청은 터만 남아있다.
나주향교에서는 현대적인 흐름에 맞추어 충효인성교실을 열어 한문강좌와 생활예절 등을 가르치고 학술연구발표, 윤리도덕회복운동, 기로연(耆老宴), 성년식, 전통혼례 등을 실시하여 전통사상과 정신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600년을 한결같이 새로이 잎을 돋우고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와 같이 생명의 활기가 넘치는 향교의 발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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