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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금산향교, 공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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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학의 정신이 담긴 향교
짜임새있는 향교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한 금산향교
세월의 깊이를 담은 위엄이 배인 공주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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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2월 01일(목) 14:38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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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다 못해 싸늘해진 공기에 입김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10월의 이른 아침. 가을 단풍 여행 떠나듯 설레는 마음을 안고 충청남도의 향교를 찾아 나선 길이다. ‘세계를 낭만화하라’(『세계를 낭만화하라』는 책 제목으로서 2011년 그린비에서 출판한 프레더릭 바이저의 초기 독일 낭만주의 연구서이다.), 신은 가을에게 그렇게 명령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모든 산과 들에 펼쳐진 화포(畫布)위로 붉고 노란 유화물감이 번지기 시작하여 온 천지가 색채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 하다. 신의 세숫물처럼 고여있던 골짜기의 운해(雲海)는 출렁 파도치는가 싶더니 아래로 흘러흘러 세상을 덮는다. 세상은 하얀 안개 이불 아래 다시 한 번 잠들어야 할 것만 같은데, 운해를 박차고 날아오른 백로떼의 하얀 날개짓 소리에 놀랐는지 마이산 두 귀가 쫑긋 운해 위로 솟는다. 신의 붓끝이 스치듯이 한 줄기 구름이 스친 자리에는 소국이 연보라 점묘화처럼 피어오르고 위풍당당 침엽수림은 추울수록 어깨를 편다. 부지런한 농부는 어느새 새 땅을 일구어 가지런히 빗어내린 흑단 머릿결같은 검은 흙이 정갈하다. 통행허가증을 요구하는 듯 우리를 막아서던 짙은 안개가 걷히자 불현듯 나타난 “생명의 고향, 미래의 땅 금산”이라는 프래카드가 금산 땅에 접어들었음을 말해준다. 금산은 10월 30일까지 인삼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라 그런지 휴일임에도 거리에 활기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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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군 금산향교(錦山形校)
지 정 - 충청남도 기념물 제121호 (1997월 12월 23일 지정)
위 치 - 충남 금산군 금산면 상리 4
향교는 국가가 백성들의 교육을 위해 각 지방에 세운 관학으로 현대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등 교육 기관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교육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한 시기는 삼국시대로 고구려의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주로 중앙에 설치되어 귀족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했던 것에 비해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이 건국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양반의 자제들 뿐 아니라 평민들까지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방 학교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향교와 서원을 들 수 있는데, 향교는 관학인데 비하여 서원은 사립학교로서 조선 중기 16세기 이후에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향교와 서원은 설립되기 시작한 시기와 설립주체가 다르고 배향인물이 다르긴 하지만, 교육기관으로서 제향의 기능까지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으나, 서원이 설립되기 시작하면서 공교육이었던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이 수령의 간섭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 경치가 수려한 곳에 위치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관학으로서의 향교는 일반적으로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에서 그리 멀리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오늘날에는 주거지 근처의 유적지로서 공원같은 느낌을 준다.
금산향교 역시 주변이 잘 정비된 도로에 맞닿아 있어서 접근성이 좋고 그 자체가 공원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붉은 칠을 한 홍살문이 향교의 위엄을 보여주며 이 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금산향교에는 양편으로 늘어선 비석이 유난히 많아 보였는데, 이와 같이 향교에서 만나는 비석들은 주로 고을을 잘 다스렸던 관찰사, 목사, 군수, 현감에 대한 선정비(善政碑), 송덕비(頌德碑)이거나 향교 건물의 중수기(重修記), 교임(校任)들의 공적 기념비들이다. 홍살문 안으로 양편으로 나란히 서서 단정하게 읍(揖)하고 있는 비석들의 마중을 받으며 층계를 오르면 화려한 태극 문양을 가슴에 안은 솟을삼문, 외삼문이 기와를 얹은 아기자기한 돌담을 거느리고 기다린다. 향교의 출입문은 보통 세 개의 대문으로 이루어진 삼문의 형태인데, 동편, 즉 바깥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 문은 들어가는 문이고, 서편문은 나오는 문이어서 중앙의 문은 큰 행사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열리는 일이 없다. 외삼문 오른 편에 서 있는 안내문에는 금산향교가 원래 조선 초기에 금산읍 하옥리 백학동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보수하였고, 1684년(숙종 1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어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는 향교의 역사가 간략하게 기록되어있다.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명륜당이 좌우로 동재와 서재를 거느리고 한 층 높은 층계위에 있다.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전퇴(前退)가 있는 개방형 구조로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향교의 건축양식으로는 보기 드물게 우진각 지붕을 얹었다. 명륜당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향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굵은 숨결로 서 있는 은행나무가 내삼문을 앞을 지키고 있다. 예로부터 은행나무는 교육을 담당하는 장소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알려져 있는데,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를 본 뜬 것이다. 그래서 향교나 서원에 가면 대부분 향교와 역사를 같이하는 은행나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내삼문 안으로 들어서니 중앙에 공자와 사성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로 폐쇄형의 동무와 서무가 있다.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과 송조 이철(二哲)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봄 가을로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향교는 유교적 윤리 규범을 교육하는 곳이기 때문에 향교 건물의 건축 양식에서도 위계질서가 뚜렷하다. 대성전과 동무, 서무는 명칭에서부터 전(殿)과 무(廡)의 차이가 있는데, 공자를 비롯한 4성을 모신 대성전은 대궐을 뜻하는 ‘전’으로 부르는 데 비해 동무, 서무는 행랑을 뜻하는 ‘무’의 개념을 사용한 것이다. 지면으로부터 높낮이도 다르게 하여 시각적으로 위계를 나타냈다. 대성전과 동 서무는 위패를 모시기 때문에 안은 통칸으로 되어 있다. 부속 건물로 향교를 관리하는 살림집인 교직사(校直舍)가 외삼문을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자리하고, 그 맞은편에는 아마도 자료를 보관하는 경판고(經板庫)나 혹은 제기 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쯤으로 보이는 규모가 작은 건물이 있는데, 현판이 없어서 정확한 내용은 알 길이 없었다. 금산향교는 터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길부터 대성전에 이르기까지 짜임새있는 향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향교의 기본적인 건물인 대성전,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서재와 동,서무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을 뿐 아니라, 배치형태에 있어서도 전형적이다. 배치형태를 보면 교육을 담당하는 명륜당이 앞에 배치되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이고, 이것을 다시 명륜당과 동,서재가 놓이는 방식에 따라 보면 동,서재가 앞에 배치되어 있는 전재후당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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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공주향교(公州鄕校)
지 정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75호 (1978년 3월 31일 지정)
위 치 - 충남 공주시 교동 211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 가더라도 교촌, 교동, 향교동, 교운리(校雲理), 교성리, 교흥리, 교월리, 교원리, 대교리, 교사리, 교평리, 교현동 등의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 이름에 들어있는 ‘교’자는 대부분 학교를 나타내는데 이는 그곳에 오래 전부터 학교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공주향교 역시 공주시 교동에 위치해 있고, 유형문화재다운 충분한 가치를 담고 있다. 하마비를 앞세운 홍살문은 비록 색은 퇴색하였으나 세월의 깊이를 담은 위엄을 보여주고 있고 홍살문을 들어서면 외삼문 밖으로 오른편에 고직사(庫直舍)가 있다.
공주향교는 태조 7년(1374) 웅진동 송산 기슭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광해군 14년(1622) 화재로 인하여 인조 1년(162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고 전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뜰에 수령이 130년에서 280년이나 되어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느티나무가 5그루 서있고, 아름답게 물든 은행나무가 향교 전체에 황금빛 잎들을 흩뿌리며 가을을 맞고 있다. 조선시대 학동들의 글읽는 소리가 울려퍼졌을 명륜당은 폐쇄형으로 세워진 둥근 기둥에 팔작지붕을 얹어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건물의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명륜당을 오른편으로 돌아 제기고를 지나면 명륜당 뒤쪽으로 내삼문이 몸을 숨기듯 서 있다. 내삼문 안쪽으로 대성전은 개방형의 둥근 기둥이 맞배지붕을 떠받쳐 단순하지만 강하고 위엄있는 건물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대성전 앞면 좌우로는 현판 대신 동묘(東廟) 서묘(西廟)라고 씌인 화선지가 네모진 기둥에 붙어있었다. 동묘와 서묘 역시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개방형의 형태인데, 대성전이 둥글고 큰 기둥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동묘와 서묘는 사각 기둥을 사용하고 있고, 공포의 구성도 대성전이 익공 양식인 반면 동묘와 서묘는 일반 주택과 같은 민도리 양식이다. 이는 오성(五聖)을 모시는 대성전과 뚜렷한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은 성리학을 국교로 삼았던 나라였음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대성전에는 문선왕 공자의 위패를 중앙으로 하여 좌우로 둘씩 증자, 맹자, 안자, 자사의 위패가 가운데 모셔져 있고, 양 옆 벽쪽으로 10철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묘와 서묘에는 송조 6현과 우리나라 18현 중 9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공주향교는 비교적 넓고 단아한 자리에 명륜당이 앞에 위치해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지금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동재와 서재는 없고, 부속건물로는 제기고와 고직사가 있다. 다른 향교에 비해 관리가 잘 되어 있고, 관리하는 분도 쉽게 만날 수 있어서 취재가 비교적 용이하였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별은 사실은 백만년도 훨씬 넘은 빛이어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별도 많다고 한다. 별빛은 먼 우주를 가로질러 몇 백만년을 달려와 사라진 별의 존재를 우리에게 전해주듯 향교는 지금은 비록 존재하지 않는 조선시대의 교육과 정신을 고스란히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교회나 성당이 먼 이국의 예수님을 모시고 있듯, 고려시대까지는 부처님이, 조선시대에는 공자님이 그 역할을 하셨을 것이다. 인간의 머리와 가슴을 채워 줄 교육과 믿음이 자라났을 향교를 돌아보며 과연 이 시대에 우리의 머리와 가슴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믿어야 할 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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