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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옛향기로 우리의 정신을 치유하는 힘을 주는 곳!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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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향교, 경상남도 밀양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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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1월 10일(화) 12:40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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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경주향교
지 정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1985. 10. 15)
대 성 전: 보물 제1727호 (2011. 12. 2)
위 치 - 경북 경주시 교동 17-1번지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우리나라 졸부들의 부끄러운 행태로 뉴스거리가 풍성해 질 때면 당연한 수순처럼 그 다음 이야기로 비교되어 회자되던 경주 최부자 이야기. 언젠가 책에서 읽고 마음에 담았던 그 글귀를 경주 향교 가는 길목에서 다시 만났다. 경주 향교가 경주 최씨 고택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천년 고도 경주의 남쪽, 경주 역사 유적 월성지구를 옆에 두고 앞으로 남천을 바라보는 교촌마을은 서로 잘 어울리는 고택과 향교를 안고 은근한 옛 향기로 우리의 정신을 치유하는 힘을 주는 곳이었다.
경주 향교가 있는 자리는 본래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창설한 국학이 있던 자리였는데, 이 곳이 고려 시대에는 향학(鄕學)으로,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졌던 것이다.
지금은 공사를 하고 있어 다소 어수선한 넓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얼마가지 않아 향교의 외삼문이 보인다. 경주향교의 외삼문은 맞배지붕 형식으로 솟을삼문이나 풍화루와 같은 이층 누 형식의 외삼문에 비하면 낮고 소박하지만 오래 된 것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품격과 단아함이 있었다. 잠겨진 외삼문을 지나쳐서 돌담을 따라 걸으면 곧 길은 왼편으로 접어지고 교직사로 통하는 나무대문이 ‘경주향교’의 명패 아래 열려있다. 대문을 'ㄷ'자 형태로 마주보고 있는 교직사 앞마당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우물 가장자리가 둥글게 다듬어져 예사롭지 않은 우물터가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 덮개가 덮여있지만, 그 옛날 치런치런한 우물물을 잘 말린 바가지로 퍼내며 쾌분잡했을 아낙네들의 수다가 들리는 듯 하였다.
앞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맞은편으로 나있는 문은 동재의 뒤편으로 연결되어 있다.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을 얹은 명륜당은 전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에 마루를 앞에 둔 개방형 구조이다.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 두리기둥이 자연석 주초를 밟고 있고 팔작집에서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활주가 귀퉁이를 받치고 있다. 중앙의 세 칸은 대청형식인데 뒤쪽으로 판문이 있어서 여름철에는 그 문이 시원하게 열렸을 것이다. 양쪽 끝 두 칸은 교관의 거처였을 법한 방이 있는데, 전면에는 문턱도 없는 낮은 키로 궁판 없는 띠살문이 있고 대청 쪽으로는 불발기 문이 장식적 효과를 낸다.
명륜당 동쪽 뒤편으로 비석과 존경각이 있다. 전면 두 칸의 존경각은 둥근 기둥이 풍판 있는 맞배지붕을 받들고 있는 폐쇄형구조로 각 칸에 궁판이 있는 띠살문이 출입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명륜당의 좌우에서 호위하듯 서 있는 동재와 서재는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으로 마루가 있는 개방형 구조이다. 덤벙 주추를 딛고 선 둥근 기둥이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을 받치고 있고 각 칸마다 띠살문이 단정하게 닫혀있다.
동재의 남쪽 측면 앞에는 문묘부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있는데, 대성전의 뒤뜰로 통한다.
경주향교는 평지에 지어진 향교의 전형적인 구조인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동재와 서재 앞 쪽으로 기와를 얹은 낮은 돌담이 문묘부를 빙 둘러 감싸고 있다. 만약 외삼문으로 들어왔다면 제일 먼저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신삼문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성전과 명륜당은 외삼문에서 시작하여 신삼문, 대성전을 지나 명륜당을 끝으로 하는 남북 축 선상에서 동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남향으로 배치 되어 있다. 외삼문과 마주보는 신삼문은 네 개의 둥근기둥이 덤벙주추를 딛고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을 받들고 있는데, 문 중앙에 그려진 세 개의 태극문양이 세월이 바래어 낡은 것에서 느껴지는 정겨움이 있다. 신삼문에서 대성전으로 이어지는 길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놓아 위엄을 살렸다.
대성전은 최근 문화재청에 의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폐쇄형 구조의 전면 세 칸,측면 세 칸 규모의 대성전은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을 얹은 주심포계 외1출목 이익공식건물이다. 삼 단의 장대석 기단을 위엄있게 쌓고 맞배지붕의 귀퉁이에 활주를 받쳤다. 둥근 기둥 사이 각 칸마다 붉은 칠을 한 판문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주향교의 대성전은 연혁이 분명하고, 공포와 창호 및 가구에 고식의 기법이 잘 남아 있으며, 대성전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 묵서명을 통하여 대성전의 중건년대와 당시 참여한 장인 등의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크다고 한다.
동무와 서무는 전면이 열두 칸이나 되는데, 세 칸에 한 칸씩 설치된 궁판이 있는 띠살문이 출입구이다. 이러한 규모는 성균관 및 전주· 강릉· 경주· 상주 등 관찰사가 머무는 큰 읍에만 설치하였던 대설위 향교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현재는 오성과 송조, 신라조, 고려조 각 2현, 조선조 14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지만, 예전에는 136위를 모시고 있는 강릉향교 못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동무와 서무는 덤벙주추 위 두리 기둥이 겹처마를 받치고 있는 폐쇄형 구조로 풍판이 있는 맞배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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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밀양시 밀양향교 ( 密陽鄕校 )
지 정 - 경남유형문화재 제214호 ( 1983. 8. 6. )
위 치 -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인구 십만의 도시 밀양은 1989년 '읍'에서 '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밀양시와 밀양군이 통합되면서 두 개의 읍과 아홉 개의 면, 여섯 개의 동으로 형성된 도·농 복합형의 도시로 소박하고 고전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도시다.
밀양향교는 밀성(密城) 손(孫)씨 집성마을인 교동마을 뒤 경사지에 위치해 있다. 경주향교가 만석꾼 경주 최씨의 전통가옥 옆에 있었는데, 밀양향교는 밀성 손씨 고택 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어서 명예와 교육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보게 한다.
밀양향교는 1100년경에 창건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선조 25년(1602년) 부사 최기가 현재 위치에 중건하였고 대성전은 순조 21년(1821년) 부사 이현시(李玄始)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좁은 골목 옹색하게 서 있는 홍살문은 나무도 아닌 것이 홍살문인 척 하여 비감을 주었고 외삼문은 향교의 출입문 기능을 풍화루에 맡긴 채 한 쪽으로 물러나 있다.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향교는 제 몫을 뚝 떼어 주민들에게 옆을 내주고 있었다. 그 옛날 향교의 외곽 담장을 거느렸을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솟을 지붕 외삼문은 지금은 문이 없어지고 중앙 칸만 통로가 되어 서 있는데, 그 통로를 빠져나오면 주민들이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넓은 공터 앞으로 비로소 풍화루가 보인다.
풍화루는 자연석 기단 위에 화강암 원뿔 주추를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는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2층 누형식으로 팔작지붕 아래 초익공결구가 보이는 5량구조의 건물이다. 정문은 아래층의 가운데 1칸만 출입문을 달았고 상부 누마루에는 계자각난간(鷄子脚欄干)을 설치하여 기교를 주었다.
밀양향교는 가로로 길고 세로로 짧은 경사지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병렬형 배치이다. 일직선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풍화루에서 명륜당으로 이어지는 축을 중심으로 양쪽에 동, 서재가 대칭을 이루고 외삼문과 내삼문, 대성전을 잇는 다른 한 축이 동무와 서무를 대칭으로 거느리고 있다. 그 외에도 동재 뒤편으로 교직사가 있다.
자연석 기단을 높이 쌓고 덤벙 주추에 두리 기둥이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을 받든 명륜당은 5량(五樑)구조에 2출목 2익공 결구를 하였고 전면 다섯 칸, 측면 두칸 반으로 마루가 있는 개방형 구조이다. 경주향교의 구조와 비슷하게 중앙 세 칸은 대청형식으로 뒤편에 판문을 설치하였고 양 끝 두 칸은 마루가 있는 방으로 띠살문을 달았다.
동재와 서재는 자연석 기단을 쌓고 덤벙 주추 위 두리기둥을 놓은 맞배집으로 전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마루가 있는 개방형 구조이다.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 반의 3량구조에 민도리집이며, 명륜당을 중심으로 양 쪽에 배치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남쪽으로 반 칸씩을 더 내어 툇마루를 놓았는데 밑에는 아궁이가 있고 위는 기와를 얹어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였다. 북쪽으로 한 칸, 남쪽으로 두 칸은 머름 위 띠살문을 출입문으로 삼은 방이고 중앙 두 칸은 대청형식으로 뒤편에 판문을 달았다.
문묘부는 내삼문이 버티고 있는 가운데 기와를 얹은 토담이 빙 둘러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보호하고 있다.
중앙칸이 유난히 긴 솟을 지붕 형식의 내삼문을 지나면 양쪽으로 층계를 올린 7단 높이의 장대석 기단이 5량 구조의 대성전을 모셨다.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전퇴가 없는 폐쇄형으로 풍판이 있는 맞배집 대성전은 각 칸마다 안쪽으로 열리는 쌍여닫이 통판문을 넣어 특별함을 더 했다.
자연석 기단을 삼 단 높이로 쌓고 덤벙 주추에 두리 기둥이 3량 구조의 초익공 결구로 이어진 동무와 서무는 전면 세 칸, 측면 한 칸으로 풍판이 있는 맞배집이다. 가운데 칸에 안쪽으로 열리는 쌍여닫이 판장문을 하였고 양 협간의 전면에는 채광을 위한 붙박이 나무 살창을 달았다.
향교 제향은 매년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初丁日)에 각각 봉행하는데 공자를 정위에 모시고 동배에 안자와 자사, 서배에 맹자와 증자를 배향위로 모셨으며 동벽과 서벽에 신라조 2현, 송조 2현, 고려조 2현을 모시고 있다. 동무와 서무에는 조선의 14위를 봉안하여 춘추로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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