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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향교(樂安鄕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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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350년 넘은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는 낙안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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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2월 08일(수) 14:09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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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낙안향교(樂安鄕校)
지 정 - 시도유형문화재 112 (1985. 02. 25 지정)
위 치 - 전남 순천시 낙안면 교촌리 222
수령 350년 넘은 은행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는 낙안향교
낙안읍성에서 남쪽으로 5분 정도 내려가다 보면 857번 2차선 국도 왼편으로 하마비와 비석군을 앞세운 홍살문이 보인다. 향교가 있는 서향의 골목 안에는 금빛 겨울 햇살이 돌담을 채색하여 저마다의 공간으로 친밀하게 포개져 얼굴을 부비는 돌들의 얼굴이 정겹다. 몇 걸음 옮기자 낙안향교의 외삼문인 듯 보이는 맞배지붕 삼문이 「경앙문(景仰門)」의 현판을 걸고 있다. 알고 보니 향교의 외삼문은 아니고 「충민사」의 외삼문이다. 「충민사」는 조선 인조 때 낙안 군수를 지낸 바 있는 ‘임경업 장군’과 낙안읍성을 쌓은 주인공으로 알려진 ‘양해공 김빈길’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경앙’이란 문구를 통해 존경스런 인물을 섬기고 우러르는 공손하고 삼가는 마음이 느껴진다.
낙안향교는 「충민사」와 돌담을 사이에 둔 이웃이다. 향교의 외삼문은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충민사」태극문양에 비하면 칠이 선명하였다. 외삼문은 닫혀있으나 향교는 교직사를 통해 열려있다. 교직사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깔끔하게 청소 된 넓은 마당 왼편으로 명륜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많은 향교가 그렇듯 교직사는 관리인의 살림집으로 상시 사람이 거주하면서 향교를 관리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낙안향교는 효종 9년(1658)에 낙안 동쪽 농암등(籠岩嶝)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여러 차례에 걸쳐서 수리하였다. 향교는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의 공간이 뒤쪽으로 갈수록 약간 높아지는데 높이의 차이는 크지 않아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앞쪽 낮은 터에 명륜당과 동재 서재 등으로 이루어진 강학 공간이 있는데, 동재와 서재가 뒤쪽으로 배치된 전당후재의 구조로 명륜당이 동재와 서재를 바라보며 북향으로 서있고 뒤쪽 높은 터에 막돌담장으로 둘러진 문묘부가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이다. 약 830평의 대지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하여 향교가 갖추어야 할 기본 건물을 잘 갖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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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쪽의 강학공간에는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며 서 있고 마당 가운데로 명륜당과 내삼문을 잇는 자연석 돌길과 동재와 서재를 이어주는 자연석 돌길이 교차하며 십자 교차로를 만들었다.
명륜당은 전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폐쇄형 건물로 좌우툇간은 방이고 협칸과 중앙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5량집으로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 겹처마 아래 둥근기둥이 자연석 주초를 딛고 있고 공포는 초익공식이다. 명륜당 뒤편 왼쪽으로는 수령 350년이 넘은 우람한 은행나무가 굵은 가지를 하늘로 뻗어 하늘의 정기를 향교에 전해주는 듯 하다. 효종 9년(1658) 낙안향교가 현 위치로 옮겨 올 때 같이 심은 은행나무는 이제 든든한 수문장처럼 향교를 지키고 있다.
동재는 전면 다섯 칸, 측면 한 칸의 전퇴가 있는 개방형 구조로 덤벙주초 위 사각기둥이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을 받들고 있다. 좌측 툇간은 누마루 형식이며 중앙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서재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구조로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 아래 사각 기둥이 덤벙주초를 딛고 있다. 동재와 같이 전퇴가 있는 개방형 구조이며 전면에 툇마루가 있고 각 칸 마다 궁판이 있는 한 쌍의 띠살문이 단정하게 서 있다.
명륜당과 마주보고 있는 내삼문 앞에는 굴곡진 삶에 등뼈가 휜 향나무 세 가지가 어지럽게 얽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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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을 삼문 형식의 내삼문을 지나면 박석을 깐 문묘부의 정면에 대성전이 마주 보인다. 박석을 깐 마당 가운데로 화강암 진입로가 내삼문에서 대성전까지 뻗어있다. 5성(五聖)과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대성전은 전면 세 칸, 측면 세 칸 구조로 풍판이 있는 맞배집이다. 자연석 주초 위에 세워진 둥근 기둥이 초익공식 공포를 받치고 위로 겹처마를 얹었다. 가구는 2고주 5량 구조이며 폐쇄형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각 칸마다 한 쌍의 좁은 판문을 달았는데 그 모습이 옹색해 보여 조화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대성전 현판 양 옆으로 네 폭의 그림이 걸려있는데, 오른 편에는 십장생 중 학과 거북, 왼 편에는 청룡과 호랑이 그림이다. 한 쪽은 십장생, 한 쪽은 사방신을 주제로 하고 있어서 어찌 해석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림은 동무 위에도 걸려있는데 여섯 폭의 그림이 하나의 이야기인듯 새와 사람과 꽃이 번갈아 나오지만 역시나 해석은 불가능하다.
동무와 서무는 전면 두 칸, 측면 한 칸의 폐쇄형 구조로 덤벙주초 위 둥근 기둥이 초익공식 공포를 받쳤고 풍판이 있는 맞배지붕을 이고 있다. 각 칸마다 한 쌍의 좁은 판문이 있는데 서무에는 동무와는 달리 그림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지금은 전교 1명과 여러 명의 장의를 중심으로 운영되어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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