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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은 고창사람 – 로스앤젤레스 골든 볼 조익환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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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무대로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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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8월 17일(금) 12:55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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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대한민국을 너머 세계 도처의 낯설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랑스러운 고창사람들이 있다. 이번 “만나고 싶은 고창사람”의 주인공은 멀리 LA(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며 그 지역의 신문과 방송에서도 극찬을 받는 조익환 대표이다. 그의 부친은 고창지역에서 몇 차례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바 있는 고 조병후 씨로 80년대까지 투표에 참여해 본 고창사람이라면 그 휘자(諱字)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기자가 만난 조익환 대표는 그 부친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눈빛과 의지가 살아있는 당당한 인물이었다.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의 실타래를 따라 한 편의 드라마 같기도 한 그의 삶으로 들어가 보자.
▶ 미국에 오신지는 얼마나 되었으며,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까?
미국 뉴욕에 도착했을 때가 81년 4월 이었으니까 벌써 30여 년 넘게 미국생활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더 큰 세상, 더 넓은 무대를 배경으로 사는 삶에 대한 동경이 항상 있었지만 특별한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아버님의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그 당시의 현실에 대해 절망감이 컸기 때문에 돌파구를 찾아 인생을 배팅하듯 미국행을 선택하였습니다. 명색이 유학이었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서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수중에 달랑 60달러가 남아 있었습니다.
▶ 집안에서 도와주어도 낯선 이국 생활이 힘들 텐데 누구의 도움도 없는 타국에서 처음에는 고생을 많이 하셨겠네요?
수중에 60달러 지니고 왔다고 말씀드릴 때부터 짐작하셨겠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습니다. 처음에 마켓에서 일을 하였는데, 여러 명이 같이 기거하는 방에서 생활을 하며 일요일까지 쉬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그 당시 받은 돈이 주당 200불이었습니다. 저녁 먹을 돈을 아끼려고 저녁까지 배가 고프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을 제일 늦게 먹고, 다른 사람들이 “너는 언제 앉느냐?”고 물을 정도로 하루 종일 앉지도 않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무 밑창으로 튼튼하게 만들어졌던 랜드로바가 한국에서 유행이었는데, 그것을 신고 미국에 왔었습니다. 그 신발의 고무 밑창이 다 닳아졌는데, 미국에서는 그것을 수리할 수가 없어서 다 닳아진 랜드로바 세 켤레의 밑창을 수리해 달라고 부친 편에 한국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 자신을 위해 동전 하나를 함부로 쓰지 않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생활을 하였는지 영양실조로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인정을 받아서 2년 동안은 매니저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매니저로 일하면서도 가게의 수익을 올리기 위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고 도둑을 잡는 등 에피소드들이 많았습니다.
▶ 지금의 터전은 LA인데, 미국 생활을 처음 시작하신 곳은 미국 동부 뉴욕이군요. 도중에 서부로 이주하신 계기가 있었을 것 같네요?
뉴욕 마켓에서 정말 악착같이 일해서 종자돈을 마련하였고 저의 능력을 신뢰하신 사장님께서도 돈을 빌려주셔서 35000불로 뉴욕에 있는 피자 가게를 인수하였습니다. 저희가 만드는 피자가 맛도 있었겠지만 가게 자리가 좋았기 때문에 장사가 아주 잘 되었습니다. 38명의 직원을 부리면서 자리가 380석 정도 되는 피자가게였는데, 새벽 4시 반에 문을 열어서 점심까지만 영업을 하고 닫아도 하루 매출이 평균 7000불 정도였습니다. 9개월 동안 얼마나 가게가 잘되었던지 저녁이면 지폐를 밀가루 포대에 가득 담아 풀어놓고 셀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10월 블랙먼데이의 타격을 입었습니다. 엄청난 금융위기로 주변의 회사들이 모두 긴축재정에 들어가자 가게 매출도 심각하게 떨어져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긴 세월 죽을 고생을 하며 이루었던 모든 것들이 잿더미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가게를 정리하고 문을 닫을 때 바닥에 떨어진 동전 두 개를 줍는 제 모습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 때문에 뉴욕의 상징인 사과만 봐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 동안 받지 못했던 외상값만 겨우 건져서 차 한 대에 부모님을 비롯한 식구들을 모두 태우고 뉴욕을 떠나 누님이 생활하고 계신 LA로 오게 되었습니다. 뉴저지의 톨게이트를 지날 때 가게에서 마지막으로 주운 동전 두 개를 창밖으로 던지며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다시 너를 건지러 오마!’ 그것은 저의 미래에 대한 다짐이었고 희망을 향한 결의였습니다.
▶ 총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웠던 적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LA 생활도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사건 같습니다.
LA에 도착해서 처음에 누님의 가게에서 시간당 7.5불을 받고 일하였습니다. 지낼 집도 없어서 모시고 있던 어머니,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저와 식구들은 아이들의 이모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힘든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열심히 일하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뉴욕에서도, LA에서도, 성공을 거둔 지금도 저는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7월 강도를 당하였습니다. 그 날이 큰 아이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날짜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님 가게의 돈을 은행에 입금하기 위해 은행 앞에 도착하였는데, 오전 10시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도가 총구를 머리에 겨누며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돈을 주면 목숨을 빼앗지는 않겠지 싶어서 순순히 돈을 내놓았는데도 방아쇠를 당기려는 소리가 들려서 ‘이건 아니구나’ 싶어서 강도와 격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격투의 와중에 강도가 총을 세 방 쏘았는데 그 중 가슴 쪽에 두 방의 총을 맞고 생명이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심장에 맞지 않고 허파 쪽에 맞아서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참 힘든 시기에 저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제 아버님에 돌아가셔서 지금도 마음이 아픈데, 그렇게 어려운 시기마다 아버님께서 보살펴주시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 지금은 누구나 부러워 할 정도로 사업에 성공하셔서 현지의 언론들까지 인터뷰를 할 정도인데,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뉴욕에서 조금 남겨 온 종자돈과 LA에서 그 동안 번 돈으로 패밀리 식당을 열게 되었습니다. 가게를 인수할 당시에는 하루 매출이 300불에 불과했지만, 가게를 인수한 후 많은 매출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LA 지진과 폭동 때도 가게를 닫지 않고 일한 결과 하루 매출을 열 배 까지 올리게 되었습니다. 고객들의 요구와 성향을 분석하여 고객의 입맛에 맞춘 메뉴를 개발하고 고객 및 직원들과의 신뢰형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 고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개발한 메뉴를 주로 하여 프렌차이즈로 등록하였고 지금은 2개의 직영점과 18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지 않는 근성으로 일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고 직원을 비롯하여 고객과의 신뢰형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업 성공은 좋은 직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원들을 한 식구처럼 대하기 때문에 직원들의 대소사를 빠짐없이 챙길 뿐 아니라 열심히 일한 만큼의 보상을 해주며 독립할 수 있다는 비전을 줍니다. 특히 매니저들에게는 차를 선물하는 등 사장과 직원의 관계를 떠나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에 직원들이 타 업체에 비해 오래 일합니다. 이러한 ‘관계 맺기’는 직원들 뿐 아니라 고객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음식 맛을 지키는 것은 고객들과의 약속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치 않는 음식 맛을 지키기 위해 철두철미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고, 저희 집을 몇 번 방문한 고객들은 성향을 파악하여 취향에 맞게 빠른 서비스를 하기 때문에 고객들은 자신들을 기억해주고 남다른 대우를 받는 것에 만족하며 계속 찾아줍니다.
남들과 똑같이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남다르게 죽을 만큼 노력할 때 비로소 행운의 여신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 앞으로의 포부와 비전은 무엇인지요?
등록된 프렌차이즈 이름이 골든 볼(Golden Bowl)입니다. 저는 그 이름에서 아무 것도 없는 바탕에서 금을 만들어 내려 했던 중세의 연금술사들의 의지와 창조력 그리고 꿈을 느낍니다. 제가 디자인한 골든 볼의 마크에는 새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꿈을 향해 비상하는 황금 새처럼 항상 열정을 잃지 않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나 봅니다. 처음 프렌차이즈 사업을 시작할 때 20개의 지점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세 번째 가게를 열 때는 19호점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목표를 먼저 세워놓고 거슬러 내려옴으로써 목표를 잃지 않고 의지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0개의 지점을 넘어서서 40개의 지점을 열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적은 자본으로 창업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 마지막으로 고향사람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부모님, 형제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그것은 타국에서 그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도록 저를 지켜준 것은 멀게는 조상님들, 가깝게는 아버님으로부터 저에게 이어진 ‘고창’이라는 저의 뿌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조국이 있다는 것, 고향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제 삶에 큰 힘이 되어왔습니다. 고향을 지켜주신 모든 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항상 고창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를 잃지 않고 살 것입니다.
조 대표처럼 자랑스러운 고창사람들은 우리의 문화가 우리를 뛰어넘어 세계를 향할 수 있게 하는 돌다리일 것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장시간 대담에 응해주신 조익환 대표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더욱 원대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진하는 조 대표의 노력을 기대해 본다.
대담: 유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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