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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하얀 바탕에 우리는 어떤 새 그림을 그려 볼 것인가?

강헌희(자유기고가)

2013년 01월 11일(금) 09:58 [(주)고창신문]

 

봄은 봄대로 예쁜 꽃처럼 화사해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상쾌한 녹음이어서 좋으며, 가을은 가을대로 울긋불긋 단풍이 아름다워 좋다지만, 겨울은 겨울대로 백옥처럼 빛나는 순백의 설경을 이루니 또한 좋다. 새벽에 눈을 뜨고 베란다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니 밤새 내린 눈이 마치 평화의 십자군인양 시야의 세상만물을 온통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어느새 내 기억의 언저리에서는 잊혀 진 듯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동심이 되살아나 내 나이만큼 느려진 심장의 판막을 힘차게 두드려 준다. 나는 부지런히 움직여 주섬주섬 묵혀둔 겨울 등산장비를 챙겼다. 사회적인 그물망 조직을 벗어나 전후좌우 체면 가리지 않아도 좋으니 옷차림쯤이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그저 겨울의 찬바람에 온기가 부족한 내 체온을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보온을 하고 둔한 몸짓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퇴직 후 내 분신처럼 한통속으로 지내고 있는 두 친구와 함께 전주 근교의 깊은 산골마을을 다녀오기로 약속한 날이다.

하늘에서는 환희의 축복인 것처럼 펑펑 눈이 쏟아져 내린다. 편리한 문명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겁 없이 차를 끌고 나왔다가 미끄러운 길을 보행인보다 더 느린 동작으로 기어가고 있다. 우리는 지혜롭게도 모처럼 대중버스를 이용하기로 했지만 기다리던 버스가 정상적인 정류장 통과시간을 무려 1시간이나 늦게 오는 바람에 잠시 할 일 없이 서성이는 길거리의 낭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랴. 어릴 적, 추운 날씨에 감기 얻어 온다며 한사코 외출을 말리시던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고 구멍 난 양말을 꿰어 신은 채 털장갑 하나도 얻어 끼지 못하는 궁색한 옷차림새로 몇날 며칠 어설픈 솜씨로 얼기설기 짜 맞춘 눈썰매와 사과궤짝을 뜯어내어 발바닥 모양을 본떠 만든 판 떼기 스케이트를 들고 동네 언덕배기 눈길을 찾아가 희희낙락 어린 동생들 데리고 미끄름 놀이를 즐기던 추억속의 동영상을 꺼내어 보는 애틋함만으로도 이까짓 추위쯤이야 능히 견디고도 남음이 있다.

뒤늦게 도착한 버스 기사 아저씨는 사과 한마디도 없이 노면의 불안정으로 인해 운행의 종점까지는 갈 수 없음을 승객들에게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애초의 행선지를 포기하고 모악산 줄기를 타고 올랐다. 연신 가쁜 호흡의 산물로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걷는 눈길은 천국에 이르는 비경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울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하고 감탄사를 붙여 바라보니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니 우리 곁을 지나쳐 가는 산행인들 마저 모두가 착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렇다. 이제는 미워하고 원망하고 불신하고 화내는 마음을 거두고 착하고 아름답고 서로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지난 세월에 온갖 부패와 오욕으로 더럽힌 인간의 마음을 순치하기 위하여 하늘은 이 땅에 백설의 청정제를 내려 하얗게 뒤덮으려 함일 것이다. 우리는 미끄러운 눈길을 기어 내려오면서 아주 가끔씩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에 파묻혀 평화를 누리고 있는 숲속의 자연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산길을 타고 내려와 마을에 이르렀다. 산의 아름다운 설경에 취해 잠시 잊고 있었던 배고픔이 몰려온다. 우리는 ‘시골집 청국장’이라는 이름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허름한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구수한 청국장이며, 된장국이며 김치찌개에 어머니 손맛 나는 맛깔스런 밑반찬을 안주로 하여 막걸리와 모주 한잔씩을 기울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시골스런 운치였다.

오늘 눈 덮인 산을 찾아가 금년 한해에 오염되었던 내 심장의 피를 새로운 피로 수혈하였으니 이제 또다시 하얀색 삶의 바탕에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희망의 새 그림을 그려 보아야겠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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