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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순례]충북 옥천군 옥천읍 '정지용 문학관'

평온한 공감으로 현대인들의 각진 마을을 쓰다듬는 '향수'의 정지용 시인

2013년 06월 14일(금) 09:49 [(주)고창신문]

 

정지용 문학관

평온한 공감으로 현대인들의 각진 마음을 쓰다듬는 '향수'의 시인 정지용

주소 :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56 (하계리 39번지)

ⓒ (주)고창신문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친근하지만 아름답고 소박하지만 깊이가 있는 한 편의 수채화를 보는 듯, 평온한 공감으로 현대인들의 각진 마음을 쓰다듬는 '향수'의 시인 정지용. 오래 전 그는 이름자체가 터부였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정지용 시인은 '정○용' 시인이었어. 그 때는 시인의 이름을 쓰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시절이었지"
정지용 문학관에서 시를 감상하던 중년부부의 대화는 부조리한 근대사가 삶 자체로 화석화되어버린 시인의 안타까운 삶에 대한 회한을 느끼게 한다. 1982년부터 본격화되었던 정지용 문학회복운동이 결실을 맺은 때가 1988년 3월 31일이니, 25년 전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같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화일 것이다. 30년 넘게 월북작가라는 굴레에 묶여 작품은 물론 이름마저 어둠에 묻혀있던 시인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제 햇빛아래 당당한 자랑스러운 이름이 되어 2005년 건립된 그의 문학관에서 둥근 테 안경에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우리를 기다린다.

ⓒ (주)고창신문


정지용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 하계리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 4대 독자로 출생하였다. 정지용의 아명 지용(池龍)은 용이 연못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는 태몽에서 유래하였는데, 한자는 달랐지만 본명과 필명을 모두 지용으로 썼다. ‘정지용’을 빠르게 읽으면 ‘정종’이 되기 때문에 ‘정종’이라는 별명과 함께 ‘닷또상’,‘신경통’이라는 별명은 그의 아담했던 키와 급한 성격을 말해준다. 부친이 한약상을 경영하였지만,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12세에 현재의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인 옥천보통공립학교를 졸업하고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하지만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이후 15년간 헤어져 살게 된다.

그는 학업성적이 뛰어나 장학금으로 공부했을 뿐 아니라 문예활동도 활발하게 하여 교사들의 귀여움을 받은 것은 물론 학생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었다. 그가 2학년 때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이선근과 함께 주동자가 되어 집회에서 연설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무기정학을 당했지만 선배들의 중재로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졸업과 동시에 휘문고 교비로 일본의 교토에 있는 도시샤 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6년 후인 1929년 동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국문단과 일본문단에 등단했다. 1926년 6월 『학조(學潮)』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의 시와 시조 및 동요를 포함한 9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이어서 『조선지광(朝鮮之光)』, 『신민(新民)』 등에 작품을 계속 발표하여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고, 일본의 『근대풍경(近代風景)』에 3년간(1926. 12~1928. 2)『카페 프란스』, 『바다』, 『갑판위』 등 시 13편, 수필 3편을 발표했다.
『근대풍경』의 편집인은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였는데, 그는 유학시절의 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끼친 일본문단의 비중 있는 문인이었다. 시인이 일찍부터 시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시어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하쿠슈와의 간접적 만남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졸업논문 『Imagination in the Poetry of William Blake』을 통해서 윌리엄 블레이크 역시 시인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9년 3월 도시샤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9월에 모교 영어 교사로 취임하여 종로에서 살게 된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 지용은 1930년 『시문학』 동인에 가담하게 되면서 문단의 중심권에 자리를 잡게 된다. 『시문학』의 출발은 김영랑과 박용철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지용은 용아(龍兒) 박용철이 『시문학(詩文學)』에 이어 발간한 잡지 『문예월간』과 『문학』에 계속 작품을 발표했고 이런 인연으로 용아는 지용의 첫시집 발간을 주선하여 시문학사에서 『정지용시집』이 발간되었다. 1933년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靑年)』의 편집 고문역을 하면서는 많은 신앙시를 발표하였고, 8월에는 반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이종명, 김유영이 발기한 <9인회>의 창립회원으로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문장(文章)』지의 시부문 고선위원이 되면서 30년대 시단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 『문장』지로 인하여 한국문단에 추천제가 정착되었다고 할 만큼 추천이 엄격하고 권위가 있었다. 지용의 추천으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청록파 시인을 비롯해 이한직, 김종한, 김수돈, 황민, 박남수 등의 시인이 등단하게 되었다.
지용은 1945년 해방 직후 모교의 교사직을 사직하고 이화여전(梨花女專)에서 한국어, 영어,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취임했다. 46년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취임하면서 교수직과 주간직을 겸하기도 하였으나 교수직을 오래 하지는 못하고 48년 2월까지 재직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해방 후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당시 좌우익으로 대립되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로와 장래가 불투명한 정치상황에서 그는 방황했던 것이다. 당시 그가 좌우익의 정치·문학파쟁에 휘말려 혼란을 겪은 것으로 보이지만 평화통일과 자주국가 건설을 희구하였던 순수한 민족주의자로서 일관된 하나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그의 비극적 종말은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고 다만, 6.25전쟁 중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평양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평양감옥이 폭격을 당하면서 죽었다는 설이 있다.
1988년 해금과 더불어 ‘지용회’가 결성되면서 정지용 시인을 다시 평가하기 위한 노력이 탄력을 받아 1996년 생각가 복원되고 2005년 생가 옆으로 문학관도 건립되었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에 들어서면 시인의 생가에 이르기도 전에 이곳이 시인의 고향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 정지용의 생가와 문학관이 위치한 옥천읍 하계리는 구읍으로 불리는데,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새로운 읍이 생기면서 소외된 구읍은 오히려 그 때문에 옛 시절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시어로 간판을 달고 시가 적힌 담장을 두른 오래된 상가들, 구읍 전체가 시인의 원고지 같은데 어찌 시인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알고보니 시인의 생가를 찾아 우리가 걸어 온 그 길은 ‘시문학 간판거리’였다. 이것은 '향수30리-멋진 신세계' 라는 옥천의 문화예술브랜드로서 한국 최초 모더니즘 시인의 감각적 시작품과 금강을 주제로 건축가, 디자이너, 아티스트, 문학인 등 100여명이 참여하여 2년여의 시간에 걸쳐 만들어졌다. 이러한 노력은 방문객들에게 옥천 사람들의 생활 속에 녹아있는 시인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면으로 청석교를 건너면 바로 보이는 '향수'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청석교 아래를 흐르는 물길은 변함이 없으련만 그 개천에서는 어린 시절 고기를 잡던 친근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이 모여 사는 동네 한 복판을 흐르는 개천에서 그런 기대를 품는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되어버린 요즘 세상이지만, 시인의 생가 앞을 흐르는 개천이니 만큼 정말 실개천처럼 복원할 수는 없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생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부엌을 제외하고 정면 2칸은 툇마루를 달고 있다. 먼저 와 앉은 햇볕이 자리를 다독이며 앉으라 권한다. 잠시 걸터앉아 방안의 질화로와 등잔을 마주 하였을 시인의 가족들을 상상해 본다.

부엌 문 옆 이곳이 정지용 생가임을 알리는 표시판을 또 하나 만날 수 있다. 이 표시판은 정지용의 모습과 함께 그의 태어난 년도와 날짜, 생가가 언제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지어졌다는 내용을 담고있는데, 1988년 정지용의 해금조치가 있은 후 모임이 시작된 ‘지용회’가 생가가 복원되기 전 이곳 어디쯤에 그 자취만이라도 전하고자 붙여놓은 표시판을 기념 삼아 다시 붙인 모양이다.
생가에 있는 두 개의 사립문 중 하나는 문학관의 뜰로 연결된다.
높이 서 있는 시인의 동상과 잠시 눈인사를 하고 물이 흐르도록 설계된 좁은 수로를 지나 문학관 문을 열면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신어야 한다. 신발을 갈아 신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신발 끈을 풀어야 하는 등산화를 신고 왔다면 내가 어떻게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주)고창신문



문학관에 들어서면 안내데스크가 정면에 있고 왼편으로는 1988년 5월부터 시작된 지용제와 관련하여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들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우측으로 실물크기의 시인이 의자에 앉아 우리를 당신 옆에 초대한다. 많은 경우 모형으로 만들어 놓은 밀랍인형은 그 상태가 조잡하여 오히려 그 곳의 수준을 낮추는 역효과를 가져오는데 정지용 문학관의 이 인형은 마치 시인을 만난 듯 반갑기까지 하다. 어린아이들을 비롯하여 누구나에게 흥미를 주고 정지용 문학관을 차별화해주는 문학관의 명물이 된 것 같다.

문학관 내부의 동선은 우측 입구로부터 시작된다. 정지용 시인의 시 세계를 음악과 이미지로 전달하는 영상을 비롯하여 문학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문학전시실은 테마별로 정지용의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지용연보,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 등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테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용연보”는 정지용과 그의 시대를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의 전개 속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곳이며 스크린북에 상영되는 연상을 통해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 시인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지용의 삶과 문학”은 연대기와 주제별로 향수,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문과 동시 등 4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지용문학지도”는 한국 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의 시문학에 관해 알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시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 흐름 속에서 정지용시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 할 수 있다.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는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 『문학독본』,『산문』등 정지용 시인의 시와 산문집 원본을 전시하고 육필원고 및 초간본의 내용을 영상으로 감상 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상황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이상과 같이 테마를 따라 가는 동선은 전시실의 벽 3면을 가득채운 문학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흥미성과 오락성을 갖춘 문학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는데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법을 활용하여 관람객이 즉석에서 문학을 체험 할 수 있다.

문학체험은 관람객이 양 손바닥을 내밀면 자신의 손은 스크린이 되어 손 위에 흐르는 시어를 읽어보며 느끼는 “손으로 느끼는 시”,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성우의 시 낭송을 들으며 시를 폭넓게 이해 할 수 있는 “영상시화”,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가곡 향수를 감상 할 수 있는 “향수영상”, 이해하기 힘든 시어를 검색해 그 의미와 시적표현을 이해 할 수 있는 “시어검색”, 배경음악과 함께 자막으로 흐르는 정지용 시인의 시를 관람객이 직접 낭송해 보고 녹음된 테이프를 가져 갈 수 있는 “시낭송 체험실” 로 구성되어 정지용의 시문학 세계를 눈과 귀,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
그 외에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 인간미 등을 서정적으로 회화적으로 그린 다큐멘타리 형식의 영상이 상영되는 “영상실”과 강좌, 시 토론, 세미나, 문학 동아리 활동 공간이며 단체관람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 할 수 있는 열린 문학공간인 “문학교실”이 마련되어 있다.

198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제1회 지용제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지용시문학상이 제정되고 지용문학심포지움이 개최되면서 이제 정지용시인은 옥천군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콘텐츠로 자리를 잡았다. 해마다 5월 올해로 26회까지 이어진 지용제는 청소년문학상, 지용문학상, 지용신인문학상, 전국지용백일장, 지용문학포럼, 가족시낭송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면서 지역 최대 축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문학의 산실이자 요람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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