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6-04-22 | 05:53 오후

로그인 회원가입 기자방 원격

    정치/지방자치 사회 교육 문화/생활 지역소식/정보 고창광장 독자위원회 전북도정 기타

 

전체기사

커뮤니티

독자투고

공지사항

개업 이전

편집회의실

뉴스 > 뉴스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문학관 순례] 금병산 실레마을 김유정 문학촌

미당 서정주 시문학관을 통해 본 우리나라 문학관의 현황 ⑦

2013년 07월 31일(수) 17:58 [(주)고창신문]

 

김유정 문학촌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실레길 25)

토속적 어휘로 부조리한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김유정

ⓒ (주)고창신문



우리나라 60여 곳이 넘는 문학관 중 드물게 ‘문학촌’이 있다. 무덤도 후손도 없고 유품조차 한 점 남기지 않았다는 김유정 문학촌. 작가의 유품이 한 점도 없어서 문학관이 되지 못하고 문학촌이 되었다고는 하나 가보면 누구나 문학‘촌’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 하다고 느낄 것이다. 서울에서 춘천까지 경춘선 전철을 타고 강촌역을 지나 김유정 역에서 내리면 당신은 이미 김유정 문학촌의 손님이다.

ⓒ (주)고창신문



김유정 역은 당초 신남역이던 것이 2004년 12월 1일 춘천의 문인 김유정을 기리기 위해 김유정 역으로 역명을 변경하였다. 경춘선이 개통된 것은 1939년, 그가 세상을 떠나고 2년 후이니 살아생전 타지 못했던 경춘선의 끝자락을 이제 그의 이름이 영원히 지키게 되었다.

이 역은 역명판과 행선판이 궁서체인 유일한 역으로서, 또 역 건물이 영월역, 경주역, 전주역, 구례구역과 더불어 한옥으로 지어진 역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인물 이름을 철도역에 붙인 최초의 역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2010년 12월 21일 경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면서 김유정 역은 구 역사를 남겨두고 전철역으로서의 신 역사 시대를 열었다. 구 역사는 철거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으나 역사 내부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경춘선 무궁화호에서 고별 운행한 객차 2량과 7160호 디젤 기관차가 같이 보존되어 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경춘선의 옛 철로는 이제 레일바이크 길로 고쳐져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추억만들기 명소가 되었다. 그 레일파크 광장에는 많은 문인들의 작품을 모아 전집형태로 세워놓은 책 조형물이 독특하고 화려하여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최근에는 또 다른 소식도 들린다. 2013년 7월 25일 신동우체국을 ‘김유정우체국’으로 이름을 바꾸는 명명식이 있었고 8월 1일 부터는 전 세계 어느 곳에든 ‘김유정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가 배달될 것이라고 한다. 가난하고 심한 말더듬이였던 그에게 편지는 짝사랑 여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보냈던 편지만도 백삼십 여 통에 이른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김유정우체국은 그가 이루지 못했던 연정의 안타까운 이름인 듯도 하다. 김유정 문학촌을 비롯하여 김유정 역과 김유정우체국에 이르기까지 춘천 사람들의 김유정 사랑으로 더불어 우리가 행복하다.

ⓒ (주)고창신문



김유정 역에서 오른편으로 레일파크가 있다면 그 반대편 쪽으로 5킬로미터 거리에 실레마을 이야기길이 시작되는 김유정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실레는 ‘시루’의 강원도 사투리로 김유정은 그의 수필 “五月의 산골작이”에서 그의 고향을 이렇게 소개한다.

“강원도 산골,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 앞뒤 좌우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서울로 갔던 그가 고향에 다시 돌아온 것은 연희전문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장안에 파다하게 소문이 날 정도로 열렬하게 짝사랑의 편지를 보냈던 기생 박녹주와의 사랑마저도 끝내 이루지 못한 22세였다. 그런 그에게 실레마을 농민들의 삶과 들병이들 그리고 모든 나무와 풀, 새소리 바람소리 가득했을 산길, 그 어느 것 하나 사무치지 않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름도 고운 금병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진 실레마을은 이제 실레 이야기길 열여섯 마당의 제목으로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따라 우리를 안내한다. 이 이야기 길은 흙이 많은 육산이라 걷기가 편하고 아름답다고 소개되어 있었지만, 며칠 호되게 내린 여름 장마가 끝내 산길을 무너뜨려 탐방이 통제되는 바람에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을 비롯하여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등 재미있는 열여섯 마당의 길 이름을 읽으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 (주)고창신문


김유정문학촌은 2012년 3월 27일 한국문학관 협회가 그 당시 협회에 가입된 58개의 문학관 중에서 선정한 ‘최우수 문학관’이다. 그 명예에 걸맞게 문학관의 환경이 잘 꾸며져 있었고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가 이 곳 저 곳에서 해설사 선생님을 중심으로 해설을 듣는 학생들의 무리가 활기있어 보였고, 기념행사만 해도 ‘김유정 문학제’,‘김유정 문학상’,‘김유정 신인 문학상’ 등을 비롯하여 13개에 이르는 기념행사가 치루어지고 있어서 유리상자 안의 유적같은 문학관이 아니라 끊임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뿌리와 같은 문학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비가 오는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닭싸움으로 핏대를 올리는 점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가 옆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린다. 이렇듯 생가의 마당터에는 “동백꽃”과 “봄봄”의 이야기가 동상으로 재현되어 있어 재미를 더한다. 잘 꾸며진 연못과 정자를 지나 몇 계단 오르면 평지에 2002년 복원된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김유정의 조카 김영수가 집의 구조와 크기 등을 상세히 기억하고 있어 직접 평면도까지 그려 복원하였다는 생가는 안방과 대청마루 사랑방 봉당 및 부엌, 곳간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자 형태의 초가집이다. 사각형의 겹집으로 된 가옥 중앙에서 올려다보면 장방형의 액자에 채집된 하늘이 오히려 우리를 내려다본다. 갇힌 공간이면서 먼 우주로 열리는 그 공간에서는 대상이 주체가 되고 주체는 다시 객체가 되어 김유정의 소설이 그 시대로 우리를 이끄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가 소통한다.

애초 생가는 김유정의 조부가 지었는데, 조부 때 그의 집안은 육천석을 추수하는 춘천의 명가로 조부 김익찬은 춘천 의병 봉기의 배후에서 재정 지원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부자집 도령이었던 김유정이 가난 속에서 짧은 생을 마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과 술과 여자에 빠져 순식간에 재산을 탕진한 ‘만부방’ 형 유근 때문이었다.
생가의 왼편 기념관으로 들어가기 전 김유정의 동상을 만난다. 책을 든 선생님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동상은 아마도 그가 1932년 고향인 실레마을로 돌아왔을 때 본격적인 계몽운동에 나서서 고향에서 야학당을 열고 학생들과 청년을 모아 농우회를 조직하고 이를 발전시켜 정식으로 간이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을 설립하여 운영할 당시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그 동상의 나이는 24살일 것이었다.

기념관에는 김유정의 일대기를 설명하는 영상과 김유정이 태어난 해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의 한국 문학사 연표를 비롯하여 30년대의 문예지와 동인지, 간행된 김유정의 작품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 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씨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난다. 1908년은 대한제국이 국가로서의 힘을 거의 상실한 시기로 곳곳에서 일제의 군대 해산령에 맞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그의 고향 실레마을은 서울로 진격하는 춘천 의병진의 후방기지로 일제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소작농, 유랑민, 노동자, 실업자 등 삶의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유정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하고 생생한 하층민들의 모습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그런 삶이었던 것이다. 1913년 유정의 집안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백여 칸의 집을 마련하여 이사를 한다. 서울로 이사 온 이듬해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뒤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유정은 9살의 어린 나이에 졸지에 고아가 된다. 11살까지 한문공부와 붓글씨를 익히던 유정은 12살에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5살에 졸업을 하고 졸업하던 해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검정으로 입학하여 1929년 21세가 되던 해에 졸업한다. 휘문고보시절에 후일 소설가가 된 안회남과 절친한 친구가 된다. 22세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제명처분을 당하고 23세에는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자퇴를 하고 만다.

재산을 모두 움켜쥔 형 유근은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해버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길 없었던 유정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들어 간 그 해 다섯 살 연상의 명월관 기생이던 명창 박녹주에게 첫 눈에 반해 석달 열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편지를 써서 장안이 떠들썩해질 정도로 구애를 하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설상가상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던 유정은 1931년 고향인 실레마을로 내려와 야학당도 만들고 충청도 지방의 금광을 비롯해 곳곳을 떠돌며 들병이들과 어울린다. 그런 체험들은 그의 문학적 용광로가 되어 그의 소설로 고스란히 재현된다. 24세 되던 1932년에는 야학당을 금병의숙으로 넓혀 간이학교로 인가를 받고 그해 6월에는 처녀작 “심청”을 완성한다. 그러나 형의 음주벽과 가족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면서 그마저도 접고 1933년 서울로 올라와 셋방을 전전하게 된다. 유정이 안회남의 권고로 본격적인 소설쓰기를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그 해 발족한 ‘구인회’에 들어가면서 그의 창작활동은 더욱 불붙기 시작하여 1937년 그가 죽기 전까지 발표한 작품이 50여점에 이른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1등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 입선함으로써 인정받는 작가가 되지만,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그의 병은 끊임없이 김유정를 괴롭힌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37년 요양 차 경기도 광주에 사는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지만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하고 오랜 벗인 안회남에게 쓴 편지를 끝으로 1937년 3월 29일 30살도 채 되기 전에 그 쓸쓸하고 짧은 삶을 마감한다. 결핵과 늑막염, 치질로 고생하던 그의 몸은 그의 유품과 같이 화장되어 강물에 뿌려졌고, 남아있던 그의 원고들을 조카가 간직하여 유정이 마지막 편지를 쓴 그의 친구 필승, 즉 안회남에게 전하였으나 필승이 그의 원고들과 함께 월북하면서 그는 유품 한 점 남아있지 않은 문인이 되었다.

한국 단편 문학의 결정체로 일컬어지는 김유정의 작품들은 풍자와 아이러니를 바탕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해학적인 재미가 있어서 우리 소설계에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낙비”를 비롯한 그의 많은 소설 속에는 무능하고 부도덕한 남편의 희생물이 되어 단돈 몇 푼에 몸을 파는 술집 작부나 들병이가 되는 아내와 아내의 매춘을 알면서도 분노도 죄책감도 없이 묵인하는 남편이 등장한다. 그의 소설 속에서 그들은 옳고 그름으로 판가름되거나 단죄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웃음과 재미를 주는 해학적 대상이다.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면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으레 부조리하고 비참한 삶의 모습이 포착되는데 그것이 그의 작품을 비범하게 하는 특징이다.

소설 “동백꽃”은 열일곱 동갑내기 남녀의 순박한 사랑이 그려진 작품으로 마름의 딸 ‘점순이’와 그 마름에게 잘 보여야 하는 소작농의 아들 ‘나’가 닭싸움을 계기로 순박한 사랑의 좋은 결말을 맺을 것임을 예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와 ‘점순이’는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히고 알싸한 그 향에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소설 속의 동백꽃은 3월에 노란 꽃이 피기 시작하는 생강나무로 생강처럼 알싸한 냄새가 나는데 강원도에서는 이를 동박나무라고 부른다. 소설 속의 동백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붉은 동백꽃이 아닌 것이다.

소설 “봄봄”에서는 심술궂고 약삭빠른 마름이 순진한 총각인 ‘나’를 그의 딸 ‘점순이’와의 결혼을 미끼로 일만 부려먹는다는 내용으로 실레마을에 실제로 있었던 마름의 이야기가 소설화된 것이라고 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도 그의 걸쭉하고 토속적인 어휘와 풍자적 수법으로 섞이면 예리하지만 재미있는 한 편의 소설이 되니 그를 천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주)고창신문


구인회 시절 유정은 이상을 만나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 가난과 폐결핵, 기생에 대한 사랑, 20대의 죽음 등 두 사람의 삶은 여러모로 닮아 그 안쓰러움이 두 배가 된다. 29세와 26세의 그들은 불과 20일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저승길도 같이 가게 되는 것이다.

그가 죽기 10일 전 친구 필승에게 썼던 마지막 편지는 죽어가는 그의 고통을 아프게 전해준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있다. 그리고 맹열(猛熱)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후략......”
- 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 -

그가 깊은 고통을 잉크삼아 쓴 소설 속에서 오늘날 우리는 행복하다. 그러나 그 아이러니의 뒤끝에서 애통한 슬픔이 터진다. 그의 젊은 죽음 앞에서 “이 세상은 꿈이고 죽음은 큰 깨달음이다.” 라고 했던 장자적 초월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독자는 슬퍼할 권리가 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에서 지원받아 연재되는 기사입니다)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제46회 장애인의 날 기념 장애인 인식개선 공연..

봄의 기억, 길 위에 남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고창군 예비후보자 현황..

과거를 품고 내일로, 신재효판소리박물관 재개관!..

회사소개 - 조직도 - 임직원 - 윤리강령 - 편집규약 - 광고문의 - 청소년보호정책 - 기자회원 약관 - 구독신청

 상호: (주)고창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404-81-20793 / 주소: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성산로48 (지적공사 옆) / 대표이사: 유석영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유석영
mail: gc6600@hanmail.net / Tel: 063-563-6600 / Fax : 063-564-8668
Copyright ⓒ (주)고창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