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 2026-04-22 | 05:53 오후

로그인 회원가입 기자방 원격

    정치/지방자치 사회 교육 문화/생활 지역소식/정보 고창광장 독자위원회 전북도정 기타

 

전체기사

커뮤니티

독자투고

공지사항

개업 이전

편집회의실

뉴스 > 뉴스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특집_고창생물권보전지역 탐방-④ 고창고인돌유적

다양한 형식 볼 수 있는 세계 최대 고인돌 밀집지역
탁자식·바둑판식·개석식·지상석곽식 등 1.8km 반경에 447기 분표

2017년 05월 10일(수) 23:48 [(주)고창신문]

 

↑↑ 고창생물권보전지역 5대 핵심지역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창고인돌유적 전경

ⓒ (주)고창신문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5,000년 경 부터 유럽에서 처음 시작하였다고 보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여러 설이 있으나 축조 연대가 BC 12세기부터 BC 2세기까지 1,000년 동안 만들어진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고인돌은 계급 분화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경제력이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오랜 시기동안 축조되어 왔기 때문에 시기에 따라 신분이 달라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인돌의 밀집이나 무덤방 구조와 배치 등의 차이로 묻힌 주인공이 특정계급이나 계층만의 무덤으로 볼 수 없으며 족장 같은 지배자의 설, 지배자와 그 가족의 무덤 설, 혈연 공동체 집단의 공동무덤이라는 설,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의 무덤이라는 설 등이 있다.
고인돌의 의미는 납작한 판석이나 덩이 돌 밑에 돌을 괴여 지상에 드러나 있는 ‘괴여 있는 돌’ 또는 ‘괸돌’, ‘고임돌’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불리는데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주로 사용되며, 고인돌(支石)과 무덤(墓)이라는 의미이며, 북한에서는 ‘고인돌무덤’으로 표현된다. 중국에서는 고인돌을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 부르며, 북아일랜드 언어인 켈트어로는 탁자란 뜻인 ‘Dol'과 돌이란 뜻의 ’Men'이 합쳐져 ‘돌멘(Dolmen)이라 하고 영어로는 ’Table Stone'이라 한다.
이외도 고인돌은 자연석이 땅에 묻혀있다 해서 독배기·바우배기·독바우로, 받침돌이 고이고 있는 기반식고인돌의 경우 괸바우·암탉바우로, 덮개돌의 형상에 따라서 배바우·거북바우·두꺼비바우·개구리바우 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민간신앙과 연관시켜 칠성바우로, 마을이름도 주암·구암·칠암·지석으로 부르고 있다.
고인돌 분포를 보면 우리나라에는 30,000기의 고인돌이 있고, 그중에서 전라북도에는 2,60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분포하는데, 고창지역에만 전북고인돌의 63%인 1,665기가 소재하고 있으며, 고창고인돌유적지인 고창읍 죽림리·도산리와 아산면 상갑리 일대 1.8Km 반경에 447기가 소재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밀집도가 가장 높고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한곳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고창고인돌유적은 1965년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수차례의 발굴 및 지표조사, 국제학술 심포지움 등을 개최하여 역사적 고증 결과, 1981년 4월 11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 49호로 지정 받았고, 1994년 12월 21일 81,763㎡, 442기가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391호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 11월 15일 도산리의 고인돌 5기가 추가된 총 447기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 12월 2일 고창고인돌유적은 화순·강화와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문화재보호구역은 5차에 걸쳐 566필지, 968,385㎡가 지정하였다.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은 2004년 고인돌공원화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22가구가 살고 있었던 자연부락으로, 이 일대에 더 많은 고인돌이 소재하고 있었으며, 문화재로 지정하기 전까지는 고인돌인지 모르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인지 잘 모를 때에 석축을 쌓거나 논밭 둑을 보수하는 등 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고인돌을 깨서 쓰던 것을 생각하면 이곳에 있던 고인돌 숫자는 훨씬 더 많았으리라 가름할 수 있다.
고인돌을 돌로 만든 이유는 돌에 담긴 불멸성과 견고함을 갖고 있어서 죽은 사람은 혼령의 안식처로서 죽은 사람의 혼령이 끼칠지도 모를 위해로부터 살아 있는 사람을 보호한다고 믿는 거석의 숭배는 자연 발생적이었다 생각할 수 있다.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수 톤에서 수백 톤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를 채석해야 하고, 운반하는 과정을 거칠 때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대규모의 인력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회는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농경사회만이 가능하다 생각한다. 이는 농경과 일정한 영역권이 형성된 정착생활, 혈연을 중심으로 한 협동과 결속력을 다지는 공동체 집단의 의례행위로 축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두레와 같은 협동 조직이 형성된 공동체사회를 배경으로 한 혈연, 집단 간에 거족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자기 조상의 무덤뿐만 아니라, 집단의 기념물로 고인돌을 건립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창고인돌유적의 고인돌은 독자적 문화와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모양을 갖고 있다. ‘탁자식고인돌’은 굄돌을 세우고 그 위에 탁자처럼 넙적한 덮개돌을 얹은 형식으로 굄돌 안쪽은 무덤방을 만들어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형식이며, 무덤방은 판석을 4매 또는 6매 이내로 짜 맞춘 무덤방 위에 납작한 덮개돌을 올려서 만든 형태로 한강이북과 중국 요령지방에 집중 분포되어 있고,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북방식 고인돌’로 부르기도 한다.
‘바둑판식(기반식) 고인돌은 판돌이나 깬 돌로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굄돌을 4-8개 정도 놓고 그 위에 바둑판 모양의 덮개돌을 올려 만든 형식으로, 바둑판처럼 생긴 고인돌로 한국에만 있다. 호남과 영남지방에 주로 보이는 형태로 바둑판식 고인돌 또는 ‘남방식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석식고인돌’은 판돌이나 깬 돌로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바로 덮개돌을 덮는 형태로 받침돌이 없으며, 돌로 만든 무덤방이 확인되고 있어 원래 무덤의 기능으로 축조된 것이며, 우리나라 전역과 중국 동북지방에 분포되어 있다. ‘지상석곽식고인돌’은 탁자식 고인돌의 일종으로 판돌 여러 장을 이용해 무덤방을 만드며, 주로 고창지역에서만 나타나고 있어 ‘고창식고인돌’이라고 부르고 바둑판식 고인돌의 기둥모양 굄돌을 함께 고인 형태도 있다.

↑↑ 바둑판식 고인돌

ⓒ (주)고창신문


고인돌의 구조는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다른 형태를 보이나 대부분 무덤방 위에 올리는 거대한 ‘덮개돌’과 덮개돌이 웅장하게 보이도록 받치거나 고이고 있는 ‘받침돌(굄돌)’, 무덤방 주위에 돌을 깔거나 쌓아 만든 ‘묘역시설’, 무덤방을 덮는 ‘뚜껑돌’, 주검(시신)을 묻는 곳인 ‘무덤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많이 발견된 무기류인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대표적이고, 청동기시대 무기류인 ’비파형동검‘’비파형청동창‘ ’청동도끼‘ ’청동촉‘’한국식동검‘이 있으며 공헌토기로 ’붉은간토기‘, ’가지문토기‘와 장신구로 ’천하석제 곱은옥‘, ’환옥‘, 소옥’,벽옥제 대롱옥‘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죽은 사람 곁에 부장품을 넣은 이유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와 존경 등을 표시했고, 권위의 상징과 사회적 지위를 뜻하기 하며, 내세관이나 현세관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인돌의 축조과정은 고도의 기술과 많은 시간·인력이 필요하였으며 가장 큰 특징은 거대한 덮개돌에 있다. 고인돌 축조과정은 먼저, 고인돌을 세울 장소를 마련하여 땅을 다듬어야 하고, 자리선정은 주변의 다른 집단과 동의가 이루어 져야 가능하며, 축조에 필요한 덮개돌은 미리 산 인근에서 자연석을 다듬어 사용하거나, 주변에 있는 채석장에서 덮개돌을 떼어내는 방식으로 돌에 알맞은 크기의 구멍을 내어 쐐기를 박거나 지렛대를 이용하여 분리하였다.
고인돌유적에는 성틀봉 능선을 따라 고인돌의 덮개돌을 채취했던 채석장이 23곳이서 확인되었으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채석하였음이 확인 되었다.
덮개돌을 옮기는데 크기와 형태에 따라 여러 방법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구해진 덮개돌을 산에서 굴리기도 하였으나, 무덤까지 옮기는 것은 운반로를 만들고 통나무 레일을 깐 다음 그 위에 밧줄로 묶은 덮개돌을 놓고 수 많은 사람들이 옮기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무덤방을 만들기 전에 묘광을 파고 그 안에 주검을 안치하는 무덤방을 만들었는데, 판돌이나 깬 돌을 이용해서 세우거나 쌓는 방식을 사용하였으며, 무덤방 안에는 부장품인 무기류나 장신구, 공헌토기 등을 부장한 다음 받침대를 세우고 납작한 돌을 깔아서 묘역을 구획하였다. 그 다음 무거운 덮개돌을 끌어올리기 쉽게 흙으로 경사지게 쌓아 올리고 받침돌 위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서 운반해온 덮개돌을 흙 위로 끌어 올린다.
고인돌 축조가 모두 끝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제사와 동원한 사람을 위한 음식을 대접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고인돌 주변에서 깨진 토기나 석기편이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 축조는 동일한 혈연집단과 이웃 혈연의 인력까지 동원한 공동체 집단 의례행위의 일환으로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무덤방을 만드는 사람, 운반로를 만드는 사람, 덮개돌을 끄는 사람, 지휘하는 사람, 음식물을 준비하고 제공하는 사람 등 수십 명에서 수천 명까지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거족적 행사였을 것이다. 우리고장에서 실제 실험결과 9.8톤짜리 돌을 이 방식으로 끄는데 85명이 동원되어 4시간동안 70m를 끌어간 것을 볼 때 사람 1인이 120~160kg를 끌수 있다는 결과를 보면 200-300톤의 덮개돌을 운반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소요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인돌의 기능은 세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무덤으로 사용된 것으로 무덤방의 규모가 무덤으로서의 형태와 크기를 갖고 있으며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으며, 둘째, 제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고인돌을 축조한 사회에서 여러 집단의 협동과 결속을 다지기 위해 상징적인 기념물이 필요했을 것이며 거대한 덮개를 가진 고인돌을 일정한 지역 내에 거족적 행사의 일환으로 건립되어 결속을 위한 공공집회 또는 타 집단과의 경계표시를 한 건조물로 보고 있다.
셋째, 묘표석으로 사용된 것으로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또는 묘역조성 집단의 권위와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단순히 묘역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땅을 파고 집을 짓는 움집이 보편적으로 대개 열 집 안팎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마을의 경계와 방어를 위해 도랑을 내거나 나무 울타리를 세웠다. 처음에 낮은 언덕이나 강가에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농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자 점차 낮은 언덕의 평평한 곳에 대규모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100여 채의 집들이 있었던 곳도 있다.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고 주식은 조, 보리, 수수밥으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수렵과 어로, 채집생활을 하였다. 신석기시대 이후 밭농사가 중심이었으나 청동기 시대에는 보다 발전된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 조, 기장, 수수, 콩 등을 재배하고 지형적인 조건을 이용한 논농사를 시작한 시기로 농경도구로는 돌이나 패각으로 만든 칼과 낫이 있는데 곡식의 이삭을 따는데 사용하였으며, 이들은 신석기시대부터 사용하던 것들 그대로 사용했다.
또한, 청동기시대 돌화살촉의 등장은 원거리 사냥으로 전환하는 획기적인 일로, 사냥은 주로 사슴, 멧돼지, 노루 등을 잡아 식량을 해결하고 단백질의 영양을 보충하였다. 청동기시대에 사용한 그릇은 나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흙을 불에 구워 만든 그릇이 널리 보급되면서 질병예방과 수명 연장으로 이어 졌으며,문양 없는 민무늬토기를 만들어 곡식저장, 운반용 항아리, 음식요리, 식기용 그릇, 부장용 토기 등 용도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다르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구리와 주석을 이용하여 비파형 청동검, 청동창, 청동화살촉, 거울 등의 청동기를 만들어 냈다. 재료의 희귀성 때문에 일반 주민은 사용할 수 없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되었다.
고창고인돌유적뿐만 아니라 고창읍 죽림리·고수면 예지리·흥덕면 교운리·흥덕면 석교리·대산면 산정리 유적 등에서 청동기시대의 움집과 무덤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돌화살촉, 반달모양 돌칼, 돌도끼, 그물추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 사람들이 움집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수렵과 어로생활을 했을것으로 보고 있다. 고창고인돌유적에 대한 전설 중 1코스의 ‘군장(부족사회 우두머리)고인돌’에는 강화도의 군장 아들과 매산마을 군장 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결혼을 반대한 남쪽 군장의 아버지는 딸이 죽은 후 북쪽의 대표적인 탁자식고인돌의 굄돌을 세우고 남쪽의 대표적인 기반식고인돌의 거대한 덮개돌을 얹어 둘의 사랑을 인정해 주었다 한다.

 

↑↑ 탁자식 고인돌

ⓒ (주)고창신문

 


도산리 지동마을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은 은진 송씨 모은공파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며 주민들은 망북단(望北壇)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고인돌이 있는 집터는 송대장(이름 기상, 호 모은)이 살던 곳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북상 하던중 중국과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 졌음을 알고 되 돌아와 평생토록 망북통배(望北痛拜)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창고인돌유적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더욱 체계적으로 보전하고 전승하여 후세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2008년 9월 25일 개관한 국내유일의 고인돌박물관이 있으며, 이 곳은 청동기시대의 각종 유물과 그 시대의 생활상, 세계 및 고창지역의 고인돌 문화를 한 눈에 살펴 볼수 있으며, 기획전시실, 상설전시실, 체험학습실 등을 갖추고 있다. 야외에는 선사시대의 움집, 가축우리, 망루 등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선사마을과 직접 고인돌 덮개돌을 끌어보는 끌기 마당, 고창지방에서 발견된 묘제양식인 돌널무덤, 널무덤 등 전시 및 체험장이 함께 마련되어 있어 고인돌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박물관과 야외 체험장을 둘러 본 후 전기열차를 타고 다양하고 생생한 고인돌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재길 전문기자

↑↑ 국내유일의 고인돌 박물관

ⓒ (주)고창신문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이전 페이지로

실시간 많이본 뉴스

 

제46회 장애인의 날 기념 장애인 인식개선 공연..

봄의 기억, 길 위에 남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고창군 예비후보자 현황..

과거를 품고 내일로, 신재효판소리박물관 재개관!..

회사소개 - 조직도 - 임직원 - 윤리강령 - 편집규약 - 광고문의 - 청소년보호정책 - 기자회원 약관 - 구독신청

 상호: (주)고창신문 / 사업자등록번호: 404-81-20793 / 주소: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성산로48 (지적공사 옆) / 대표이사: 유석영 /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유석영
mail: gc6600@hanmail.net / Tel: 063-563-6600 / Fax : 063-564-8668
Copyright ⓒ (주)고창신문. All Rights Reserved.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