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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생물권보전지역 탐방 ⓽-무장현 관아와 읍성

백성과 승려 2만명이 4개월만에 축성한 무장읍성
고창읍성보다 36년 빠른 조선 태종 17년(1417)에 쌓아

2017년 07월 01일(토) 23:54 [(주)고창신문]

 

↑↑ 600년전(1417년) 왜구방어를 위해 2만명의 주민과 승려가 축성한 무장읍성

ⓒ (주)고창신문

무장현은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인 주부군현(州府郡縣은) 중 가장 낮은 단위의 행정구역이다. 현은 지방행정구역상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군이 현을 거느리는 상급단위라기 보다는 병렬적인 관계였다. 군현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행정체계이고 이는 중앙 집권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으며 전국의 군현은 정부가 획일적이고 집중적으로 다스렸다.
무장현은 조선 태종 15년(1415) 무송현과 장사현을 합하여 무송의 ‘茂’자와 장사의 ‘長’자를 따서 무장현(茂長縣)이라 하였으며, 당시 치소(治所)를 두 고을의 중간지점인 무장면 성내리에 설치하게 하였다.
무송현은 처음 마한 땅이었으며 백제시대에는 송미지현(松彌知縣)으로 부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 지면서 무송현(茂松縣)으로 고쳤으며, 장사현도 처음 마한땅으로 백제의 상로현(上老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 장사현(長沙縣)으로 개칭하면서 이웃 영광에 있던 무영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있다가 후기에 장사감무를 파견하여 무송현까지 겸임토록 하였다.
무장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왜구의 방비를 위해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만에 축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은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혁명이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현장이다. 당시 무장현을 출발한 동학농민혁명군들은 정읍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과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1894년 4월 9일 오후 1만여 명이 무장읍에 들어와 무장현의 옥사에 갇혀 있던 동학교도 44명을 석방하고 무장과 공음면 경계선에 있는 여시뫼봉에서 3일동안 휴식하며 머물렀던 역사의 현장이다.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1991년 2월 26일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다. 무장읍성은 남문인 진무루(鎭茂樓)에서 해리면으로 나가는 도로의 좌편을 따라 뻗어 있는데 성의 둘레는 약 1,400m, 넓이는 144,949㎡(43,847평)이다.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남아있고 건물주변에 건물터와 사직단, 여단, 성황당 등여러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처음에는 토성으로 알고 있다, 중간 지표조사에서 흙과 돌을 섞어 쌓은 혼축성으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자료와 지표조사에서 석성으로 판명이 되었다.
우리나라 성곽의 발전사를 보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토성, 혼축성, 석축성으로 변화된 것을 볼수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수하면서 보완된 공법 도입도 알수 있다.
무장읍성 내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무장초등학교가 있었으나 본격적인 읍성복원을 추진하면서 2004년 3월 무장면 무장초등길 24번지로 교사를 신축하여 옮기게 되었다. 또한 무장읍성 객사도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무장면사무소로 사용 되었으나 일부 훼손된 객사의 복원을 위해 면사무소를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게 되었다. 현재의 읍취루도 2000년대에 복원하였으며, 건물과 성곽, 연못 등의 복원사업이 계속해서 진행 중에 있다.
무장읍성의 성문 보호를 위해 항아리처럼 둥근 형태의 성곽인 옹성이 있고 2016년 11월 7차 발굴조사 시 성곽 밖의 둘레에는 적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도랑을 파서 물을 담아 놓은 해자와 해자를 건너기 위해 설치한 나무다리인 적교가 발견되었으며, 전라도에서 발견된 읍성의 해자가 다소 확인되었으나 무장읍성처럼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의 규모와 성격이 파악된 곳은 이곳이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문종 실록의 기록에도 무장읍성의 해자는 2천 127척으로 성벽 1천 470척보다 1.4배정도 큰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발굴조사에서 이의 실체를 확인했다.
해자는 성벽으로부터 5.2-6.4m 정도 간격을 두고 설치되었으며 폭은 위치마다 차이가 있으나 상부 4.2-8.2m, 하부 2.3-5.3m 정도다. 해자를 건너는 적교시설도 정면 3칸, 측면 2-4칸 규모로 직경 30-40cm내외의 대형목재를 2중으로 받치고 있는 교각구조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무장객사는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되었으며, 무장현에 내려 온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조선시대 선조 14년(1581) 건립되었다. 객사는 주관과 익헌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관은 궐패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현의 수령과 대소 관헌들이 모여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배례하던 곳이며, 익헌은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주관보다 지붕을 낮게 해서 격식을 갖추었다. 현판에는 송사지관(松沙館)이라 쓰여 있는데 무송현의 ‘송’자와 장사현의 ‘사’자를 따라 지은 이름이라 하며, 객사의 건물축대 가운데 중앙의 계단에는 호랑이,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무장동헌은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35호로 지정되었으며 조선 명종 20년(1565) 건립된 목조건물이다. 1914년 고창군에 통합되기전까지 무장군 동헌으로 사용되었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둥근 기둥을 사용한 4.5m의 높이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한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며 훼손되었으나 1982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객사 앞에 비석군을 볼 수 있는데 이 곳은 선행비 6기, 불망비 7기, 청백비 1기, 기공비 1기, 독립유공자비 1기 등 16기가 서있다. 남쪽에 있는 고창에서 유일한 철비는 ‘전참봉 김영곤 선행불망비’, 옆으로 ‘행군수 이창익 청덕영세불망비’, ‘현감 최효용 청덕선정비’, ‘현감 정권영 영세불망비’, ‘군수 이희하 청덕애민선정비’, ‘현감 오섬 청덕선정비’, ‘현감 유진오 영세불망비’, ‘행현감 이찬하 애민선정비’, ‘김상운 시혜불망비’ 등이다.
무장현은 고창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영조 35년(1759) 여지도서에 수록된 호적에는 6,817호에 26,661명(남 10,881 여 15,780)이 살았고, 정조 13년(1789)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구총수에도 16면 327리로 이루어져 27,149명이 살았던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지이자 고창군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2020년까지 복원사업이 추진될 계획으로 현재도 공사가 진행 중에 있어 이후 어느 정도 현의 모습이 갖추어 질것으로 예상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조재길 전문기자

↑↑ 무장읍성 동헌(지방유형문화재 제35호)

ⓒ (주)고창신문

 

↑↑ 무장읍성 남문(진무루)와 옹성

ⓒ (주)고창신문

 











↑↑ 무장읍성 동헌(지방유형문화재 제34호)

ⓒ (주)고창신문

↑↑ 무장초 운동장을 연못으로 복원한 모습

ⓒ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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