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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학창시절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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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7월 01일(토) 23:58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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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山亭 이주영
고창고 30회 졸업생 | ⓒ (주)고창신문 | 일제 강점기부터 8·15 광복 후 1950년대까지 아니 6,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농촌의 빈곤기는 연례행사처럼 찾아 왔다.
나는 고창군 대산면 산정리에서 태어나 고창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하숙은 이름만 알았고 다녔다. 처음엔 고창읍 은동부락, 백양리, 교촌리, 물방아 등 수없이 주로 동산물 당산나무가 많이 있는 곳, 은사표(殷四杓, 은면장 집안) 집에서 오랫동안 자취생활로 고창고를 졸업하고 곧 이어 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은 졸업하였지만 국가도 가난한 시절이라 취업이 잘 안되었다.
1958년에 대산초등학교에 전북도에서 발령을 받아 2년 근무하다가 병역미필로 도 발령이 취소되어 집에서 농사일에 종사했지만 허송세월이 보내는 것 같았다. 그때 마치 구구토건설단에 소집되어 강원도 정선에서 1년간 복무하고 병역을 필하였다. 마침내 전남도에서 교원 채용시험이 있어서 응시했는데 운 좋게 합격하여 영광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다시 영광남중·영광종고로 단계적으로 근무했다.
1980년에 광주농고, 광주제일고, 광주고등학교, 문화여중, 최후로 운암중에서 근무하다가 1999년 8월 31일 정년퇴임하였다.
이제 다시 학창시절로 되돌아 가보자. 1950년대 전후이었으니 집이 가난하여 쌀은 끔싸라기였다. 어떤 때는 보리쌀을 가지고 가서 자취를 해야 했다. 집에 다녀왔을 때만 며칠간은 가지고 온 밑반찬으로 걱정 없이 지내지만 한번 이것저것 떨어지기 시작하면 모두가 낙철주식회사가 되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반찬 없는 밥을 많이 먹어 보았고 간장 한가지로 먹었고 소금을 뜨물에 끊여 먹는 때가 다반사였다. 그리고 수복 후(중 3때, 1950년)에 고창중학교와 고등학교 때에도 등록을 하고 다니는데 전후인지라 환경 교육적으로 좋지 않은 것만 보고 성장했다. 그 때는 밤이면 밤마다 방장산에 봉화가 꺼질 때가 없었고 도체에서 밤이면 밤손님(빨치산)과 교전이 있었으니 등하교시에 상여가 길에 연이어 있고 대성통곡하는 광경이 눈에 자주 들어왔다. 자고 나면 정읍에서 흥덕을 경유하여 읍으로 들어오는 길목 신림방면에서 밤손님이 잠복해 있다가 경찰이 승차한 차량(쓰리코타)에 난사하여 무궁화 꽃이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동족상잔이 어린마음에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하는 것인가 이런 이유에서인지 고등학교 다니면서 교련시간을 싫어했다. 그 때는 교관이 현역장교가 배치되어 어떻게나 훈련을 혹독하게 시키던지 군 생활이 무색할 정도였다. 군인들이 신었던 군화를 강매나 다름없이 학교에서 판매했는데, 바닥이 다 달아 진 것은 고사하고 짝신을 팔아도 말 한마디 못했다. 중 3때 가장 끔직한 사건은 ‘선운사 출동사건’으로 총도 잘 다루지 못하는 학생들을 선운사계곡에 출동시켜 한참 피어나려고 하는 꽃 봉우리들이 일곱 명이나 피어나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갔으니 너무나도 끔찍하고 더 이상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 당시 학교장이 김용환 교장선생님이셨다. 인품과 자격이 특출하신 분이셨는데, 때가 때이고 전시다고 핑계를 대서라도 그걸 왜 만류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지만, 이제와 생각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부질없는 일인 것 같다.
또 화제를 바꾸어 수복 후 있었던 일로 수복이 되자 학도대가 결성되었는데, 나는 대산에서 고창으로 차출되어 이선재(당시 고창중 국사담당)선생님 집(한전 있던 곳, 동산물)에서 숙식을 하면서 새벽이면 기상해서 구보하고 본부(구, 광생병원 앞)에 모아놓고 최진호, 염규윤 선배님, 부관 강세원이 돌아가며 웅변식으로 일장연설을 해주었다. 하루는 1월 1일 신정이었는데 아침 일찍 새벽시간에 숙소 앞 도로에 현역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치더니 학도대원들을 차출하여 목적지는 숨기고, 실은 순창 쌍치 토벌작전 하러가는데 노무자처럼 실탄매고 동행하는 임무수행으로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 달여 만에 귀향했는데 발에 얼음(동상)이 들어 죽다 못해 간신히 집에 돌아왔다.
이상은 학교개학의 이전일이고 수복 후 고창중학교가 등록이 시작하여 개학하게 되었다. 교문에 들어서면 위병소가 있는데 이곳을 지나려면 몹시 떨리고 무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6·25때 장거리 후퇴한 선배들이 몇 사람 있었는데 가끔 위병소에 도사리고 앉아 니기잠바에 가죽장갑 끼고 ‘너 이리와’하면 속으로 ‘나는 죽었다’하고 부르지나 않을까? 떨면서 아무 죄 없이 앞만 보고 지나갔던 생각이 떠오른다.
이제 끝으로 모교의 자랑거리 몇 가지를 열거하려 한다. 고창고가 특히 일제강점기 때 유명해진 것은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드는 학교였다. 이북에 오산고보 이남에 고창고보,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자랑삼아 하는 말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재단이 튼튼하여 훌륭한 교사진을 채용하고 보수를 후하게 대우했고, 권위와 실력 있는 교사진이 애국 애족하는 독립투쟁정신이 강한 교사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타 학교에서는 모두 일어, 일본역사를 배우는데 유독 전국에서 우리 모교만이 유일하게 우리의 역사와 국어를 배우고 우리말을 사용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것도 복도에 가끔 나와 눈치 보면서).
이제 자랑스런 우리 모교는 개교 100주년(1919.4.14.-2019.4.14)을 2년 앞두고 흥학구국(興學救國)의 스로건 아래 굳게 뭉쳐 항일민족해방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내일의 100년을 설계하는 위대한 내용을 담아 모교와 군민이 다함께 기뻐하는 역사적 축제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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