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특집_고택순례-명재고택(明齋故宅)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 ①
|
|
청렴하고 겸허한 선비정신의 표상 '명재고택'
|
|
2017년 07월 11일(화) 22:18 [(주)고창신문] 
|
|
|
| 
| | ⓒ (주)고창신문 | |
명재고택에는 오락가락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라는 생각이 먼저 들법한 관람객에게조차 반가운 비인데 하물며 농경사회였던 조선시대 논산의 농부에게는 어떠했을까? 반가운 손님을 맞듯이 비를 맞이하기 위해 댓돌을 내려왔을 그 시절 집주인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였다. 가뭄 중 내리는 비의 설렘으로 공간 속에 숨겨진 오래된 시간의 존재들이 현재로 나와 우리와 조우한다. 이렇듯 고택이 품고 있는 공간적 의미는 시간에 맞서 싸운 용사(勇士)처럼 스스로를 지켜낸 고택의 현재적 현상뿐만 아니라 깊이 간직된 광맥처럼 켜켜이 쌓인 시간의 광산을 헤집어 캐내는 몇 알의 보석에 있을 것이다.

| 
| | ⓒ (주)고창신문 | 
| 
| | | ⓒ (주)고창신문 | |
명재고택은 숙종 때 건립되어 후대로 내려오면서 일부 보수되었고 안채와 사랑채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멸실되었던 사당은 1983년에 복원하였고 안채의 안전문제로 2017년에 해체보수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 ‘윤증선생고택’이라고 하였으나 2007년 1월 윤증 선생의 호를 따서 ‘논산 명재 고택’으로 변경하였다.
명재 윤증은 1629(인조 7)년에서 1714(숙종 40)년까지 사셨던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으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노론과 소론의 분기점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자는 자인(子仁)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으로 명재는 큰아버지 윤순거(尹舜擧)가 지어준 선생의 호이다. 본관은 파평으로 고려시대부터 유서 깊은 명문 집안인 파평 윤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를 도와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에 책봉된 윤신달(尹莘達)이다. 이후 ‘동북9성 개척’으로 유명한 윤관(尹瓘)과 그의 아들 윤언이(尹彦頤)로 인해 명문가로서의 명성을 반석에 올렸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조부 윤황(尹煌)은 성혼의 사위로 대사간을 지냈고 왕으로부터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명재 선생은 1629년(인조 7) 5월 28일에 한양 정선방(貞善坊, 지금 종로 3가 일대)의 외가에서 아버지 윤선거와 어머니 공주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재 선생이 10세 무렵 지었다고 알려진 <거미를 읊다〔詠蜘蟵〕>는 “거미가 매달려 그물을 친다. 가로지른 다음엔 위로 아래로. 잠자리에게 부탁하노니 조심해 처마 밑엔 가지 마.(蜘蟵結網罟, 橫截下與上, 爲語蜻蜓子, 愼勿簷前向)”라는 내용으로 사물에 대한 뛰어난 관찰력과 아이답지 않은 성숙함이 그의 천재성을 드러낸다. 선생은 아버지 윤선거를 따라 13세에 충청도 금산에 정착하여 18세에 안동 권씨와 혼인하였는데, 장인은 저명한 예학자이자 한성부 좌윤을 지낸 탄옹 권시(權諰, 1604∼1672)이다. 선생의 주요 스승은 권시를 비롯해 김집, 유계, 송시열, 송준길 등 당대의 명사들이어서 당시 집안의 위상과 평판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중 선생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송시열과 만난 것은 28세 때이다. 선생은 김집의 권유로 회덕으로 가서 22세 연상의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러나 44세 때 불거진 ‘회니시비(懷尼是非)’는 노론과 소론의 분당이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송시열과 윤증이 살던 회덕(懷德, 지금 대전시 대덕구 일대)과 이성(尼城, 지금 충남 논산시 일대)에서 따온 용어로 선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면서 발단이 되었다. 일찍이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며 윤선거에게 윤휴와 절교할 것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명재가 아버지의 묘갈명을 부탁하며 보낸 자료가 송시열의 비위를 거슬러 묘갈명에 불편한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였고 명재의 거듭된 개정 요청을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 뒤 경신환국 때 송시열은 남인에 대해 엄격한 처벌을 고수하였지만 윤증은 온건하고 절충적인 의견을 보이며 송시열에게 보내는 ‘신유의서’를 작성하게 된다. 편지는 박세채의 만류로 결국 부치지 않았지만 송시열의 손자 송순석(宋淳錫)이 박세채의 집에서 몰래 베끼는 바람에 3년 뒤 송시열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신유의서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윤증은 55세, 송시열은 77세였다. 두 사람의 결별로 당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그 후 송시열은 기사환국(1689년)으로 사사되었지만, 윤증은 30년을 더 살고 1714년(숙종 40) 1월 24일에 85세의 긴 삶을 마쳤다. 명재 사후에도 회니시비와 신유의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분쟁에 대해 숙종이 윤증의 잘못이라고 판정(병신처분’(1716년))하면서 소론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념과 명분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국에서 위축된 반면 노론은 숙종의 인정과 지원을 받아 정국 주도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 뒤, 소론이 지지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명재의 관작이 회복되고 문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비로소 명예가 회복되었다.(1722년. 경종 2).
윤증은 20세 후반 무렵 이미 상당한 명망을 얻어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천거되었고 85세로 별세할 때까지 우의정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의정승’이라고 불리며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그 바탕에는 고결한 선비정신을 실천하였던 선생의 의지가 있었다. 지나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여 후손들에게 양잠을 금지하고 어려운 시기에 구휼로 덕을 쌓았기 때문에 동학농민운동 때 외부 사람들이 불을 지르자 주변의 농민들이 방지의 물을 퍼서 불을 껐다고 한다. 이렇게 그의 종택은 동학과 한국전쟁 때도 피해를 입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고 오늘날까지 귀감이 되는 공간적 의미로 남아있다.

| 
| | ⓒ (주)고창신문 | | 
| | ⓒ (주)고창신문 | |
명재고택은 1709년 윤증 선생을 위해 아들과 제자들이 지은 것이지만 정작 선생은 고택에서 3km 떨어진 유봉에 있는 작은 초가에서 살았다고 한다. 여느 사대부집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정려현판을 우러러보며 서슬 퍼런 솟을대문의 권위와 위엄 앞에서 몸을 낮추어야 하지만 솟을 대문도 높은 담장도 없는 명재고택은 집 주인의 청렴하고 겸허한 성품을 보여주듯, 편안하게 흘러내리는 노성산의 부드러운 능선을 담장삼아 누구든지 맞이하여 품어줄 듯 열린 팔을 내밀고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이러한 형국은 선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으로 옥녀탄금(玉女彈琴)형의 명당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여인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데 거문고를 타는 기예마저 출중한 아름다운 여인의 형국이라 하니 부와 명예 뿐 아니라 예(藝)와 덕의 온유함까지 갖춘 길지(吉地)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사랑채를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 우주관에 근거하여 둥근 섬을 품은 널찍한 방지(方池: 네모진 연못)가 있고, 사랑채 뒤쪽으로는 안채에서 보면 남쪽에 행랑채가 배치되어 있다. 그 안쪽으로 조신하게 몸을 숨긴 안채가 있고 안채의 동편으로 높은 언덕 위에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싸인 사당이 보인다. 사당이 있는 언덕에서 마당으로 내려오는 능선을 따라 느티나무 세 그루가 3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서서 고택을 수호하고 그 아래 펼쳐진 넓은 마당 가득, 보기에도 후덕한 커다란 장독들이 200년을 넘긴 씨간장을 품은 채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숙성된 장맛처럼 자연스러운 고전미가 넘치는 이 곳은 어디에서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한 컷의 작품사진이 된다.
정면에 자리 잡은 사랑채는 두 단으로 높인 기단 위에 팔작지붕을 얹어 선비의 기품과 위엄을 보여준다. 직사각형 형태의 제법 큰 돌을 수평으로 맞추어 쌓은 두 개의 기단은 다섯줄로 쌓은 아랫단과 두 줄의 윗 단으로 구성하여 무게감과 안정감을 주면서 팔작지붕의 화려함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잘 다듬어진 주춧돌을 딛고 당당하게 서 있는 사랑채는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건물로 가운데 두 칸에 배치된 온돌방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널찍한 대청마루가, 서쪽에는 창호가 있는 누마루가 자리 잡고 있다. 누마루는 앞마루보다 높이 배치하여 공간적 변화를 주면서 아래로 함실아궁이를 두어 실용성을 겸비하였다. 누마루의 창호는 가장 보기 좋은 비율이라는 황금비율로 사분합 들문이어서 여름철에는 추녀 아래 있는 등자쇠에 걸어 완전하게 열리도록 하였다. 큰 사랑방에서 대청마루로 통하는 문도 이러한 들문이어서 여름에 시원한 바람을 들이거나 집안의 행사가 있을 때 공간을 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선조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동쪽 대청마루와 서쪽 누마루에는 각각 허한고와(虛閑高臥), 도원인가(桃源人家), 이은시사(離隱時舍) 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풍류와 멋을 추구하며 사리사욕을 경계하였던 고고한 기품과 수양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면 산수풍경을 축소하여 재현한 석가산(石假山)이 내려다보인다. 석가산은 고려시대에 창안된 고유 석정문화(石庭文化)의 하나이다. 삼신산(영주, 봉래, 방장)과 오악(숭산, 태산, 화산, 항산, 형산)을 표상하는 석가산을 집안의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며 심산유곡의 흥취로 느끼고자 하였던 것이다. 요산요수(樂山樂水)로 심성을 가다듬고자 했던 선조들의 풍류 이면에는 불로장생과 이상향 실현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윤증 선생의 9대손 윤하중 선생은 개화기 때 인물로 천문학에 밝았는데 1910년에 24시간제 해시계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였다. 해시계의 영점을 놓고 천체를 살필 수 있는 위치를 정하여 “일영표준(日影標準)”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사랑채로 오르는 기단 위 비스듬히 놓인 네모난 돌에 음각된 글씨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해시계는 윤증가의 유품으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어 지금은 충남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안채와 사당으로 연결되는 협문으로 일각문이 있어서 바깥양반들의 동선을 고려한 꼼꼼한 설계가 느껴진다.
사랑채 뒤쪽, 왼편으로 이어진 건물이 행랑채이다. 중앙에 있는 중문으로 들어서면 시선으로부터 안채를 보호하기 위해 가리개 역할을 했던 판벽이 있다. 안채는 6살 이하의 남자아이와 여자들의 공간으로 남녀가 유별했던 유교사회의 엄격한 구분을 실감할 수 있다. 판벽의 하단 부분은 개방되어 있어서 안사람들이 손님을 식별하고 대비할 여유를 갖고자 했던 삶의 지혜가 엿보인다. 안채는 사랑채의 뒤편에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ㅁ’자 형태이지만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중앙에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널찍한 대청을 중심으로 ‘ㄷ’형의 대칭을 이루고 있다. 대청의 좌우 끝에 한 칸을 뒤로 물려 방을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대청마루 후면 세 칸의 기둥 사이에는 머름 위로 바라지창을 내었는데 중간에 두 줄의 배목을 댄 2분합 판장문이다. 겨울 북풍 눈보라를 피하기 위한 투박한 판장문에도 한판의 나무를 테칼코마니처럼 세심하게 대칭으로 배치하여 예술적 감각을 잃지 않았다. 비슷해 보이는 한옥의 문이 출입문인지 창문인지는 머름의 유무로 가장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머름은 사람이 방에서 누우면 밖에서는 안 보일 정도의 높이로 방안을 보호하면서도 밖을 향해 넓게 개방되어 있어 안에 있는 사람은 쉽게 바깥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특히 명재고택의 동선처리와 시선처리를 고려한 건물의 배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안방에 앉아 내려다보면 사랑채로 통하는 일각문이 보이고 일각문 너머 화장실까지 한눈에 보이니 시어머니는 안방에 앉아서도 사랑채 손님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안채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면면도 어려움 없이 살필 수 있었던 것이다. 안채의 좌우는 완벽한 대칭으로 방과 부엌이 있다. 서쪽은 시어머니가 쓰던 안방으로 안방 쪽 부엌은 고방과 장독대로 이어지는 동선을 고려하여 문을 내었고 며느리가 머무는 동쪽의 건넌방 쪽 부엌은 사당에 음식을 내어가기 편리하도록 문을 내었다. 안채와 비스듬하게 비껴 배치된 고방채는 명재고택의 세심한 과학적 설계를 보여준다. 안채와 지붕이 맞닿을 듯 자리잡은 고방채는 안채의 지붕과 높이가 서로 엇갈려 있을 뿐 아니라 기단과 기단의 사잇길이 남쪽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이는 햇빛길과 바람길과 물길을 고려한 과학적 설계라 한다. 안채의 지붕을 고방채의 지붕보다 약간 높게 배치하여 안방으로 비치는 서쪽의 햇빛을 적절하게 조절하였고 두 건물 기단의 사잇길을 남쪽으로 갈수록 넓게 냄으로써 여름에는 남쪽의 시원한 바람이 좀 더 오래 머무르고 겨울에는 추운 북풍이 빨리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바람길이 설계되었다. 이는 물이 빨리 빠져나갈 수 있는 물길이기도 하여 습한 기운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한 과학적 원리가 숨어있다. 며느리가 사는 건넌방 동쪽에는 사당으로 이어지는 언덕 경사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담장으로 둘러싸인 후원을 두어 며느리를 정서적으로 배려하였을 뿐 아니라 6살이 될 때까지 며느리가 키웠을 아이는 어머니의 후원에서 사당에 제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는 어른들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안채 뒤편에는 기와로 쌓은 굴뚝이 좌우로 있는데 안방 뒤 굴뚝 위의 연가[煙家]는 매우 독창적이어서 눈길을 끈다. 집 앞에 장독대가 있는 경상도와는 달리 호서지방의 한옥은 장독대가 뒤에 배치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명재 고택도 예외가 아니어서 안채 뒤편 돌로 쌓은 제법 높은 축대위로 햇빛도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는 곳에 정성스럽게 단을 만들고 정갈하게 닦인 장독대가 있다. 예로부터 장독대는 여인네들의 애환과 신앙의 장소로 안사람의 정갈함이 외부로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장독이 더러우면 안 된다’시며 수시로 독을 닦던 할머니가 불현 듯 그리워진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 
| | ⓒ (주)고창신문 | | 
| 
| | | ⓒ (주)고창신문 | |
|
|
|
|
고창신문 기자 . “서해안시대의 주역” - Copyrights ⓒ(주)고창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
|
(주)고창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
|
|
|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