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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순례_함양 일두고택/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262-1번지②

안빈낙도의 겸허한 선비정신이 담긴 '일두고택'

2017년 07월 28일(금) 21:01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두 개의 개울은 마을을 가운데 두고 내려오다가 백년해로를 약속하듯 마을 입구에서 손을 맞잡고 남강을 향해 흐른다. 2차선의 도로가 놓인 현대적인 다리만 아니라면, 불현듯이 내리는 그리움처럼 소나기 오는 여름날, 소녀를 업고 개울을 건너는 소년이 있을 것 같다. 개울을 건너면 조선시대 양반 마을에 여행을 온 듯, 저마다 풍채 좋은 기와집들이 점잖게 앉은 개평마을이 펼쳐진다. 마을의 지세가 ‘개’(介)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개평마을이라 불린다. 예로부터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개평마을이 위치해 있는 함양은 빼어난 유학자를 많이 배출하여 조선시대 영남 사림의 본거지로서의 자부심이 높은 지역이다. 특히 개평마을은 과거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조선시대부터 이름난 마을이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은 대부분 하동 정(河東 鄭)씨와 풍천 노(豊川 盧)씨들로,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일두 고택은 마을의 가장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어서, 고려 때 일두 정여창의 증조부 정지의가 처가마을인 함양으로 이주하여 이 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입증하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처가 마을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이 어색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조선후기부터 강화된 종법제도에 따라 장남으로 하여금 가계를 잇도록 한 풍습이 아직도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처가나 외가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관습화된 문화는 누대에 걸친 선조들의 피를 타고 내려와 무의식 속에 고착되어 우리의 행동과 현상의 판단 기준이 된다.
일두 고택은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당시는 '함양 정병호 가옥(咸陽鄭炳鎬家屋)'이었으나 2007년 1월 일두 정여창의 생가터라는 것에 의미를 두어 ‘함양 일두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 주로 활동하였던 학자로 본관은 하동인데 전술한 바와 같이 그의 증조부 정지의가 처가 마을인 함양에 자리를 잡으면서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는 백욱(白勗), 자욱(自勗)이고 호는 일두(一蠹) 또는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정여창의 호인 일두(一蠹)의 두(蠹)는 ‘좀’을 의미하는데 책장을 넘기다보면 눈에 보일 듯 말 듯 기어다니는 벌레가 바로 ‘좀’, 책벌레이다. 얼마나 책을 좋아했으면 ‘한 마리의 책벌레’가 되고 싶었을까? 복잡한 세상일 다 잊고 책 속에 묻혀 살았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었을까? ‘일두’라는 호 이외에 또 다른 그의 호 수옹(睡翁)은 ‘졸고있는 늙은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권세와 명예를 탐하지 않고 안빈낙도하는 그의 겸허한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천리를 깨달아 순리에 따르며 위기지학의 자세로 학문 탐구에 정진함으로써 성리학적 가치관을 실천하고자 했던 그의 삶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서구의 근대 합리주의자인 스피노자의 철학적 관조가 느껴진다. 그의 호는 이렇듯 그의 세계관을 쉽고 재미있는 풍자로 드러내고 있다.

ⓒ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일두의 선대 조상들은 고려조 때부터 여러 대를 이어 벼슬을 지냈는데 함양에 처음 정착했던 그의 증조부 정지의(鄭之義)는 고려 왕실의 족보를 관리하는 책임자인 판종부시정을 지냈고 조부 죽당(竹堂) 정복주(鄭復周)는 고려 말 여러 벼슬을 거쳐 판전농시사를 지냈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를 하사받았다. 일두 고택의 대문채 중앙에 있는 솟을 대문 처마아래 가지런히 걸린 5개의 정려 홍패 중 제일 위 “효자통정대부판전농시사정복주지문(孝子通政大夫判典農寺鄭復周之門)”이라고 쓰인 홍패가 바로 그것이다.
부친 정육을(鄭六乙)은 무예에 능하여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의주부통판을 거쳐 함경도 병마우후로 공직을 수행하던 중 세조 13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1467년)으로 순직하였고 그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목사 최효손(崔孝孫)의 딸로 일두는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무렵 정조대왕의 12남 도평군 이말생의 딸 이씨부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18세에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듣고 세 번을 혼절할 정도로 효심이 극진했던 그는 함양에서 길주로 2000리 길을 나서서, 집 떠난 지 한 달 만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그 당시 국가를 위해 순절한 사람의 자식에게 벼슬을 주는 관례가 있었으나 그는 부친의 죽음으로 자식이 벼슬을 얻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공부에 매진하다가 1470년대에 함양 군수로 부임한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김굉필과 더불어 공부하였다. 일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주변의 추천에도 사양하며 정계에 나가지 않고 있다가 어머니의 질책을 받자 서른 넷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교우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고향에 역병이 돈다는 소식을 듣고 3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이질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며 대변을 직접 맛볼 정도로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으나 보람도 없이 10여 일 만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효행을 다 하였다. 그의 이러한 효행이 알려지자 조정에서 참봉을 제수하였지만 그는 “실제 잘한 일이 없는데도 헛되이 상을 주면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진출하게 된다.(苟無爲善之實而虛賞 則僥倖之人進)”고 하였다. 자신이 실제 효자가 아닌데도 남들이 효자로 오인하도록 행동한 것은 사람들을 속인 것이며, 관직의 포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국가를 속인 죄가 된다고 하며 사양하였다. 스스로에게 얼마나 엄격하고 강직한 기준을 세우고 살았는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41세에 문과 별시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가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설서가 되었다. 훗날 연산군이 되는 세자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간언하였으니, 세자가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외직을 자원해 안음 현감으로 4년 동안 청덕선정(淸德善政)을 베풀어 현감 직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나 1498년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된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곤장 백 대를 맞고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 4월 그의 나이 55세에 유배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의 고난은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해 9월 갑자사화로 시신마저 목이 베이는 부관참시를 당한다. 사화에 휩싸여 그의 저술마저 불타 없어졌지만 선조 대에 사림의 세력이 커지면서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고자 하는 ‘오현종사운동’이 전개되어 광해군 대에 그 뜻을 이룬다. 문묘(文廟)란 공자를 받드는 사당을 말하고 종사(從祀)란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공자와 같이 종사된다는 것은 유학의 정통 학자로 인정받는 엄청난 영예이니 비록 부관참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역사 속에 길이길이 명예로운 이름을 전할 수 있게 되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두 종가는 정여창으로부터 현 종손 의균에 이르기까지 18대를 이어오며 600여 년 동안 개평마을의 명당터를 지키고 있다. 원래는 6000평의 규모에 17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3000평 규모에 12동이 현존하고 있다. 안채는 1690년 청하현감을 지낸 현 종손의 8대조 덕제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1843년 5대조 재기에 의하여 사랑채가 건립되어 관리되어왔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은 박석으로 포장되어 있고 대문채 앞으로 사람이 디딜 수 있도록 널찍한 노둣돌이 있어서, 그 옛날 사람들이 박석을 밟는 말굽소리를 내며 들어가 노둣돌에 내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솟을 대문의 처마 아래 5개의 정려문을 우러르며 마당에 들어서면 왼편 곳간과 오른편 사랑채 사이로 중문에 이르는 길이 보인다. 가장 맛있는 것을 마지막에 먹듯, 눈길을 끄는 사랑채를 아껴두고 중문으로 들어선다. 중문채는 머슴들의 공간으로 사랑채가 건립되기 이전에는 문간채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사랑채와 연결된 2칸은 마루인데 판자로 막은 마루아래 마굿간에서나 볼 수 있는 구유가 놓여있다. 신발을 신고 멀리까지 가야하는 화장실 대신 사랑마루 뒷문을 열고 나와 손쉽게 볼일을 해결하고자 만들어진 것이라 하니, 점잖은 양반들이 아이같이 꾀를 부린 것 같아 웃음이 난다. 중문채 맞은편에는 곳간이 있고 그 뒤편으로 채소밭이 있어서 중문채와 곳간 사이 공간이 머슴들의 작업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중문채의 왼쪽 한 칸은 안채로 들어가는 문으로, 여자와 아이들의 공간인 안채를 시선으로부터 감추었다. 안채에 딸린 전용 화장실은 담장까지 둘러 여성들을 세심하게 배려하였음을 느끼게 한다.
안채는 남쪽을 향하여 정면 8칸, 측면 2칸의 ‘ㅡ’자형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안채의 마당에 서면, 서쪽으로는 아래채, 동쪽으로는 사랑채의 후면이 보이고 남쪽에는 곳간이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ㅁ’자 형태이나 안채 뒤편으로 고택에서 가장 큰 광채로 나가는 길이 열려있다. 사랑채와 안채에 있는 각각의 곳간과 별도로 안채 뒤편에 크게 자리 잡은 광채는 이 집 살림의 규모가 보통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안채는 사랑채보다 전체적으로 지붕이 낮게 느껴져 안정감이 있고 평화로워 보인다. 우물이 있는 마당에는 금잔디가 가녀린 잎을 푸르게 단장하고 있다. 보통 나무로 짓는 한옥은 습기를 우려하여 마당에 잔디를 심지 않고 마사토로 덮는데 금잔디를 심은 점이 특이하다. 안채의 창호들은 그 기능도 기능이려니와 아름답기까지 하여 주인의 안목을 드러낸다. 특히 부엌에서 툇마루로 연결되는 두짝 미서기 숫대살문과 그 위 다락의 두짝 띠살창은 한옥 창호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한다.
안채에서 광채 쪽으로 나오면 사랑채의 뒷방 동쪽으로 일각문이 보이고 그 문은 별당으로 이어진다. 별당의 왼쪽 뒤편으로 후문처럼 샛문이 있어서 늦은 밤 집안사람들을 깨우지 않고 드나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밭으로 직접 통하도록 동선의 효율성을 고려하였다. 별당 맞은편 담을 끼고 돌아 나오면 사랑채와 마주서게 된다.
축대를 쌓아 위엄을 높인 사랑채는 시원하게 날개를 펼친 팔작지붕을 이고 품위 있게 방문객을 맞는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원기둥으로 기둥을 세운 것이 특이하다. 보통 원기둥은 궁궐이나 사찰에서 쓰는데 일설에 의하면 일두의 부인이 왕족이어서 원기둥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ㄱ’자형으로 전면 6칸의 사랑채는 높은 기단을 쌓아 주인의 위상을 높임과 동시에 안채의 마당과 높이를 맞추었다. ‘문헌’은 정여창의 시호로 사랑채의 대청마루를 구분한 사분합들문 위에 ‘문헌세가(文獻世家)’ 편액이 문패처럼 걸려있다. 사랑채의 오른편에 누마루가 있고 누마루에는 지리산을 향하여 남쪽 방향으로 ‘탁청제(濯淸霽)’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혼탁한 마음을 청량하게 씻어 다스리고자 하였던 고결함이 맑은 바람처럼 시원하게 느껴진다.
사랑채의 누마루 앞에는 석가산을 조성하였는데 석가산보다는 소나무의 위세가 당당하다. 용이 승천하듯 구불거리며 하늘을 향하고 있는 소나무는 원래 두 그루였는데 지금은 한 그루만 남아 250년이 넘게 사랑채를 지키고 있다. 사랑채 방문 위로 가분수처럼 압도적인 큰 글씨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자가 보인다. 대원군이 방랑하던 시절 썼던 글씨라고 하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위에 한지를 덧대어 여러 차례 모사되어서인지 마치 그림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랑대청으로 들어가면 백세청풍(百世淸風)의 편액이 걸려있어 절의를 숭상하던 선비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사랑대청과 사랑방은 3분합 팔각불발기문을 들문으로 설치하여 멋과 실용성을 겸비하였다. 사랑방의 서편에 있는 2칸의 대청마루도 사분합들문으로 위로 걸어 공간을 하나로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 누마루 아래 함실에는 쉽사리 공개하지 않는 비밀이 숨어있는데 바로 남근석이다. 서있는 사람의 허리 정도까지 오는 제법 큰 남근석은 장손의 기원과 책임감을 간절하게 보여준다.
최근 사우디에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풍속을 문란하게 하였다고 경찰에 연행된 사건이 있었다. 우리의 눈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옷차림이 경찰에 연행될 정도의 큰 사건이 되는 것은 역사와 전통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가치관 때문일 것이다.
어떤 전통을 살려 이어가고 어떤 전통을 고치고 변화시켜야 할 것인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큰 과제일 것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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