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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순례-봉화 쌍벽당 종택 ( 奉化 雙碧堂 宗宅)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수1길 17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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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벽당’ 오백년의 다짐! ‘벼슬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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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8월 11일(금) 09:27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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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여름날 봉화에 가본 적이 있나요?
봉화는 200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독립영화『워낭소리』 때문에 세간에 회자되었다. 말수 적은 최노인과 큰 눈만 꿈벅이는 무덤덤한 소가 묵묵한 걸음으로 평생지기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두메가 봉화였던 것이다. 그러나 쌍벽당이 있는 봉화읍은 여름날 내성천을 따라 은어축제 준비로 들썩이고 있어서 조용한 두메라는 이미지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봉화읍에서 동네길을 들어가듯 도로를 따라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쌍벽당 종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마을은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그 품에 안긴 듯, 소쿠리 안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이러한 형국을 풍수지리적으로는 명형국지라 하는데 집 뒤로 작은 산줄기가 내려와 외풍을 막아주는 병풍역할을 하여 집안에 큰 어려움이 없는 지형이라 한다. 하지만 쌍벽당이 있는 자리는 주변에 큰 산과 큰 물이 없어 높은 벼슬을 하는 인물이 나지는 않을 자리이다. 보통은 가문의 번창과 영화를 꿈꾸며 입신양명의 자리를 입지조건으로 찾기 마련인데 쌍벽당이 이렇듯 소박한 지형에 자리 잡은 것은 ‘벼슬하지 말라’는 조상의 유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쌍벽당공의 조부 담암공 김용석(1453 - 1523)이 후손들에게 ‘벼슬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조정의 어지러운 세력다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한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과 같이 동문수학하였는데 당시 관료사회의 풍토가 어지러워 선비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한양을 떠나 안동으로 내려온다. 낙향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림파가 몰살되는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에 나가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깨닫고 ‘선비된 몸으로 성균관 진사는 아니 할 수 없으나 대과에는 참여치 마라’ 유훈을 남겨 후손들이 관직에 나가는 것을 경계하였다.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정치 참여는 유교적 대동사회 실현의 이상을 가진 선비의 도리였지만, 정도(正道)가 지켜지지 않던 그 당시 조정은 권력자의 꼭두각시가 되거나 뜻밖의 일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고 멸문의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위기지학의 학문인 성리학은 수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벼슬살이에서 파생되는 욕망의 문제들을 천박하게 여겼기 때문에 ‘벼슬하지 말라’는 유훈은 탐욕을 멀리하고 자기 수양에 힘써 먼저 인간이 되라는 뜻을 담은 역설일 것이다. 담암공의 여러 아들 중 둘째아들 김균은 아버지의 유훈을 지키기 위해 조용하게 살 수 있는 자리를 물색하던 중 1505년경 장인이었던 군위현감 금계의 권유로 거촌리에 들어와 입향조가 되었다. 김균의 호는 죽헌인데 음직으로 의학과 관련된 서적을 습독하는 소임이었던 의서 습독관을 지내 습독공으로 불린다. 학문하는 선비로서 고을의 미풍양속을 가꾸기 위해 뜻있는 분들과 천성향약, 안동향약을 제정하여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 예절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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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독공이 들어올 때만해도 거촌은 거주하는 사람도 없이 수백 년 된 춘양목들만 산을 뒤덮고 있던 오지였다. 춘양목은 붉은빛이 돌아 적송이라고도 부르는 육송으로 그 나무들은 집을 짓는데 아주 훌륭한 자재가 되어주었다. 굵고 튼튼한 쌍벽당의 목재들은 지금도 춘양목 고유의 색채를 발산하며 나뭇결의 아름다움을 은은하게 보여준다. 쌍벽당의 대들보나 서까래의 나뭇결이 너무도 신선하고 선명하여 이유를 물었더니 쌍벽당의 18대 종손 김두순 선생이 그 일화를 재미있게 소개한다. 옛날에는 집을 새로 지으면 목재에 들기름을 발라 좀이 스는 것도 막고 나무 특유의 윤이 나도록 하였기 때문에 쌍벽당을 관리하는 종손으로서 정성을 다해 볶은 들깨로 짠 들기름을 목재에 발라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들기름을 바르고 난 뒤 나무에 곰팡이가 피고 색도 검게 변해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던 중 목재에 칠하는 들기름은 생 들깨로 짠 들기름이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결국 기름칠을 한 나무 표면을 대패로 밀어내는 수고를 한 끝에 춘양목의 나뭇결이 산뜻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쌍벽당은 이렇듯 1505년경 습독공 김균이 안동의 구담으로부터 거촌으로 옮겨와 터전을 잡으면서 광산 김씨 쌍벽당공파의 종택으로서 500년의 역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쌍벽당은 습독공 김균의 아들 김언구(1507 ~ ?)의 당호로 이는 소나무와 대나무에 대한 특별한 그의 애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예로부터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는 절개와 의리로 학문적 자부심이 높았던 선비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는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효도와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또한 산이나 빈터에 나무심기를 권장하였으며 덕망이 높아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1505년경 안채가 건립되었고 명종 21년인 1566년에 쌍벽당 김언구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에서 쌍벽당 정자를 건립하였다. 갑자년인 1864년(고종 1년)과 임진년 1892년(고종 29년)에 중수하면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와 1984년 1월 국가 중요 민속문화재 제170호로 선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쌍벽당 중수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역사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 … 반송(盤松)과 수죽(脩竹)을 뜰에다 심어두고 날마다 그 곳을 거닐며 거문고와 퉁소로 자호(自號)를 하니, 정자(正字) 홍사제께서 당의 편액으로 삼았다. 쌍벽당을 창건한 것이 병인년(1566)이니 지금부터 거의 사백년이나 되었다. 무너지고 썩은 것이 많아 지난 갑자년(1864)에 상사공께서 남쪽 익실 세 칸을 중수하여 하서(霞棲)라고 편액하고 거처하셨으나 크게 중창하지는 못했다. 그의 손자인 용완이 비로소 임진년(1892) 중춘에 일을 시작하니 후원을 없애고 다른 산에서 목재를 구해다가 정침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별도로 외청을 지어서 하서(霞棲) 편액을 옮겨 달아 드디어 쌍벽당을 단장하니 그 익실은 분명하게 서까래가 뻗어 우뚝하였다. - 후략 - ”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방과 광을 배치하고 왼쪽으로 두 칸의 광과 한 칸의 광 사이에 외양간을 배치한 대문채를 지나자 독특하게도 돌계단 위로 사랑마당이 펼쳐지고 맞은편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랑채가 팔작지붕을 얹고 있다. 사랑채 오른쪽 뒤편으로 쌍벽당 정자가 엿보이고 왼편으로는 특이하게도 우진각 지붕을 얹은 행랑채가 직각으로 놓여있다.
방문객의 기척을 느꼈는지 사랑채의 왼쪽 하서(霞棲)라는 편액아래 머름 위로 2분합 세살창이 열리면서 쌍벽당의 종손인 김두순 선생이 우리는 맞는다. 하서(霞棲)는 노을 속에 깃든다는 뜻으로 은거를 의미하는데 이는 선조의 유훈을 받드는 쌍벽당 후손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선생의 안내로 사랑채 왼편의 중문으로 들어선다. 중문은 안채로 들어가는 통로이면서 동시에 사랑방의 구들을 뜨끈하게 데우는 부엌의 역할도 하고 있다. 이것 역시 다른 한옥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면이다.
안채는 좌우 대칭의 ㄷ자 형태이지만 중문채를 정면에 두고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ㅁ자 구조다. 맞배지붕을 높이 얹은 천장은 나무의 곡선을 자연스럽게 살린 서까래와 대들보가 춘양목의 붉은 나뭇결을 드러내어 고풍스럽다. 안채 가운데 널찍하게 귀틀마루로 대청을 놓았고 양 쪽으로 방과 부엌이 대칭을 이루며 배치되었으며 양 쪽 부엌은 밖으로 통하는 문을 내었다. 오른쪽 부엌문은 사랑채 뒤편을 통해 쌍벽당 정자를 거쳐 사당으로 연결되는 동선으로 이어져 여인들의 걸음을 절약하도록 배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안채의 특징적인 점은 덤벙주초 위에 당당하게 서 있는 둥근 배흘림 기둥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의 우주관에 따라 둥근기둥은 주로 궁궐이나 사찰, 관아와 같이 권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는 건물에 쓰이고 상대적으로 낮은 민간인의 집에는 땅을 상징하는 방주, 즉 네모진 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인지 쌍벽당의 사랑채나 정자 등 겉으로 드러나는 건물에는 모두 방주를 사용하고 숨겨진 안채만 원주를 사용하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사랑채의 오른쪽 뒤편에는 쌍벽당 정자가 사랑채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다. 가장 왼편에 한 칸 방을 들였고 세 칸의 대청을 오른편에 배치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사랑채와 같은 높이로 돌계단을 놓았고 전면 마루에 풍혈이 있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화려하게 보인다.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둔 채 방문객을 맞는 고택이 아니라 후손이 직접 거주하고 있는 살림집이면서도 이토록 깔끔하고 정갈하게 관리되는 종택을 보기가 어려운데 살림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는 쌍벽당은 18대 종손 김두순 선생의 타고난 부지런함과 열정적인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85세의 나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종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여 방문객을 놀라게 한 선생은 알고보니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는 드러난 성취는 없지만 오백년을 실패 없이 유지해 온 생명력을 성공의 또 다른 모습으로 믿고 있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권력과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500년을 변함없이 이어온 안정적인 쌍벽당 가문의 모습은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모 섬기기, 형제와 우애하기, 가정을 바르게 하기, 제사에 정성을 다하기, 벗과 손님을 접대하기, 자손 가르치기, 집안 간 화목하기,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기, 본업에 충실하기, 세금 바로내기’는 쌍벽당 제가십잠(齊家十箴)이다. 집안을 다스리는 열가지 잠언으로 가장 기본이지만 정작 지키기는 어려운 원칙이 쌍벽당 500년을 지켜온 힘이었음을 보여준다.
‘동 트면 얼른 일어나 이불을 개고 옷을 입습니다.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흐트러진 데는 없는지 둘러보고 대문을 나섭니다. 솟을대문 처마 끝에서 담벼락과 대문 앞마당까지 빠짐없이 살펴봅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기에 안심입니다. - 중략 - 다시 돌아 나와 쌍벽당 정자를 지나 중문을 통해 안마당으로 들어오며 사랑채를 살핍니다. 하서(霞棲) 현판도 제대로 붙어있고 모든 게 어제와 같습니다. 안채 대처마루 기둥을 올려다보며 오늘도 하루가 시작되었으니 오백년 굳건한 그대로 지탱해다오 하고는 안채 앞 남쪽 뜰과 뒤란으로 한 바퀴 돌아갑니다. 매일같이 건사하는데 또 삽을 댈 일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방으로 돌아오니 먼데서 닭이 울고 어느 틈에 훤히 밝아옵니다.’
윗글은 김두순 선생이 종손으로서 쌍벽당을 지켜온 자신의 삶과 쌍벽당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손에 대한 삶의 이정표로 제시하고자 한 『벼슬하지 말라』의 한 대목이다. 오백년을 이어온 역사에 대한 책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으련만 소명의식으로 순응하여 받은 대로 물려주고 들은 대로 전하여 온 개인의 기록이며 동시에 한 집안의 역사인 것이다. 그 기록에는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들도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토지를 중심으로 식구들이 모두 한 집에 살면서 대가족을 이루던 농경사회에서는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은 종손이 가족 공동체를 책임지는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한 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는 종법제도가 당연한 일로 이해되었지만, 공동체의식이 약화되고 가족들이 모두 모일 기회조차 적은 오늘날과 같은 산업사회에서는 장자로 태어나지 못한 아들이나 딸들에게 이러한 전통이 부당할 것이다. 물론 상속법이 버젓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법이 공정하게 지켜지기 어렵기 때문에 재산 분배의 문제가 형제간 갈등으로 번지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선생의 형제가 늘그막에 만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면서 나누었던 대화 중에서 그런 갈등을 짐작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삼촌들은 논밭 마련해주고, 형님한테도 종가 재산 물려주고 나는 하나도 못 받았습니다.’ 라는 동생의 말에는 부당한 차별에 대한 서러움이 느껴진다. 종손으로서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비용도 필요하겠지만 그것이 형제간 갈등의 원인이 되지 않도록 현명하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모으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그런 인간의 책임과 갈등을 아는지 모르는지 쌍벽당은 오늘도 단정하고 엄숙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연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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