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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_고택순례-상주 양진당 ( 尙州 養眞堂 ) / 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양진당길 27-4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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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교육의 산실, ‘참됨을 지켜 기르는 집’ 양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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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8월 19일(토) 14:10 [(주)고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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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고창신문 | |
아이는 요란한 참새소리를 알람삼아, 어른들이 모두 들일을 나가신 텅 빈 방에서 혼자 깨어나곤 하였다. 시끌시끌한 참새소리마저 없었더라면 여름 땡볕 아래 졸고 있던 시골집의 적막함이 아이를 울렸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할아버지 댁 뒤란에는 대낮에도 컴컴한 대숲이 있었다. 수다쟁이 대숲 참새들의 끊임없는 지저귐이 각인된 모양이어서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라는 속담은 머릿속에서 저절로 ‘참새가 대숲을 그냥 지나치랴’로 치환되곤 한다.
예전에는 대나무의 쓰임새가 많아서 터 넓은 집 뒤편에는 어김없이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대나무 뿌리가 구들장까지 뻗어 집을 버린다고 하여 한옥과 대나무는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영원한 밀당의 관계이기도 하였다.
상주의 양진당도 대나무를 그저 몇 그루 뒷담 너머 멀리에 놓고 담 안으로 솟는 대나무가 있으면 뽑아낸다고 하였다.
양진당은 1626년 검간(黔澗) 조정(趙靖)에 의해 건립되었다. 후손들이 참되게 살기를 바라는 의미로 당호를 ‘참됨을 지켜 기르는 집’이라는 뜻의 ‘양진당’이라고 하였다. ‘양진당’이라는 당호는 안동의 풍산 류씨 종택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안동의 양진당과는 다른 건축물이다. 안동 양진당은 16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풍산 류씨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의 종택이다. 검간은 서애 류성룡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데 류운룡이 류성룡의 맏형이고 보면 검간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동경이 같은 당호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검간 조정(1555(명종 10)∼1636(인조1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검간은 그의 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으로 이는 그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선조 때 동인 김성일은 서인 황윤길이 일본의 침략을 예고한 것과 달리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고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보고와는 반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책임을 통감하며 왜적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
검간의 처삼촌이기도 하던 김성일은 선조의 어명을 받아 영남지역 선비들의 창의(倡義)를 독려하였다. 그 결과 상주 지역에 창의군이 결성되어 검간은 참모 겸 서기의 역할을 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두 아들을 모두 의병으로 내보내는 등 그는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지도층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준 선비였다. 나라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은 부모에 대한 효심을 바탕으로 자라나는 듯 그는 효심 또한 지극하였다. 1587년 조부의 상 끝에 조부의 여막을 지키던 부친도 병을 얻어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부친의 묘 아래서 여막을 지켰다. 검간이라는 그의 호도 부친의 묘 근처를 흐르는 하천 이름인 검천에서 따왔다고 한다.
선조 32년(1599)에는 천거로 참봉이 되고, 선조 36년(1603)에는 사마시에 합격한 뒤 좌랑으로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겸춘추기사관,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등을 거쳐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지만 어떤 직책이든 그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해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교화와 구휼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봉상시의 임기가 만료되면 통례적으로 승진할 수 있었으나 ‘늙은 몸이 승진을 바라는 것은 병’이라며 질병을 핑계삼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1628년 거처인 양진당과 가묘를 짓고 한가롭게 독서하며 지내던 중 1636년 82세의 나이로 양진당 정침에서 별세했다. 인조 20년(1642)에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에 봉향되었다. 현재 속수서원은 행정구역상 의성군에 속하지만 조선시대 1895년(고종 32)까지 877년 동안은 상주목에 속해 있었다 한다. 검간의 특별함은 『검간 조정 임란일기』에서 다시 빛을 발한다. 보물 1003호로 지정된 이 일기는 후손 조용중의 기증으로 상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의 일기로 상권은 1592년 4월 1일부터 6월 6일까지, 하권은 1592년 6월 7일에서 12월 17일까지 모두 242일간의 일기이다. 설명에 의하면 6월 7일에서 6월 16일까지 10일간의 기록은 빠져있다고 한다.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던 그의 문장도 문장이거니와 당시의 상황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기록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어서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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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의 양진당은 풍양 조씨 검간공의 종택으로 현재는 풍양 조씨 장천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5년 12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7월 국가 지정 보물 제1568호로 승격되었다. 그만큼 보존가치가 높은 건축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981년 11월에 양진당 해체 중 종도리에서 발견된 기록과 상량문에 의하면 양진당은 1626년에 건립하고 1807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66년 대홍수 때 사랑채가 쓰러지는 등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아 안채 23칸만 남은 것을 1981년에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 2006년까지만 해도 가옥의 전면부가 없어서 ㄷ자형이었는데 상주시의 지원으로 전면부가 복원되어 원래의 ㅁ자 형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수년 전 부터는 풍양 조씨 문중에서 문중 제사 및 후손들의 독서와 학문연구를 위한 풍양조씨연수원으로 활용하고 있어서 양진당의 대문채에는 ‘풍양조씨연수원’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매년 풍양 조씨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가문의 전통을 비롯하여 다양한 교양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같이 참여하는 행사처럼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풍양 조씨 문중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 양진당이 있는 자리에는 1601년(선조 34)에 세워진 오작당(悟昨堂)이라는 살림집이 있었는데 임진왜란(1592) 이후인 1626년(인조 4)에 검간공이 그 자리에 안동 임하에 있던 처가 문중의 99칸 가옥을 옮겨 양진당을 지었다고 한다. 오작당은 1661년(현종 2년)에 조대윤에 의해 현재 위치로 옮겨오게 되었다. 양진당의 인근 지역에 위치한 오작당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일 인물인 검간공이 지은 건축물로 양진당의 원초형이라 평가받는다. 상주지역의 살림집은 안동과는 달리 대부분 홑집인데 양진당과 오작당은 모두 겹집으로 지어져 있고 네모진 기둥의 모를 접어 둥근 기둥으로 세운 점 등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원래의 모습이 99칸이었다 하니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와는 많이 다를 것임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대문채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다른 고택의 구조로 볼 때 중문채처럼 느껴지는 건물이 정면에 자리를 잡아 보통의 살림집과는 거리가 먼 구조이다. 오른쪽 네 칸은 사랑채 형식을 갖추어 두 칸은 방을 들였고 두 칸에 대청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정면 9칸, 측면 7칸의 '口'자형 맞배지붕 건물인데 집 뒤쪽으로 상주의 명산 갑장산 줄기가 네 줄의 선 모양으로 뻗어 있어 그 앞에 '口'자 형태의 집을 지음으로써 집과 뒤의 산이 '말씀 언(言)자'를 형성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문채의 오른 편 뒤쪽으로는 사당이 있고 둘러진 담장 밖 왼편으로는 안내소가 있어서 양진당이 잘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ㅁ’자 하늘과 ‘ㅁ’자 마당을 품안에 가두고 오붓하게 들어앉은 안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막돌 허튼층쌓기로 한껏 기단을 높여 학교 건물을 연상시키는 안채는 양쪽 팔을 앞으로 나란히 하듯 뻗어 대문채에 걸쳤다. 가운데칸 서까래 아래로 ‘양진당’이라는 편액이 보이는데 ‘영가(永嘉) 김충현’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김충현은 호가 ‘일중’으로 ‘영가’는 그의 관향인 안동을 표현한 것이다. 안채에 오르는 계단은 양쪽으로 사다리같이 놓여있다. 7단의 계단을 올라야 풍혈이 없는 머름위로 무뚝뚝하고 소박한 난간을 두른 우물마루를 디딜 수 있다. 이렇듯 높은 기단은 남방식 가옥의 특징으로 여름에 뜨겁게 올라오는 지열을 막는다. 특히 양진당이 위치한 곳은 낙동강과 가까운 저지대여서 홍수에 대비하기 위한 지혜로 볼 수도 있겠다.
전면 덤벙주초 위에 당당하게 서있는 6개의 기둥은 이음새가 없는 통기둥인데 마루 아랫부분은 네모진 방주로, 마루 윗부분은 둥근 원주로 다듬었다. ‘네모에서 원이 나왔다’는 방출원(方出圓)을 표현한 것이라 하기도 하고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철학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집도 하나의 예술품이고 보면 대부분의 예술작품들이 감상자에 의해 다시 태어나듯 감상자의 서로 다른 해석도 고택을 감상하는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기둥을 따라 고개를 위로 젖히면 겹처마의 특이한 점이 눈길을 끈다. 일반적으로 부연은 네모진 방형이어도 서까래는 둥근 원형이기 마련인데 이 곳의 서까래는 부연과 같은 방형의 서까래여서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마루 아래를 잘 들여다보면 그 위가 방인지 마루인지 알 수가 있다. 마루 아래가 막혀있는 부분은 방이고 둥근 통풍구가 보이는 부분은 그 위가 마루인 것이다. 양진당의 굴뚝은 마루아래 낮게 설치되어 있어서 연기가 안마당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있다. 굴뚝이 낮아 연기가 더 잘 빠지는 구조로 안마당으로 빠져나온 연기가 집안을 고루 휘감고 돌아 해충을 몰아내고 살균 효과까지 얻을 수 있으며 습기 제거에도 효과적이라고 한다. 사회적인 의미로는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오르지 않기 때문에 밥 굶는 이웃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했으며 멀리 있는 적으로부터 은폐의 효과까지 고려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지어진 건물이고 보니 그런 지혜를 낼 만도 하다고 생각된다.
안채는 정면 9칸의 겹집으로 오른쪽으로는 50명 이상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 6칸의 넓은 대청을 두었고 왼쪽으로는 ‘田’자 형태로 6칸의 방을 들였다.
이러한 겹집은 겨울의 찬 공기로부터 열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한 북방식 구조이다. 양진당은 이처럼 남방식과 북방식의 특징을 모두 갖추어 조선 중기 가옥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안채의 전면 창호는 모두 중간설주가 있는 영쌍창으로 이러한 형태는 18세기 이후 건축물에서는 자취를 감추어 오래된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양쪽이 대문채를 향해 4칸씩 앞으로 돌출된 형태로 마당에서 보면 이층에 붙박이 정자살 광창을 달고 있는 고방이 보이는데 밖에서는 이 곳에 들어갈 방법이 없고 안채의 내부 방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 비밀의 공간과 같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안채의 대청은 교육 기관으로서도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사립 풍창학교 설립을 시도하여 신문화 개척에 앞장섰고 일제강점기에는 조명강습소를 개설해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는 풍양조씨연수원으로서 후손들에게 집안의 유래와 예절, 교양 등을 가르치는 뿌리교육의 산실로 이어지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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