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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순례_구례 운조루 (求禮 雲鳥樓)/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⑤

‘타인능해(他人能解)의 나눔과 베풂의 미덕, 구례 운조루

2017년 09월 08일(금) 17:44 [(주)고창신문]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흐르고(雲無心以出岫), 지친 새는 돌아올 줄 아네.(鳥倦飛而知還)’

ⓒ (주)고창신문


운조루에는 이야기가 많다.
구름 속으로 몸을 감춘 새가 옛이야기를 전하듯 그 이야기들은 신비롭다.
호랑이를 채찍으로 때려잡아 솟을 대문 홍살에 호랑이 뼈를 걸어놓았다는 이야기, 이 집을 짓기 위해 축지법으로 천리 길을 오가며 집을 완성하였다는 이야기, 집터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던 중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온 ‘금구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이라는 이야기, 굶주리는 이웃이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글귀를 적어놓은 쌀독의 이야기 등 그 이야기들은 흥미롭고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낭만적인 택호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겠다. 운조(雲鳥)라는 당호는 중국의 대표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2장 후반부에서 두 글자를 따온 것이다.
버드나무를 사랑하여 집 주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놓고 스스로를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도 불렀다는 도연명은 “오두미의 녹봉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는 기개로 41세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며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쓴다. 4장으로 이루어진 330여 글자 중 2장은 집에 도착한 기쁨을 표현한 장이다. 후반부에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흐르고(雲無心以出岫), 지친 새는 돌아올 줄 아네.(鳥倦飛而知還)’라는 구절에서 첫 두 글자 ‘운’과 ‘조’를 따서 이름을 삼았다고 하니 이 고택의 주인이 문학과 시를 사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다. 운조루는 문화 류씨 곤산군파 후손 류이주의 설계로 건축되었다. 그가 구례에 내려온 것은 유배가 풀린 이듬해였으니 귀거래사의 문장들이 자신의 이야기인 듯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라 짐작된다.
류이주(1726~1797)는 아버지 류영삼(1675~1735)과 어머니 영천 최씨 사이의 세 아들 중 둘째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호는 귀만(歸晩)이고 후손들은 ‘삼수공’으로 부른다. 장사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그는 서울로 올라가 28세가 되던 1753년(영조29)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755년(영조31)에 그 당시 사도세자의 장인으로 비변사 구관당상이었던 홍봉한(1713~1778)의 천거로 특채되었다. 1767년 42세에 수어청에 배속되어 남한산성을 쌓는 일에 종사하였다. 이듬해 전라도 병마우후가 되어 46세가 되던 1771년에 낙안군수가 되었는데 1773년 낙안세곡선이 한양으로 가던 길에 침몰하자 그 책임을 물어 삼수(三水)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귀거래사에 표현된 도연명의 심정으로 가족을 이끌고 구례로 들어오게 된다. 1775년 조카 덕호가 구례 토지면의 토호였던 이시화의 딸과 혼인함에 따라 운조루 자리를 집터로 넘겨받는다. 산사태의 위험이 있고 돌이 많아 개간하기 힘든 땅이었지만 그는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땅으로 하늘이 아껴둔 것”이라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집터를 닦던 1776년 함흥 오위장(五衛將)으로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는다. 1776년 9월 16일 상량식을 가진 운조루는 6년 후인 1782년이 되어서야 완성된다. 류이주는 1776년 함흥에 부임한 뒤 이듬해 상주 영장을 거쳐 1782년에는 평안북도 용천부사로 있었으므로 그의 설계에 따라 집을 짓는 일은 조카인 덕호가 맡아했다. 한치도 다르지 않게 설계대로 집을 지으라 엄명을 내렸다하니 하룻밤 새 축지법으로 천리길을 오가며 공사를 감독하였다는 말이 나올 법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후 1790년 삼수부사 재직 때 조카인 덕호를 양자로 입양시키고 운조루를 비롯한 재산을 물려준다. 금구몰니의 명당임을 증명하듯, 집터를 닦던 중 출토된 럭비공만한 크기의 거북처럼 생긴 돌은 집이 완성되던 해인 1782년부터 함(函)을 만들어 가보로 보존해왔으나 1989년 도둑이 들어 없어지고 말았다. 돌이 출토된 장소를 혈자리로 보아 안방을 배치해야 함에도 거북의 특성상 물이 마르면 안되므로 혈자리를 부엌으로 배치하였다는 설도 흥미롭다. 매사에 삼가고 신중하게 결정하였던 선인들의 경외와 겸허함을 느낄 수 있다.
류이주는 수원화성을 비롯하여 함흥성, 남한산성 등 여러 성과 궁궐의 공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도 손 댈 엄두를 내지 못했던 명당을 알아보고 집터를 닦고 설계를 한 운조루 역시 건축에 대한 그의 혜안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에 지어진 집이어서 그런지 운조루에는 방어적 느낌이 드는 부분들이 있었다. 집 앞에 넓게 자리잡은 방형(方形)의 연지(蓮池) 뿐 아니라 집을 감싸듯 흐르는 시냇물은 해자와 같은 역할을 하여 범인(凡人)들이 함부로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모양새이다. 연못을 꾸민 여느 사대부 종택처럼 운조루의 연못도 네모진 방형에 둥근 동산을 꾸몄는데 이는 천원지방의 우주관에 바탕을 두고 풍수지리적 비보(裨補)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주)고창신문

 

ⓒ (주)고창신문

 


























솟을 대문을 중앙에 둔 행랑채는 일자형으로 집 전체를 길게 막아서고 있어서 외부인을 경계하는 구조이다. 근자에 비가 온 듯 제법 기세있게 흐르는 시냇물은 여름철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아니었을까? 시냇물은 아이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었던 듯 다리 아래로 소박하게 꾸며진 빨래터도 보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대문 앞에 지리산 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는 전용 빨래터는 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에 말할 것도 없이 커다란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솟을 대문의 홍살문을 올려다보니 짐승의 뼈가 두어 개 매달려있다. 벽사의 의미로 가시가 많은 나무를 걸어놓는 경우는 보았지만 짐승의 뼈가 걸려있는 모습은 처음이라 대문에 앉아계신 종부에게 물었더니 이 집을 설계한 류이주 선조가 채찍으로 때려잡은 호랑이 뼈라 한다. 가죽은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벽사의 의미로 솟을 대문 홍살문에 걸은 것이다. 이 일로 류이주는 영조대왕으로부터 ‘박호장군’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호랑이 뼈의 효험은 남편의 바람기 까지도 잡아주기 때문에 예로부터 그것을 간직하고자 하는 부인들이 많아 하나는 도둑을 맞고 남은 하나마저 조금씩 떼어주다 보니 크기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호랑이 뼈를 가져간 부인들이 아이를 낳은 후 고맙다는 연락도 해온다는 종손의 설명이다. 동물원이나 가야 호랑이를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에게는 먼 전설속의 이야기 같기만 하다. 일자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는 화재로 인하여 5칸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로 길다. 원래는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동행랑과 서행랑이 각각 12칸씩이었으나 지금은 소실되어 11칸의 동행랑과 7칸의 서행랑만 남아있다. 서행랑 끝 두 칸은 가빈터로 이 고택의 특징적인 시설이다. 요즘에는 상을 당하면 보통 3일만에 매장의 절차까지 이루어지는데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멀리서 오는 조문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망자의 시신을 집에 오래 둘수록 복을 받는다는 관념 때문에 5개월 또는 3년을 집에 두기도 하였다고 한다. 가빈터는 시신을 안치하는 곳으로 가빈터만의 전용공간을 두는 집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고인이 돌아가신 후 3일이 지나면 입관한 후 이곳에 3개월동안 안치되었다가 출상하였다고 하니 돌아가신 분에 대해 극진한 예를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주)고창신문



솟을 대문을 지나 사랑채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에 큰 사랑채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작은 사랑채가 서쪽을 향하여 배치되었는데 작은 사랑채 난간을 따라 중문으로 연결되는 길이 경사로이다. 가빈터에 이어 운조루만의 특징적인 설계가 아닐 수 없다. 현대적 건축물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배려하는 경사로를 흔하게 볼 수 있지만 고택에서의 경사로는 흔치않다. 이는 집안의 어른이 가마를 타고 큰사랑채까지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설계라고 한다. 남향의 큰 사랑채는 6단으로 높인 기단 위 대청을 중앙에 두고 동쪽으로는 온돌방, 서쪽으로는 누마루를 배치하였다. 보통 디딤돌을 놓는 다른 고택과는 달리 통나무로 만든 디딤나무를 놓아 따뜻하고 소박하다. 큰사랑채에 오르니 동쪽에 배치된 사랑방은 남쪽 창에 머름을 두어 바깥 시선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하였다. 대청마루를 비롯하여 내부의 문을 모두 들문으로 만들어 필요에 따라 모든 공간을 시원하게 통하도록 하였다. 우물마루로 바닥을 놓은 누마루는 대청과 단 차이를 두어 짜임새를 주었고 밖으로 한 칸씩 내민 형식을 갖추어 공간적 트임을 강조하였다. 활주를 받친 팔작지붕 아래 풍혈을 둔 계자난간으로 꾸며진 누마루에 앉아보니 아름답게 놓인 부채살 모양의 선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선자연(扇子椽)은 한국건축에서 가장 섬세하고 세련된 기법이 살아있는 부분으로 목수가 선자연을 제대로 걸기까지는 오랜 수련이 필요할 정도로 쉽지 않은 목조기법이라 한다. 누마루의 기둥 또한 그 문양이 예사롭지 않다. 네 기둥은 운조루의 10대 보물 중 하나로 소개되고 있다. 각각 호랑이, 나비, 바닷물결, 스님의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200년 이상된 목재에서나 볼 수 있는 문양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큰사랑채와 아랫사랑채의 각 공간마다 二山樓(이산루), 足閒亭(족한정), 雲鳥樓(운조루), 歸晩窩(귀만와), 귀래정(歸來停), 농월헌(弄月軒) 등의 현판이 걸려있었으나 여러 차례 도둑이 들어 현판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없어지고 그나마 남아있던 유물들은 보관상의 문제로 2016년 개관한 유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누마루에 앉아계시던 이 댁의 종손이 누마루 뒤쪽 북쪽 방에 대해 이야기를 건넨다. 큰 사랑채의 대청 뒤쪽 별도로 마련된 작은 방은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구조적으로 만든 방이라 한다. 여기서 공부한 자손들이 5대째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공부에 효율성을 높인 공간으로 방을 가장 구석진 곳에 두어 조용한 공부 환경을 조성하기에 알맞게 되어 있다. 방의 출입문 또한 작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출입을 어렵게 하였다. 하지만 이 방과 맞닿은 담은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이어져 공부에 지친 서방님이 살짝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고 귀띔을 해주신다. 큰 사랑채를 나와 작은 사랑채에서 이어진 중문 앞에는 운조루의 큰 자랑거리 중의 하나인 ‘타인능해’의 쌀독이 놓여있다. 손잡이를 돌리면 쌀이 나오도록 만들어진 마개가 있었으나 그것마저 도둑을 맞아 지금은 구멍만 두 개 뚫려있다. 누구나 쌀독을 열어 쌀을 가져갈 수 있다고 쓴 ‘타인능해’는 지나친 자유경쟁으로 삭막해져만 가는 현대인의 이기심을 부끄럽게 한다. 운조루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나눔과 베풂의 정신이 동학혁명과 6.25전쟁 등의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도 오늘날까지 운조루를 지탱한 힘이었을 것이다.
중문으로 들어서면 보이는 안채는 안마당에 장독대를 두고 양쪽에 날개채를 뻗어 중문채의 어깨까지 ‘앞으로 나란히’를 한 ㅁ자 형태의 건물이다. 안채에도 기단을 경사로로 만든 점과 양쪽의 날개채에 각각 다락을 두어 2층의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난간을 둔 동쪽의 2층 다락은 웃어른이 쉬던 장소이고 서쪽의 2층은 아이들과 며느리들의 공간으로 난간을 두지 않아 웃어른의 공간과 위계적인 차이를 두었다. 사랑채나 안채나 운조루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들은 큼직하여 안정감과 호방함을 느끼게 한다. 안채의 동쪽으로는 아담한 돌담을 두르고 한 칸 규모에 툇마루를 둔 사당이 있다.
2016년 4월 18일에 개관한 운조루 유물전시관에는 운조루를 대표하는 유물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구한말 구례지역 사회변화와 풍습을 엿볼 수 있는 류이주의 5대손 류제양의 일기 ‘시언(是言)’과 7대손 류형업이 13세부터 1937년까지 40여년간 기록한 일기 ‘기어(紀語)’를 비롯하여 운조루에서 사용한 생활민속품과 고문서, 영정, 교지, 행장 등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독일의 철학자 볼노브는 거주 공간으로서의 집은 외부 세계에 대해 열릴 수 있는 닫힘의 공간으로 밖에서 자신의 일을 충족시켰다면 다시 자기 집의 보호로 돌아올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여러 고택을 답사하면서 고택은 이미 거주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시로 관람객이 드나들고 모든 공간이 개방될 수밖에 없는 그런 곳에서 거주자가 안정과 평화를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따로 거주하는 집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는 보통 고택체험 등의 상업적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지만 거주할 집이 따로 없는 경우에는 후손들의 삶이 매우 옹색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운조루는 대문채에 종부가 나와 앉아 관람객들에게 어른 한 명당 천원의 관람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후손들의 입장이 이해는 되었지만 ‘타인능해’의 나눔과 베풂을 자랑하는 종가이기도 하거니와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의 양반가를 이어가는 종부나 종손의 품격을 생각하면 어색하고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만간 구례군에서나 종친회 차원에서 좋은 대책이 마련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글. 사진 유석영, 조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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